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내려앉은 해원시, 돌판사라 불리던 김학수의 저울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누구보다 엄격하고 청렴했던 판사가 아내의 병과 빚더미 앞에서 무너져 내리는 순간, 법정은 더 이상 정의의 공간이 아닌 거래의 무대가 됩니다. 한 통의 문자, 단 열여섯 글자가 그의 세계를 뒤흔들고, 기자 홍미희의 집요한 취재는 법원 깊숙한 곳의 균열을 드러냅니다. 판결은 언제부터 거래가 되었는가. 이 질문은 당신을 끝까지 붙잡고 놓아주지 않을 것입니다.

제1장. 돌판사
해원시에는 가을이 유독 늦게 찾아옵니다.
남해안 특유의 습한 기운이 도시를 감싸고, 항구에서 올라오는 비릿한 바람이 법원 건물 앞에 심어진 느티나무 가지를 흔들 때, 그제야 사람들은 계절이 바뀌었다는 걸 깨닫습니다. 해원고등법원은 시내 중심부에서 조금 벗어난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오래된 석조 건물은 수십 년의 세월을 머금은 채 묵직하게 서 있었고, 그 위압감은 단순히 크기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건물을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 조심스럽게 낮춰진 목소리들, 그리고 복도에 흐르는 알 수 없는 긴장감이 공기를 채웠습니다.
1층 복도는 언제나 희미하게 소독약 냄새가 났습니다. 공청사 특유의 냄새였습니다. 형광등 아래 대리석 바닥은 오래 닦여서 빛을 잃은 채 칙칙하게 빛났습니다. 방청객들이 법정 문 앞에서 기다리다 내뱉는 낮은 숨소리, 변호사가 의뢰인에게 속삭이는 소리, 서기가 서류 더미를 안고 종종걸음 치는 발소리. 그 모든 것이 한 건물 안에 층층이 쌓여 있었습니다.
김학수 부장판사가 법원에 출근하는 시간은 매일 오전 여덟 시 이십 분이었습니다.
이십 년째 바뀐 적이 없는 습관이었습니다. 그는 지하 주차장이 아닌 정문 앞 인도에서 걸어 들어오는 것을 고집했습니다. 이유를 묻는 후배 판사에게 그는 단 한 마디만 했습니다. 법원 앞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의 얼굴을 봐야 한다고. 피고인의 가족, 피해자, 증인, 변호사, 검사. 그 모든 사람들이 이 건물 앞에서 무엇을 기다리는지 판사는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후배 판사는 그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나중에 사석에서 동기에게 털어놓았습니다. 솔직히 처음에는 그 말이 뭔가 좀 거창하게 들렸다고. 그런데 몇 달 지나고 나서야 알았다고. 김 부장이 그렇게 걸으면서 실제로 사람들을 보고 있다는 걸. 공판 당일 방청석에서 흔들리는 얼굴 하나를 기억해두고, 판결문에 반드시 그 사람을 위한 설명을 넣는다는 걸.
그게 김학수였습니다.
해원 지역 법조계에서 그의 이름은 두 가지 의미로 통했습니다.
하나는 존경이었고, 다른 하나는 두려움이었습니다. 서울대 법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사법연수원을 역시 수석으로 마친 그는, 누가 봐도 중앙 법원으로 올라갈 사람이었습니다. 실제로 서울 고등법원 발령이 두 번이나 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두 번 모두 거절했습니다. 이유는 아내였습니다. 류마티스 관절염에서 시작된 아내의 병은 십 년 사이에 전신으로 번졌고, 해원 시내 대학병원 류마티스내과 담당 교수와의 신뢰를 무너뜨릴 수 없다고 했습니다. 동료들은 그 말을 믿었습니다. 적어도 처음 몇 년간은.
