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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골책방

"원금 보장됩니다" / 그 말을 믿은 / 내가 바보였습니다

by 제 4의 창 2026. 5. 16.

https://youtu.be/nKwx3MnN8KA

《유리 빌딩의 마지막 투자자》는 여의도 초고층 빌딩 ‘아크로스타워’를 둘러싼 투자 사기와 금융 스캔들을 다룹니다. 투자자 김동혁은 안정적인 수익을 약속하며 수백억 원을 모았지만, 실제로는 공실률이 두 배 이상 높고 임차 기업 상당수가 페이퍼컴퍼니였습니다. 기자 이홍희는 분식회계의 단서를 발견하고 진실을 추적합니다. 내부 고발자 최병수의 실종, 법무법인의 경고, 그리고 보이지 않는 손의 개입까지… 이 이야기는 단순한 건물 붕괴가 아니라 신뢰의 붕괴를 보여줍니다.

 

제1장. 유리탑 아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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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여의도의 밤은 언제나 빛으로 가득합니다.
 
한강변을 따라 늘어선 고층 빌딩들이 저마다의 불빛을 강물 위에 흘려보내고, 그 위로 검은 하늘이 무겁게 내려앉아 있습니다. 10월의 바람이 불어오면 가로수 잎들이 일제히 몸을 떨고, 퇴근길 직장인들은 옷깃을 여미며 지하철역 계단 아래로 사라집니다. 이 도시는 언제나 분주하고, 언제나 활기차며, 언제나 무언가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밤, 김동혁은 달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의도 중심부에 세워진 '아크로스타워' 앞 광장 벤치에 앉아 오직 위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지상 68층, 유리와 강철로 이루어진 이 건물은 완공 당시 한국 건축 역사의 새 장을 열었다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낮에는 푸른 하늘을 반사하고 밤에는 도시의 불빛을 모아 다시 내뿜는 이 건물은, 그야말로 현대 자본주의의 화신처럼 보였습니다. 그 어떤 부동산 홍보물보다도 설득력 있는 시각적 증거물이었습니다.
 
김동혁은 마흔세 살이었습니다. 부산 출신이었고, 대학은 서울로 올라와 경제학을 전공했습니다. 졸업 후에는 중견 증권사에서 10년 넘게 리서치 애널리스트로 일했습니다. 숫자를 읽는 것에 탁월한 재능이 있었고, 그 재능 덕분에 30대 중반에 팀장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언제나 더 큰 무언가를 향한 갈망이 있었습니다. 증권사의 분석 보고서가 아니라, 직접 자본을 움직이고 싶다는 욕망. 숫자를 해석하는 사람이 아니라, 숫자의 주인이 되고 싶다는 욕망이었습니다.
 
그 욕망이 그를 이곳으로 이끌었습니다.
 
3년 전, 그는 증권사를 그만두고 '한길자산운용'이라는 독립 자산운용사를 설립했습니다. 주력 투자 분야는 대형 부동산 개발사업에 대한 프로젝트 파이낸싱이었습니다. 여러 사업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이 바로 이 아크로스타워였습니다. 개발사인 '미래랜드코퍼레이션'이 추진한 사업에 김동혁의 한길자산운용은 총 800억 원 규모의 펀드를 조성해 투자했습니다. 개인 투자자 수백 명의 돈이 담긴 펀드였습니다.
 
바람이 다시 불어왔습니다. 벤치 위에 떨어진 단풍잎 한 장이 천천히 굴러갔습니다.
 
김동혁은 입술을 꾹 다물었습니다. 오늘 오전 그는 미래랜드코퍼레이션의 재무팀장 최병수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공식 회의 요청이 아니었습니다. 번호도 등록되지 않은 낯선 휴대전화에서 걸려온 전화였고, 목소리는 낮고 긴박했습니다.
 
"김 대표님, 지금 당장 만나야 할 것 같습니다. 회사 안에 있으면 안 됩니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시고요."
 
그 짧은 문장이 김동혁의 하루를 통째로 흔들어놓았습니다.
 
그들은 여의도 외곽의 허름한 커피숍에서 만났습니다. 최병수는 평소와 달리 넥타이도 매지 않았고, 정장 재킷 대신 후드티를 입고 있었습니다. 그의 눈 밑에는 짙은 다크서클이 자리 잡고 있었고, 손가락이 커피잔 위에서 미세하게 떨렸습니다.
 
"아크로스타워 분기 보고서, 보셨죠?"
"물론이죠. 공실률 18퍼센트, 하반기 회복 전망."
"그거 가짜입니다."
 
김동혁의 손이 멈췄습니다.
 
최병수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본 뒤 목소리를 더 낮췄습니다. 실제 공실률은 38퍼센트에 육박하고 있으며, 하반기 회복이라는 전망의 근거가 된 임차 계약 중 상당수가 페이퍼 컴퍼니와의 형식적인 계약이라는 것. 임대료 수입이 절반도 들어오지 않고 있다는 것. 그리고 미래랜드코퍼레이션이 수개월째 이 사실을 숨기며 새로운 투자자를 모집해 왔다는 것.
 
그 이야기를 들으며 김동혁의 머릿속에서는 지난 3년의 시간이 빠르게 되감겼습니다.
 
투자자 설명회에서 자신이 했던 말들이 떠올랐습니다. "안정적인 임대 수입이 보장됩니다." "프리미엄 입지에 기반한 우량 자산입니다." "원금 손실 가능성은 극히 낮습니다." 그 말들을 믿고 수천만 원에서 수억 원까지 맡긴 사람들의 얼굴이 스쳐지나갔습니다. 은퇴한 교사 부부,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자영업자, 아이들 교육비를 마련하려는 30대 부모들.
 
그 돈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김동혁은 아크로스타워를 다시 올려다보았습니다. 건물 꼭대기 층에서 불빛이 깜빡였습니다. 마치 무언가를 경고하듯.
 
그는 벤치에서 일어났습니다. 손이 차갑게 식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눈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10년의 애널리스트 경력이 그에게 가르쳐준 것이 하나 있다면, 숫자는 거짓말을 할 수 있지만 숫자가 남긴 흔적은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증거가 있을 것입니다. 어딘가에는 반드시.
 
그는 코트 깃을 세우고 걷기 시작했습니다. 여의도의 불빛이 그의 등 뒤에서 길게 뻗었습니다.
 
문제는 그가 혼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상대가 누구인지, 얼마나 깊이까지 이 일이 뻗어 있는지, 아직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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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숫자 뒤에 숨겨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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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희는 새벽 다섯 시에 눈을 떴습니다.
 
서울 마포구의 작은 오피스텔, 침대 옆 책상 위에는 서류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습니다. 어젯밤 자정이 넘도록 들여다보던 재무제표들이었습니다. 그녀는 자다가도 숫자가 보이는 사람이었습니다. 꿈속에서도 대차대조표를 분석하고, 현금흐름표에서 이상한 항목을 발견해 깜짝 놀라며 깨어나는 일이 한 달에 몇 번씩 있었습니다.
 
그만큼 집요했습니다.
 
이홍희는 서른여섯 살이었습니다. 전북 전주 출신으로, 지방 사립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뒤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학벌이 화려하지 않았기에 처음에는 작은 회계법인에서 보조 업무부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있었습니다. 재무제표 속에서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보는 능력이었습니다. 숫자와 숫자 사이의 미세한 불일치, 주석 속에 교묘하게 숨겨진 항목들, 잘 보면 이상한데 대충 보면 그냥 지나치게 되는 구석들.
 
그 능력이 그녀를 경제 전문 매체 '재경투데이'의 조사 기자로 이끌었습니다.
 
재경투데이는 발행 부수가 많은 신문사가 아니었습니다. 구독자 수는 대형 언론사의 10분의 1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금융계에서만큼은 이름이 알려진 매체였습니다. 몇 년 전 한 대형 저축은행의 분식 회계를 먼저 보도해 큰 파장을 일으킨 이후로, 업계에서는 재경투데이가 보도하는 기업은 한 번쯤 다시 들여다봐야 한다는 인식이 생겼습니다. 그 보도를 쓴 기자가 바로 이홍희였습니다.
 
하지만 그 일이 그녀에게 명예만을 안겨다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축은행 보도 이후 그녀는 크고 작은 압박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해당 저축은행과 거래 관계에 있던 광고주들이 재경투데이 측에 압력을 넣었고, 편집장은 이홍희에게 당분간 민감한 기업 취재는 자제하라는 암묵적인 지침을 내렸습니다. 그녀는 그 지침을 지켰습니다. 겉으로는요.
 
실제로 그녀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퇴근 후 개인 시간을 이용해 스스로 조사를 이어갔고, 그 과정에서 아크로스타워라는 이름과 마주쳤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지나쳤습니다. 여의도에 새로 완공된 대형 빌딩, 높은 임대료, 프리미엄 입지. 특별히 이상할 것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금융감독원에 공시된 미래랜드코퍼레이션의 분기 보고서를 뒤지다가 이홍희는 손이 멈추는 것을 느꼈습니다.
 
임대 수입과 관련된 항목이었습니다.
 
보고서 본문에는 임대 계약 현황이 명시되어 있었습니다. 핵심 층의 대부분이 장기 임대 계약을 체결했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보고서 맨 뒤, 누구도 잘 읽지 않는 주석 페이지에는 흥미로운 문장 하나가 들어 있었습니다.
 
"일부 임차인의 경우 계약 이행 여부가 향후 시장 상황에 따라 조정될 수 있음."
 
이홍희는 그 문장을 세 번 읽었습니다. 세 번 읽고도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계약 이행 여부가 조정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계약이라는 것은 이행되거나 이행되지 않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조정'이라는 단어가 끼어들 자리가 없습니다. 이 표현은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쓰인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법인등기부 열람을 시작했습니다.
 
보고서에 임차인으로 등록된 기업들의 이름을 하나씩 조회했습니다. 그 중 상당수가 설립한 지 1년 미만의 신설 법인이었습니다. 납입 자본금이 수천만 원에 불과한 소규모 법인들이었습니다. 사무실 주소가 같은 법인이 여럿 있었고, 대표자 이름이 한 명인데 세 개의 법인을 대표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홍희는 노트에 그 이름들을 모두 적었습니다. 빨간 펜으로 이상한 점들에 동그라미를 쳤습니다. 노트 한 장이 빨간 동그라미로 가득 찼습니다.
 
그녀는 커피를 마셨습니다. 차갑게 식은 커피였습니다.
 
새벽의 오피스텔 창문 밖으로 마포대교가 보였습니다. 한강 위로 새벽안개가 낮게 깔려 있었습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이홍희는 졸리지 않았습니다. 취재 본능이 깨어나면 그녀는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 단계는 발로 뛰는 취재였습니다.
 
그녀는 아크로스타워를 직접 찾아갔습니다. 평일 오후 두 시였습니다. 로비에 들어서는 순간 그녀는 곧장 엘리베이터 안내판을 바라보았습니다. 18층부터 35층까지의 층 안내에는 수십 개의 기업 이름이 적혀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절반도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이름이 있어야 할 자리에 흰 종이가 붙어 있는 칸들이 여럿 눈에 띄었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27층에서 내렸습니다. 임대 계약이 체결되었다고 공시에 나온 한 스타트업의 사무실이 있어야 하는 층이었습니다. 복도를 걸었습니다. 조용했습니다. 너무 조용했습니다. 복도 양쪽으로 문들이 늘어서 있었는데, 이름표가 붙어 있는 문이 세 개밖에 없었습니다. 나머지는 불이 꺼져 있었고, 문 아래 틈새로 아무런 빛도 새어나오지 않았습니다.
 
해당 스타트업의 이름이 적힌 문 앞에서 그녀는 잠시 섰습니다.
 
문 너머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노크를 했습니다. 응답이 없었습니다. 다시 한 번 두드렸습니다. 그래도 없었습니다. 문손잡이를 살짝 당겨보니 잠겨 있었습니다.
 
이홍희는 천천히 뒷걸음질했습니다. 복도 창문 너머로 여의도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멀리 아크로스타워와 비슷한 높이의 빌딩들이 즐비했고, 그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텅 빈 사무실들. 이름만 있고 사람은 없는 기업들. 계약서는 있지만 실체는 없는 임차인들.
 
이것은 단순한 경기침체로 인한 공실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의도적으로 설계된 무언가였습니다.
 
이홍희는 핸드폰을 꺼내 복도의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노트를 꺼내 무언가를 적었습니다.
 
'아크로스타워 취재 시작. 이 건물은 속이 비어 있다.'
 
그 문장 옆에 날짜를 기록했습니다. 그날이 이 모든 사건의 공식적인 시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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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균열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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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의 첫 주, 서울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시작된 가랑비는 점심 무렵에는 제법 굵어졌고, 여의도 대로변의 가로수들은 잎을 모두 잃고 앙상한 가지만 남긴 채 빗속에 서 있었습니다. 도로에는 물웅덩이들이 생겨났고, 지나가는 차들이 그 위를 튀며 달렸습니다.
 
한길자산운용 사무실은 아크로스타워에서 두 블록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12층짜리 오피스빌딩의 8층 전체를 사용하는 공간으로, 약 50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회사는 크지 않았지만 여의도 금융가에서 나름의 입지를 쌓아온 곳이었습니다. 운용 자산 규모는 3000억 원이 넘었고, 주요 고객들은 개인 고액 투자자들이었습니다.
 
그날 오전, 김동혁의 책상 위에는 세 통의 이메일이 와 있었습니다.
 
모두 투자자들에게서 온 것이었습니다.
 
첫 번째는 퇴직 교사 출신의 60대 여성 투자자였습니다. 그녀는 아크로스타워 부동산 펀드에 1억 2000만 원을 투자한 분이었습니다. 이메일에는 최근 뉴스에서 아크로스타워 공실률이 높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우리 펀드는 괜찮은 거냐는 질문이 담겨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경기도에서 인테리어 업체를 운영하는 50대 남성이었습니다. 그는 사업 자금 일부를 펀드에 넣어두었는데, 얼마 전 만기 연장 통보를 받았다며 정확한 이유를 알고 싶다고 적었습니다.
 
세 번째 이메일은 달랐습니다. 보낸 사람이 개인이 아니라 법무법인의 이름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내용은 간결했습니다. '귀사가 판매한 아크로스타워 관련 부동산 펀드의 운용 과정에서 중대한 의무 위반 가능성이 확인되었으며, 이에 대한 법적 검토를 시작할 예정입니다.'
 
김동혁은 이메일 화면을 닫았습니다.
 
그는 창문 쪽으로 돌아섰습니다. 빗줄기가 유리창을 타고 내렸습니다. 빗방울들이 뭉쳤다가 흩어지고, 다시 뭉쳤다가 흩어지는 것을 바라보면서 그는 생각했습니다.
 
최병수의 폭로가 있은 지 2주가 지났습니다. 그 2주 동안 김동혁은 가능한 한 조용하게 자체 조사를 진행해 왔습니다. 미래랜드코퍼레이션 측에서 받은 공식 자료들을 다시 뜯어보고, 회사 내부의 실사 보고서를 재검토하며, 현장 방문 일정을 잡아 아크로스타워 빌딩 관리 업체와 접촉했습니다.
 
결론은 분명했습니다. 최병수의 말이 맞았습니다.
 
실제 공실률은 공시된 수치보다 훨씬 높았습니다. 임대 수입은 예상의 절반 수준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대출 만기 구조였습니다. 아크로스타워 개발을 위해 미래랜드코퍼레이션이 조달한 대출 중 상당 부분이 다음 해 2분기에 만기를 맞게 되어 있었습니다. 임대 수입이 정상적으로 들어온다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규모였지만, 지금처럼 수입이 반 토막 난 상황이라면 만기 연장이 안 되거나, 연장 조건이 악화되거나, 최악의 경우 디폴트 즉 채무불이행이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문제는 이 상황이 외부에 알려지면 어떻게 되느냐였습니다.
 
부동산 펀드 투자자들이 환매를 요구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러나 펀드에 묶인 자산은 유동성이 낮습니다. 건물은 당장 팔 수 없습니다. 환매 요청이 한꺼번에 몰리면 펀드는 지급 불능 상태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 순간 투자자들의 돈은 사실상 묶이게 됩니다.
 
김동혁은 눈을 감았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미래랜드코퍼레이션 측에 공식으로 문제를 제기하면 그들은 어떻게 반응할까요. 조용히 협의를 진행하면 사태를 수습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투자자들에게 먼저 알려야 할까요. 투자자들에게 알리는 순간 패닉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의 휴대전화가 울렸습니다.
 
발신자 이름을 확인한 김동혁의 얼굴이 굳었습니다. 미래랜드코퍼레이션의 대표이사 엄기철이었습니다.
 
"김 대표, 요즘 아크로스타워 관련해서 이것저것 알아보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는 날이 서 있었습니다.
 
"네, 정기적인 자체 점검입니다."
 
"물론이죠. 당연히 하셔야죠. 그런데 내일 한번 저희 쪽 임원들이랑 조찬 미팅 어떠세요? 현황에 대해 직접 설명드릴 게 있어서요."
 
미팅 제안은 정중했습니다. 하지만 김동혁은 알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제안이 아니라 경고였습니다.
 
그는 전화를 끊고 잠시 서 있었습니다.
 
그때 비서실 직원이 노크를 하고 들어왔습니다.
 
"대표님, 재경투데이라는 언론사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이홍희 기자라는 분인데, 아크로스타워 관련해서 코멘트를 부탁드린다고 하는데요."
 
김동혁은 고개를 들었습니다.
 
재경투데이. 그 이름은 그도 알고 있었습니다. 몇 년 전 저축은행 사태를 먼저 보도한 매체였습니다. 그리고 이홍희. 그 보도를 쓴 기자였습니다.
 
그는 잠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연락처 받아놔 주세요."
 
비서가 나간 뒤 그는 다시 창문 쪽을 바라보았습니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빗소리가 달리 들렸습니다. 무언가가 시작되는 소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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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보이지 않는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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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희는 다음 날 아침 여의도의 한 카페에서 김동혁을 처음 만났습니다.
 
만나기 전 그녀가 기대한 것은 단단히 닫힌 문이었습니다. 펀드 운용사 대표가 기자를 만난다는 것은 어지간해서는 일어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특히 자기 회사가 관련된 사안에 대해서는요. 그래서 연락처를 받아두었다는 비서의 말을 전달받았을 때, 이홍희는 약속이 잡힐 것이라고 반은 기대하고 반은 의심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오전 일찍 직접 전화가 왔습니다.
 
"이 기자님이죠? 저 한길자산운용 김동혁입니다. 오늘 아침 시간 있으세요?"
 
카페 창가 자리에 마주 앉은 두 사람은 처음 몇 분 동안 서로를 탐색했습니다. 이홍희는 상대방의 눈을 살폈습니다. 무언가를 감추려는 사람의 눈은 대개 너무 자주 깜빡이거나, 반대로 너무 고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김동혁의 눈은 달랐습니다. 피곤해 보였고 긴장해 있었지만, 무언가를 숨기는 눈이 아니었습니다.
 
김동혁은 이홍희를 살폈습니다. 언론사 기자들과 많이 만나봤습니다. 대개는 자기가 원하는 답변을 끌어내기 위해 질문을 구성합니다. 그런데 이 기자는 달랐습니다. 앉자마자 묻지 않았습니다. 커피잔을 들고 창밖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서류 봉투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이거 한번 보시겠어요?"
 
서류 봉투 안에는 이홍희가 정리한 내용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아크로스타워 임차인들의 법인등기부 조회 결과, 공시 보고서와 현장 조사 결과 간의 불일치, 빈 사무실들의 사진들.
 
김동혁은 서류를 훑어보았습니다. 그의 손가락이 몇몇 장을 넘기다 멈췄습니다.
 
그가 멈춘 곳은 법인등기부 목록이었습니다. 이홍희가 빨간 펜으로 표시해둔 부분들이 있었습니다. 같은 대표자 이름으로 등록된 세 개의 법인들. 서로 다른 이름이지만 주소가 동일한 회사들.
 
"이 법인들."
 
김동혁이 말했습니다.
 
"네."
 
"저도 봤습니다."
 
이홍희는 잠시 말을 멈췄습니다.
 
"그래서 지금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그걸 여쭤보려고 나오신 거 아닌가요?"
 
"아니요. 저는 이 구조가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를 추적하고 있습니다. 대표님은 이미 알고 있는 부분이 있으실 것 같아서요."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습니다.
 
김동혁은 커피잔을 내려놓았습니다.
 
"제가 가진 내부 자료를 드릴 수는 없습니다. 투자자들 보호 의무가 있고, 법적인 문제도 있고요. 하지만 이 기자님이 독자적으로 찾아낼 수 있는 부분들에 대해서는, 길 안내 정도는 해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홍희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충분합니다."
 
그날의 대화는 40분 동안 이어졌습니다. 내용의 대부분은 이홍희가 메모하지 않았습니다. 구체적인 수치나 문서명이 오가지 않았습니다. 김동혁은 직접 말하지 않았지만 방향을 가리켰고, 이홍희는 그 방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했습니다.
 
카페를 나올 때 이홍희는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은 무언가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혼자서는 풀 수 없는 상황에 있습니다.
 
그날 오후, 이홍희는 금융감독원 공시 시스템에 접속해 미래랜드코퍼레이션의 최근 5년치 사업보고서를 내려받았습니다. 보고서들을 나란히 펼쳐두고 연도별로 비교하기 시작했습니다.
 
첫 번째로 눈에 들어온 것은 매출액이었습니다.
 
건물이 완공된 첫 해에는 임대 수입이 예상에 가깝게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해부터 수치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수치 자체는 크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수입의 구성이 바뀌어 있었습니다. 장기 임대 계약에서 발생하는 수입의 비율이 줄고, '기타 수입'이라는 항목이 늘어나 있었습니다.
 
기타 수입. 그 항목의 세부 내용은 어디에도 명확히 나와 있지 않았습니다.
 
이홍희는 계속 파고들었습니다. 그러다 세 번째 해 사업보고서에서 흥미로운 각주를 발견했습니다. 단 두 줄이었지만, 그 두 줄이 전부를 바꾸는 열쇠였습니다.
 
"당사는 특수관계인이 대표로 있는 법인과의 임대차 계약에서 발생하는 수입을 매출로 인식하였음."
 
특수관계인. 즉 대표이사나 임원과 관계가 있는 사람이 운영하는 회사들이 임차인이었다는 말입니다. 회사 돈이 돌고 돌아 다시 회사 수입으로 잡히는 구조. 실제 외부 임차인이 내는 임대료가 아니라, 내부적으로 연결된 법인들이 계약서상으로만 돈을 주고받는 구조.
 
이것은 분식 회계의 전형적인 방식 중 하나였습니다.
 
이홍희는 흥분을 눌렀습니다. 흥분하면 판단이 흐려집니다. 아직 확증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가설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단서였습니다.
 
그녀가 책상 앞에서 정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순간, 전화가 왔습니다.
 
발신자 표시 없는 번호였습니다.
 
"이홍희 기자님이시죠?"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습니다.
 
"그렇습니다만, 누구시죠?"
 
"저는 최병수라고 합니다. 미래랜드코퍼레이션 재무팀에 있었습니다. 기자님이 아크로스타워를 조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연락드렸습니다. 기자님이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전화로는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이홍희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습니다.
 
"언제,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요?"
 
잠시 침묵이 흘렀습니다.
 
"내일 저녁 마포구 합정역 근처 편의점 앞으로 오세요. 7시에. 혼자 오셔야 합니다."
 
전화가 끊겼습니다.
 
이홍희는 수화기를 내려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달력을 확인했습니다. 내일은 금요일이었습니다.
 
그녀가 약속 장소로 나간 금요일 저녁, 최병수는 오지 않았습니다.
 
한 시간을 기다렸지만 그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다시 전화를 시도했지만 번호는 이미 없는 번호로 나왔습니다. 해당 번호는 선불 유심 카드로 개통한 일회용 번호였고, 이미 폐기된 상태였습니다.
 
이홍희는 찬바람이 불어오는 골목에서 한동안 서 있었습니다.
 
최병수는 왜 나타나지 않은 걸까요. 겁이 난 걸까요. 아니면 누군가에게 말을 들은 걸까요.
 
아니면, 더 나쁜 가능성.
 
그녀는 그 생각을 밀어냈습니다. 아직은 성급하게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부터 이홍희는 확신했습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부동산 사기가 아닙니다. 훨씬 더 깊은 곳에, 훨씬 더 넓은 무언가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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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내부에서 타오르는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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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수가 실종되었다는 소식이 확인된 것은 그로부터 사흘 뒤였습니다.
 
정확히는 실종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회사를 갑자기 그만뒀습니다. 사직서도 없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고, 그의 자리에 있던 컴퓨터는 완전히 초기화되어 있었습니다. 함께 근무했던 동료들에 따르면 전날까지도 평소처럼 야근을 했다고 했습니다.
 
이 소식은 김동혁에게 비공식적인 경로를 통해 전달되었습니다. 미래랜드코퍼레이션 내부에 그와 가끔 정보를 교환하던 실무자가 있었는데, 그 사람이 짧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최 팀장 잠적. 회사 측 보안팀 움직임 있음.'
 
김동혁은 그 문자를 오래 들여다보았습니다.
 
보안팀의 움직임. 그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내부 정보가 누설될 것을 우려한 대응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최병수가 자진해서 피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든 그의 사라짐은 사태가 이미 단순한 재무 문제를 넘어서고 있다는 신호였습니다.
 
김동혁은 그날 밤 법무팀과 긴급 회의를 열었습니다.
 
회의실은 어둑했습니다. 창밖에는 11월 밤의 찬바람이 불었고, 회의실 안에는 커피 냄새와 긴장감이 섞여 있었습니다. 회의 테이블 위에는 두꺼운 서류 뭉치가 쌓여 있었고, 형광등 아래에서 다섯 명의 얼굴이 피곤하고 무겁게 빛났습니다.
 
법무팀장 윤선호가 말했습니다.
 
"현재 상황에서 선택지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 미래랜드코퍼레이션과 사적으로 협의해 해결 방안을 모색합니다. 이 경우 외부 충격은 최소화되지만 협의 결과가 우리 투자자들에게 유리하게 될 가능성이 낮습니다. 둘째, 금융감독원에 공식 민원을 제출하고 외부 기관의 개입을 유도합니다. 이 경우 사태가 공론화되면서 환매 요청이 폭주할 수 있습니다. 셋째, 우리 쪽에서 먼저 투자자들에게 현황을 알리고 설명회를 엽니다. 가장 투명한 방식이지만 즉각적인 패닉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김동혁은 말없이 들었습니다.
 
세 가지 선택지 모두 불완전했습니다. 어느 것도 투자자들의 피해를 완전히 막을 수 없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방식이 그나마 피해를 줄이고, 사후에 법적 책임을 최소화하며, 투자자들에게 최대한 정직한 경로인가였습니다.
 
"기한이 얼마나 됩니까?"
 
그가 물었습니다.
 
"미래랜드 측의 주요 대출 만기가 내년 2분기입니다. 사실상 5개월에서 6개월 안에 결론이 나야 합니다. 그 안에 임대 수입이 정상화되지 않으면, 혹은 추가 자금 조달이 안 되면, 채무불이행이 현실화됩니다."
 
5개월.
 
김동혁은 창밖을 바라보았습니다. 여의도 빌딩들의 불빛이 안개 속에 흐릿하게 보였습니다.
 
회의가 끝난 뒤 그는 혼자 사무실에 남았습니다. 직원들이 하나둘 퇴근하고, 사무실은 점점 조용해졌습니다. 마지막 불이 꺼지고, 비상구 표시등의 초록 빛만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났습니다.
 
그는 자신의 책상에 앉아 투자자 명단을 열었습니다.
 
800억 원의 펀드에 참여한 총 312명의 투자자들이었습니다. 이름과 투자금액이 나란히 적혀 있었습니다. 적게는 3000만 원, 많게는 15억 원. 각각의 숫자 뒤에 사람이 있었습니다. 각각의 사람 뒤에 이유가 있었습니다. 노후 대비, 자녀 결혼 자금, 사업 준비금, 상속 받은 재산.
 
그는 명단을 보다가 한 이름 앞에서 멈췄습니다.
 
임정옥. 투자금 2억 원. 직업란에는 '무직'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는 기억났습니다. 2년 전 투자자 설명회에서 만났던 할머니였습니다. 혼자 오셨고, 돋보기를 끼고 투자 설명서를 꼼꼼하게 읽으셨습니다. 마지막에 조심스럽게 물으셨죠. "이 돈이 정말 안전한 건가요?" 그때 그는 확신에 차서 대답했습니다. "네, 선생님. 안전합니다."
 
그 말이 지금 그의 가슴 속에서 못처럼 박혀 있었습니다.
 
김동혁은 명단을 덮었습니다.
 
결정했습니다.
 
그는 다음 날 아침 회사로 나와 두 가지 일을 동시에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하나는 미래랜드코퍼레이션에 공식 서한을 보내 구체적인 재무 자료 제출을 요구하는 것. 또 하나는 이홍희 기자에게 연락하는 것이었습니다. 이홍희에게 넘길 수 있는 공개 자료의 범위를 법무팀과 검토하고, 그녀가 독자적인 취재를 통해 사실을 밝힐 수 있도록 간접 지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방법이 가장 정직한 경로라고 그는 판단했습니다.
 
물론 위험했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았습니다.
 
한편 이홍희는 그 시간 다른 방향으로 파고들고 있었습니다.
 
최병수가 사라진 사실을 다른 경로를 통해 확인한 이홍희는 즉각 두 가지 행동을 취했습니다. 하나는 미래랜드코퍼레이션의 전현직 직원들과의 접촉 시도였습니다. 또 하나는 해당 프로젝트 파이낸싱에 참여한 금융기관들의 공시 내역 전수 분석이었습니다.
 
첫 번째 시도에서 이홍희는 7명에게 연락을 취했습니다. 그 중 6명은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응답한 한 명은 "그 회사 얘기는 하고 싶지 않다"는 말만 남기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두 번째 작업에서 이홍희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아크로스타워 프로젝트 파이낸싱에 참여한 금융기관들의 공시를 들여다보다가, 한 제2금융권 저축은행이 해당 사업에 550억 원 규모의 대출을 실행한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이 저축은행의 최대 주주가 바로 미래랜드코퍼레이션의 대표이사 엄기철과 연결고리가 있는 자산관리 회사였습니다.
 
즉, 엄기철이 연결된 회사가 최대 주주인 저축은행이, 엄기철이 운영하는 미래랜드코퍼레이션에 550억 원을 대출해준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이해충돌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이 대출 결정이 적절한 심사 없이 이루어진 것이라면, 저축은행 측에서도 배임 혐의가 성립될 수 있었습니다.
 
이홍희는 손이 떨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번에는 흥분을 누르지 않았습니다. 이 정도라면 흥분해도 될 사안이었습니다.
 
그녀는 편집장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저 취재 건이 있는데, 긴급하게 지면 확보 부탁드립니다."
 
편집장은 잠시 침묵했습니다.
 
"어떤 건데?"
 
"아크로스타워입니다. 여의도 68층짜리요. 그 뒤에 뭔가 있습니다."
 
다시 침묵.
 
"이홍희 씨, 저번에 저축은행 때 기억하죠? 그때 얼마나 고생했는지."
 
"기억합니다. 그래서 이번엔 더 철저하게 준비할 겁니다."
 
전화 너머로 편집장의 한숨 소리가 들렸습니다.
 
"증거 가져와요. 문서로 된 거. 그거 없으면 내보낼 수 없어요."
 
"알겠습니다."
 
이홍희는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리고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았습니다.
 
증거.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명확한 증거였습니다. 그리고 그 증거를 만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이 하나 더 있어야 했습니다. 내부에서.
 
최병수가 사라진 지금, 누가 그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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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법원 복도의 긴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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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이 왔습니다.
 
서울의 겨울은 빠르게 차가워졌습니다. 바람이 한강에서 불어왔고, 여의도의 아스팔트 위로 마른 눈발이 날렸습니다. 아크로스타워의 유리 외벽에는 차가운 빛이 반사되었고, 건물 꼭대기의 항공 표시등이 낮은 구름 사이에서 빨갛게 깜빡였습니다.
 
사태는 조용하지만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미래랜드코퍼레이션은 김동혁의 공식 서한에 답하지 않았습니다. 열흘이 지나도록 답변이 없었습니다. 그 사이 아크로스타워의 임대 수입은 12월 들어 전월보다 더 떨어졌습니다. 추가 자금 조달을 위해 미래랜드코퍼레이션이 접촉했던 몇몇 금융기관들이 거절 의사를 전해온 것이 외부로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2월 셋째 주, 미래랜드코퍼레이션은 법원에 기업회생 신청을 검토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소문은 금융권에서 빠르게 퍼졌습니다. 아직 공식 발표가 없었지만, 업계에서는 이미 기정사실처럼 받아들이는 분위기였습니다. 한길자산운용에도 투자자들의 전화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루에 수십 통. 무슨 일이냐, 돈이 안전하냐, 지금 환매 신청을 해야 하느냐는 질문들이었습니다.
 
상담 직원들은 자리를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화장실도 제대로 못 가는 날이 이어졌습니다. 그들의 얼굴은 점점 지쳐갔고, 목소리는 쉬어갔습니다.
 
김동혁은 그들의 얼굴을 보면서 무언가가 조여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12월 21일 오후 3시, 결국 발표가 났습니다. 미래랜드코퍼레이션이 서울중앙지방법원에 기업회생 신청을 공식 접수했다는 뉴스 속보가 터졌습니다.
 
뉴스는 순식간에 퍼졌습니다.
 
포털 사이트 메인에는 관련 기사가 쏟아졌습니다. 방송사들은 긴급 자막을 내보냈습니다. '아크로스타워 운영사 법원에 회생 신청... 수천억 원 투자자 불안.' 텔레비전 화면 속에서 기자들이 아크로스타워 입구 앞에 서서 카메라를 향해 말하고 있었습니다. 건물을 배경으로 한 그 장면은 묘하게 아이러니했습니다. 빛나는 유리 건물 앞에서 무너지는 회사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날 밤 여의도에는 투자자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비공식 모임이었습니다. 누군가 인터넷 카페에 올린 글 하나가 시작이었습니다. '아크로스타워 펀드 투자자분들, 오늘 밤 한강공원 쪽으로 모입시다.' 저녁 7시 무렵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한강변에 모였습니다. 평균 연령이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패딩을 두껍게 입었고, 일부는 손에 서류를 들고 있었습니다. 얼굴에는 한기와 분노와 두려움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한 남성이 앞에 나섰습니다.
 
"저는 3억 원을 넣었습니다. 아이 대학 학자금이랑 제 은퇴 자금 전부였어요. 지금 이게 어떻게 되는 건지 아무도 설명을 안 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왜 이 꼴을 당해야 합니까?"
 
그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분명했습니다. 주위에서 누군가 울기 시작했습니다. 차가운 한강 바람이 불어왔고, 사람들은 더 가까이 모여들었습니다.
 
이홍희는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녀는 뒤편에 섰습니다. 취재용 수첩을 들었지만 바로 펼치지는 않았습니다. 그냥 바라보았습니다. 그 사람들을. 추운 밤에 한강변에 나와 서 있는 사람들을. 이들이 바로 아크로스타워 유리 외벽이 반사하지 않은 것들이었습니다. 화려한 빌딩 뒤에 숨겨진 진짜 이야기였습니다.
 
그녀는 뒤쪽 구석에서 눈에 익은 뒷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코트를 입은 남자. 손을 주머니에 깊이 찌르고 시선을 아래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김동혁이었습니다.
 
그도 왔던 것입니다.
 
이홍희는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습니다. 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가 왜 이 자리에 나왔는지 물어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습니다. 이 사람들의 얼굴을 직접 봐야 했던 것입니다.
 
그날 밤 이후, 이홍희의 취재에 결정적인 전환이 생겼습니다.
 
모임에서 한 여성이 그녀에게 다가왔습니다. 40대 중반의 여성이었고, 처음부터 눈에 띄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분노하거나 울지 않았습니다. 조용히 서서 모든 것을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이홍희 기자님이시죠?"
 
이홍희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저는 미래랜드코퍼레이션 회계팀에서 일했습니다. 최병수 팀장님 밑에서요."
 
이홍희는 가슴이 내려앉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름을 알 수 있을까요?"
 
"박수진입니다. 그리고 저한테 자료가 있습니다."
 
박수진은 핸드백 안쪽에서 작은 유에스비 드라이브를 꺼냈습니다.
 
"최 팀장님이 사라지기 전날 밤, 이메일로 저한테 보낸 겁니다. 만약 자기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이것을 믿을 수 있는 기자한테 전하라고 했습니다."
 
이홍희는 유에스비를 받아들었습니다. 손이 떨렸습니다.
 
"여기에 뭐가 들어 있나요?"
 
"직접 열어보시면 됩니다. 저는 보지 않았습니다. 보고 싶지 않았어요."
 
박수진은 더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습니다.
 
이홍희는 유에스비를 손 안에 꼭 쥐었습니다. 겨울 한강의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최병수가 남긴 것.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몰랐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이 사건의 전부를 바꿀 수도 있다는 예감이 들었습니다.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한강공원을 빠져나갔습니다. 뒤에서 투자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차갑고 슬프고 분노한 목소리들이 뒤섞여 허공으로 흩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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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진실이 준비하는 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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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에스비에 들어 있는 것은 파일 57개였습니다.
 
이홍희는 오피스텔로 돌아와 문을 잠갔습니다. 커튼을 내렸습니다. 컴퓨터를 켜고 유에스비를 꽂았습니다. 화면에 파일 목록이 떴을 때 그녀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습니다.
 
파일들은 크게 세 종류로 분류할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내부 엑셀 파일들이었습니다. 날짜별로 정리된 임대 수입 실적 데이터였습니다. 공시된 수치와는 다른 실제 수치들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파일 하나에는 '실내부용 2차수정' 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고, 또 하나에는 '보고용 최종'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두 파일의 수치는 같은 기간에 대한 것임에도 크게 달랐습니다.
 
두 번째는 이메일 캡처 파일들이었습니다. 미래랜드코퍼레이션 임원들 사이에 오간 내부 이메일들이었습니다. 그 중 하나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습니다. '공실률 수치 조정 필요. 투자자 심리 관리를 위해 대외 발표 수치는 현행 유지 방향으로. 내부 리포트는 별도 보관.' 보낸 사람의 이름 옆에는 '전략기획실장' 이라는 직함이 적혀 있었습니다.
 
세 번째는 한 건의 계약서 파일이었습니다. 미래랜드코퍼레이션과 이름 없는 자산관리 업체 사이의 컨설팅 계약서였습니다. 계약 금액은 총 45억 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컨설팅 업체의 주소와 대표자 이름이 이홍희가 이전에 조사했던 특수관계인 법인들 중 하나와 일치했습니다.
 
즉, 외부 컨설팅비 명목으로 45억 원이 내부인과 연결된 회사로 흘러들어간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분식 회계가 아니었습니다. 자금의 불법 유출 가능성이었습니다.
 
이홍희는 손을 들어 얼굴을 감쌌습니다. 몇 초 동안 그 자세로 있었습니다.
 
새벽 두 시였습니다.
 
그녀는 일어나 물을 한 잔 마셨습니다. 다시 앉아 파일 목록을 훑었습니다. 그리고 최병수라는 사람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이 자료들을 모아 두고, 언젠가 필요할 때를 대비해 박수진에게 맡겨둔 사람. 그가 어디에 있는지, 지금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안전하기를 바랐습니다. 진심으로.
 
다음 날 아침 이홍희는 증거 자료의 진위 검증에 들어갔습니다.
 
언론이 내부 제보 자료를 보도할 때는 반드시 독립적인 검증 과정이 필요합니다. 파일이 조작되지 않았는지, 내용이 실제 사실과 일치하는지, 문서의 출처가 신뢰할 수 있는지를 다각도로 확인해야 합니다.
 
이홍희는 대학 선배인 IT 보안 전문가에게 파일 메타데이터 분석을 부탁했습니다. 파일의 생성 날짜와 수정 날짜, 작성자 정보 등이 실제로 내부에서 만들어진 파일임을 뒷받침했습니다.
 
그리고 이메일 내용의 일부는 공시 자료와 교차 검증이 가능했습니다. 이메일에 언급된 특정 날짜의 특정 보고 내용이 해당 시기의 공시 내용과 어떻게 다른지를 비교하면, 거짓 보고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틀간의 검증 끝에 이홍희는 결론을 냈습니다. 이 자료는 실제입니다.
 
그녀는 편집장에게 전화했습니다.
 
"자료 있습니다. 문서로 된 증거 있습니다. 법적 검토는 제가 직접 법무팀에 요청하겠습니다. 언제 보도 가능합니까?"
 
편집장은 잠시 침묵했습니다.
 
"법원 회생 심사가 언제 시작되죠?"
 
"다음 달 초입니다."
 
"보도 타이밍을 잘 잡아야 해요. 심사가 시작되기 전에 나가야 실효성이 있어요."
 
"그 부분은 저도 동의합니다."
 
"이홍희 씨, 이번엔 확실하게 해야 해요. 광고주 압박이 또 들어오면 버틸 자신 있어요?"
 
이홍희는 잠시 멈췄습니다.
 
"없습니다. 버틸 자신은요. 하지만 안 쓸 자신도 없습니다."
 
편집장이 웃었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그가 원하는 답이었는지도 몰랐습니다.
 
한편 김동혁은 그 시간 다른 싸움을 치르고 있었습니다.
 
미래랜드코퍼레이션 측은 법원 회생 신청 이후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협의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너무 적극적으로 접근해 왔습니다. 엄기철 대표가 직접 연락을 해왔습니다. 만나자고 했습니다. 조용히 해결하자고 했습니다.
 
그 말의 의미를 김동혁은 이해했습니다. 언론에 알리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법원 심사에서 유리한 방향으로 우리 편을 들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대가로 투자자들에 대한 부분적인 보전을 약속하겠다는 암묵적 제안이었습니다.
 
김동혁은 그 제안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응할 수 없었습니다. 이 구조를 그대로 덮어버리는 순간, 진짜 책임자들은 빠져나가고 피해는 고스란히 투자자들에게 남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거절하는 순간 그는 적이 생겼습니다.
 
이틀 뒤, 한 경제 매체에 짧은 기사가 실렸습니다. 내용은 단 세 줄이었습니다. 한길자산운용이 아크로스타워 투자 실사를 부실하게 했으며, 투자자들에게 위험을 충분히 고지하지 않았다는 익명 제보를 입수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기사를 쓴 기자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제보자도 익명이었습니다. 그러나 기사가 나온 타이밍과 내용으로 볼 때, 누가 흘렸는지는 분명했습니다.
 
반격이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김동혁의 회사로 투자자들의 전화가 다시 폭주했습니다. 이번에는 분노 섞인 전화들이었습니다. 실사 부실이라는 말이 퍼지면서 한길자산운용에 대한 불신이 급격히 커졌습니다.
 
김동혁은 법무팀과 긴급 대응에 들어갔습니다. 동시에 이홍희에게 연락했습니다.
 
"이 기자님, 지금 저쪽에서 먼저 치고 들어왔습니다. 저한테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자료, 공식 루트로 드리겠습니다. 협조할게요."
 
이홍희는 전화를 받으며 창밖을 바라보았습니다.
 
서울 하늘에는 눈발이 날리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같은 방향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 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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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마지막 투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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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의 첫날, 새해가 밝았습니다.
 
그러나 아크로스타워 앞 광장은 축제의 분위기와 거리가 멀었습니다. 새벽부터 기자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고, 오전 9시가 되자 중계차까지 등장했습니다. 이날 오전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미래랜드코퍼레이션의 기업회생 첫 심사기일이 열리기 때문이었습니다.
 
법원 청사 앞에는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투자자들이었습니다. 70명 가까운 사람들이 추운 새벽 공기 속에 서 있었습니다. 일부는 피켓을 들었습니다. '내 돈 돌려줘라' '거짓 공시 책임져라.' 피켓 글씨가 거친 것은 그 분노가 거칠다는 뜻이었습니다. 카메라들이 그 글씨들을 담았습니다.
 
법원 복도는 길었습니다.
 
이홍희는 그 복도를 걸었습니다. 발소리가 대리석 바닥을 울렸습니다. 취재 기자 출입증을 목에 걸고, 가방에는 지난 두 달간 정리한 자료 파일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재경투데이는 이날 오전 8시를 기해 온라인판 기사를 먼저 게재했습니다.
 
제목은 이랬습니다.
 
'아크로스타워 공실률 조작 의혹, 내부 문서로 확인... 특수관계인 통한 수십억 원 자금 유출 정황'
 
기사는 모든 수치를 문서로 뒷받침했습니다. 실제 임대 수입과 공시 수치의 차이, 내부 이메일 속 수치 조정 지시, 45억 원 컨설팅 계약의 특수관계인 연관성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홍희의 이름이 기자로 표시된 그 기사는 게재 한 시간 만에 포털 사이트 경제 면 상위에 올라갔습니다.
 
법원 복도 안쪽의 대기실에는 미래랜드코퍼레이션 측 법무팀이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얼굴은 굳어 있었습니다.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사람, 귓속말로 통화하는 사람, 서류를 빠르게 넘기는 사람들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기사가 나간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 기사가 오늘 법원 심사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요.
 
김동혁은 법원 청사 밖에 서 있었습니다.
 
그는 오늘 법원 내부로 들어가지 않을 예정이었습니다. 한길자산운용은 이번 회생 심사의 직접적인 당사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 자리를 떠날 수도 없었습니다.
 
겨울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그는 코트 깃을 세우며 주위를 바라보았습니다. 투자자들의 피켓, 카메라들, 기자들의 마이크. 그리고 건물 너머로 보이는 아크로스타워의 유리 외벽. 오늘 아침에도 그 건물은 빛나고 있었습니다. 차가운 1월 햇빛을 반사하며.
 
그 순간 누군가가 그의 팔을 잡았습니다.
 
돌아보니 낯선 할머니였습니다.
 
60대 후반으로 보였고, 두꺼운 검정 코트를 입고 있었습니다.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고, 입술이 차가운 바람에 메말라 있었습니다.
 
"혹시 한길자산운용 대표님 아니세요?"
 
김동혁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저 임정옥이라고 합니다. 두 해 전에 설명회에서 뵌 적 있어요."
 
김동혁은 그 이름을 기억했습니다. 투자자 명단에서 본 이름이었습니다. 2억 원을 투자하신 분. 그리고 그날 설명회에서 조심스럽게 물으셨던 분. 이 돈이 정말 안전한 건가요.
 
"저한테 화 많이 나시죠?"
 
그가 말했습니다.
 
임정옥 할머니는 잠시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화요? 화는 많이 났어요. 요 몇 달 잠도 못 잤어요. 근데, 오늘 아침에 기사 읽었어요. 재경투데이 기사."
 
"..."
 
"기사 읽으면서 알았어요. 이 사람도 속았구나. 나쁜 사람인 줄 알았는데, 같이 당한 사람이었구나."
 
김동혁은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내 돈이 다 어떻게 될지는 몰라요. 근데 오늘 여기 온 건 돈 때문만은 아니에요. 이게 어떻게 되는지 직접 봐야 할 것 같아서요. 끝을 봐야 할 것 같아서요."
 
그 말이 끝나고 법원 입구에서 직원이 문을 열었습니다. 관계자들이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임정옥 할머니도 그 흐름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김동혁은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법원 안에서는 그날 오전부터 심사가 진행되었습니다.
 
이홍희의 기사는 심사 과정에서 하나의 변수가 되었습니다. 법원은 보도된 내부 문건의 진위 여부 확인을 위해 미래랜드코퍼레이션 측에 추가 자료 제출을 요구했습니다. 미래랜드 측은 즉답을 회피했고, 법원은 결정을 2주 유보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이홍희의 기사가 나간 지 삼 일 후, 금융감독원이 미래랜드코퍼레이션에 대한 자체 조사에 착수한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후에는 검찰도 관련 수사를 검토 중이라는 소식이 나왔습니다.
 
각 수사 기관의 움직임이 겹쳐지면서 미래랜드코퍼레이션 내부에서 이탈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실무 직원들이 조사에 협조하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추가적인 사실들이 확인되었습니다.
 
특수관계인 법인을 통한 자금 유출은 이홍희가 파악한 45억 원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수년에 걸쳐 다수의 채널을 통해 빠져나간 자금이 총 280억 원을 넘는다는 사실이 수사 기관에 의해 파악되었습니다. 엄기철 대표의 자택 압수수색이 이루어졌고, 전략기획실장이 자진 출두했습니다.
 
최병수의 소재도 파악되었습니다.
 
그는 제주도에 있었습니다. 혼자서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검찰의 연락을 받은 그는 즉시 상경해 자진 조사에 응했습니다. 박수진에게 유에스비를 넘기고, 이홍희에게 연락하도록 한 것도 모두 그의 계획이었습니다. 직접 나서기가 두려웠고, 증거가 없어질까 봐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중간 경로를 선택했던 것이었습니다.
 
2월 말, 법원은 미래랜드코퍼레이션의 기업회생 신청을 기각했습니다.
 
회사가 제출한 회생 계획안이 채권자들을 충분히 보호하지 못한다는 판단이었습니다. 동시에 분식 회계 및 자금 유출에 대한 형사 절차가 병행 진행되기로 결정되었습니다.
 
이홍희는 그날 저녁 혼자 오피스텔에서 뉴스를 봤습니다.
 
방송에서는 법원 앞 장면이 나왔습니다. 투자자들이 결과를 기다리다가 기각 소식을 들으면서 탄식하는 모습이 담겼습니다. 일부는 울었고, 일부는 그저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그 표정들이 단순히 돈을 잃은 것 이상의 무언가를 잃은 사람들의 표정이었습니다.
 
신뢰를 잃은 표정이었습니다.
 
이홍희는 텔레비전을 끄고 창문을 열었습니다. 찬 공기가 들어왔습니다. 서울의 밤 하늘에는 별이 없었습니다.
 
그녀는 생각했습니다. 이 사건을 취재하면서 가장 많이 마주쳤던 감정이 무엇이었는지를요. 분노도 아니었고, 흥분도 아니었습니다. 슬픔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서로를 믿기 위해 만든 시스템이, 그 시스템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들에 의해 내부에서부터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는 슬픔이었습니다.
 
투자라는 행위의 본질은 신뢰입니다. 나는 이 사람을 믿는다. 이 회사를 믿는다. 이 숫자들이 진실이라고 믿는다. 그 신뢰 위에 수천만 원, 수억 원이 올려집니다. 그 신뢰가 깨졌을 때, 무너지는 것은 돈만이 아닙니다.
 
한편 김동혁은 회생 기각 결정이 나던 날, 회사 전 직원을 모아 긴급 설명회를 열었습니다.
 
그는 지난 몇 달간의 경과를 솔직하게 설명했습니다. 최병수로부터 처음 문제를 인지한 순간부터 법무팀 대응, 이홍희 기자와의 간접 협조, 그리고 미래랜드코퍼레이션 측의 반격과 그 이후의 과정까지. 아무것도 숨기지 않았습니다.
 
직원들은 조용히 들었습니다. 일부는 고개를 떨궜습니다. 일부는 입술을 꾹 다물었습니다.
 
설명이 끝나고 김동혁이 마지막으로 말했습니다.
 
"제가 3년 전에 이 투자 구조를 더 엄격하게 검증했더라면 결과가 달랐을 수도 있습니다. 실사 과정에서 우리가 놓친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 부분에 대한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투자자들에게 가능한 한 최선의 결과가 돌아갈 수 있도록, 남은 과정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잠시 멈췄습니다.
 
"우리가 이 일을 덮지 않았다는 것. 비록 늦었지만 진실이 밝혀지는 방향으로 움직였다는 것. 그것만은 지켜냈습니다."
 
그 말이 끝나고 회의실은 조용했습니다.
 
투자자들의 피해는 컸습니다. 800억 원 규모의 펀드 중 상당 부분이 회수되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법원의 자산 환가 절차가 시작되었지만, 부동산 시장 침체 속에서 아크로스타워의 실제 매각 가치가 얼마나 될지는 불투명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해졌습니다.
 
조작된 숫자들이 세상에 드러났습니다.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책임지는 절차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과정이 투자자들에게 돈을 온전히 돌려주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밝혀진 것이었습니다.
 
임정옥 할머니는 판결 이후 한 번 더 한길자산운용을 찾아왔습니다.
 
김동혁의 사무실 문 앞에 서서 짧게 말했습니다.
 
"끝은 봤어요. 고마워요."
 
그리고 돌아섰습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김동혁은 창문을 향해 돌아섰습니다.
 
밖에는 3월의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겨울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아직 차가웠지만, 분명히 빛은 달라져 있었습니다.
 
아크로스타워는 여전히 서 있었습니다. 68층, 유리와 강철. 도시의 스카이라인 위로 우뚝 솟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건물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달라져 있었습니다. 화려한 외관 뒤에 무엇이 있는지를 한 번쯤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었습니다. 반짝이는 유리가 반드시 진실을 반사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이홍희는 이 사건에 대한 마지막 기사를 썼습니다.
 
기사의 마지막 문장은 이것이었습니다.
 
아크로스타워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건물은 지금도 서 있습니다. 무너진 것은 건물이 아니라 그 건물을 둘러싸고 있던 신뢰였습니다. 그리고 신뢰가 무너진 자리에는 건물보다 더 오래, 더 많은 것들이 남습니다.
 
그 기사를 쓰고 그녀는 컴퓨터를 껐습니다.
 
오피스텔 창밖으로 봄의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한강은 여전히 흘렀습니다. 서울은 여전히 분주했습니다.
 
그러나 어딘가가 조용히, 그리고 깊게 달라져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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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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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크로스타워는 그해 여름 법원 주관의 공개 매각 절차를 밟았습니다.
 
최종 낙찰 가격은 당초 감정 평가액보다 낮았습니다. 투자자들에게 돌아간 금액은 원금의 40퍼센트를 조금 넘는 수준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손실을 입었습니다. 그 손실은 숫자로 환산되었지만, 실제로는 삶의 일부였습니다.
 
엄기철 대표와 전략기획실장은 자본시장법 위반 및 업무상 배임 혐의로 기소되었습니다. 재판은 이듬해까지 이어졌습니다.
 
최병수는 수사 과정에서 핵심 증인으로 협조했습니다. 그의 증언은 검찰 공소장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습니다. 그가 위험을 무릅쓰고 박수진에게 유에스비를 남기지 않았다면, 이 사건은 훨씬 더 늦게, 혹은 결코 밝혀지지 않았을 수도 있었습니다.
 
이홍희는 이 사건 보도로 당해 한국경제언론대상 조사보도 부문을 수상했습니다. 시상식 단상에서 그녀는 짧게 말했습니다. "이 상은 용기를 낸 제보자들의 것입니다."
 
김동혁은 한길자산운용의 대표직을 내려놓았습니다. 회사는 투자자들에 대한 일부 민사 책임을 인정하고 배상 절차를 밟았습니다. 그는 이후 1년간 공개적인 활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 봄, 그의 이름으로 한 권의 책이 출판되었습니다.
 
제목은 간단했습니다. '우리가 믿은 것들에 대하여.'
 
그 책의 서문 마지막 문장은 이것이었습니다.
 
"숫자는 거짓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숫자가 남긴 상처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 상처를 기억하는 것이, 다음 번 신뢰를 조금이라도 더 올바르게 쌓는 시작일 것입니다."
 
아크로스타워는 새로운 소유자를 맞이했습니다.
 
건물은 리모델링 공사를 마치고 다시 사람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엘리베이터는 오늘도 조용히 오르내립니다. 유리 외벽은 변함없이 도시의 빛을 반사합니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여전히 이 건물을 올려다보고 있을 것입니다.
 
그 시선이 전과 다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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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완전한 창작물입니다.
등장하는 인물, 기업, 건물, 사건은 모두 가상이며,
실존하는 어떠한 기업이나 인물, 사건과도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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