두 번째 발령을 거절했을 때, 인사위원회에서 그를 만났던 선배 판사가 나중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학수 씨는 자기 자신에게 너무 엄격해. 그게 장점이기도 하고, 언젠가는 위험이 될 수도 있어. 그 선배는 이미 서울 고법 수석부장판사까지 올라간 뒤였습니다. 그 말의 의미를 김학수는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돌판사. 그게 그의 별명이었습니다.
법조 브로커들 사이에서 가장 먼저 생겨난 말이었지만, 어느새 지역 언론에도 오르내렸습니다. 판결에 흔들림이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한 번은 해원 지역 굴지의 건설사 대표가 연루된 횡령 사건에서, 변호인이 양형 자료라며 두툼한 봉투를 재판부 서기를 통해 우회 전달하려는 정황이 포착됐습니다. 그 서기는 즉시 해고됐고, 건설사 대표는 구형보다 두 해 더 무거운 선고를 받았습니다. 법원 내에서는 그 이야기가 전설처럼 내려왔습니다.
또 한 번은 지역 시의원이 음주운전 뺑소니 사건으로 기소됐을 때였습니다. 그 시의원의 보좌관이 법원 주변 식당에서 재판부 행정직원과 만나는 장면이 포착됐습니다. 식사 자리였는데, 식사 값을 누가 냈는지가 문제가 됐습니다. 행정직원은 자비로 냈다고 했습니다. 카드 내역을 확인하니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김학수는 그 직원에게 사건과 관련된 어떤 외부인과도 사적 접촉을 하지 말라는 내부 지침을 경고로 주었습니다. 시의원은 집행유예 없는 실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 판결이 나가고 나서 법원 주변 브로커들 사이에서 김학수의 별명이 굳어졌습니다.
그러나 올해의 김학수는 달랐습니다.
표면상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같은 시각에 출근하고, 같은 자리에 앉아 판결문을 검토하고, 법정에서 같은 무표정으로 심리를 진행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서랍 안쪽 깊은 곳에는 작은 수첩이 있었습니다. 빼곡한 숫자들로 채워진 수첩. 병원비 명세서를 베껴 적은 것과, 사채 업자에게 갚아야 할 원금과 이자가 날짜별로 정리된 것이었습니다.
수첩의 첫 장은 팔 개월 전에 시작됐습니다. 글씨는 처음에는 반듯했지만 갈수록 작아지고 빽빽해졌습니다. 숫자를 적으면 적을수록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크기가 더 잘 보이게 됐습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수첩을 꺼내 보는 것 자체가 두려웠습니다. 그런데도 매일 밤 꺼냈습니다.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이었습니다.
아내 이정숙의 치료비는 월 사백오십만 원을 넘었습니다.
새로 도입된 생물학적 제제 주사는 건강보험 적용이 되지 않았습니다. 한 번에 백이십만 원짜리 주사를 한 달에 세 번 맞아야 했습니다. 거기에 입원비, 검사비, 기타 처방약값을 더하면 판사 월급으로는 어림도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적금을 깼습니다. 그다음은 보험을 해약했습니다. 딸아이 학자금으로 모아두던 돈도 썼습니다. 딸은 이미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아직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어떤 상태인지를.
그리고 어느 날 밤, 그는 법원 근처 골목 안쪽에 간판도 없는 대부업체 문을 열었습니다.
그 문을 열던 날을 그는 아직도 기억했습니다.
초록색 불빛이 깜박이는 형광등 아래, 오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아무 말 없이 계약서를 내밀었습니다. 이자율은 연 이십사 퍼센트. 합법의 경계에 딱 걸쳐 있었습니다. 서명하는 손이 떨렸는지 아닌지, 그 기억만큼은 흐릿했습니다. 분명한 건 그 남자가 계약서를 받아 들면서 딱 한 번 그의 얼굴을 올려다봤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침묵이 그날 밤 내내 귓속에 남았습니다.
그로부터 열네 달이 지났습니다.
원금은 줄지 않았고, 이자는 복리처럼 불어났습니다. 담당 직원이 바뀌면서 업체의 분위기도 달라졌습니다. 전화는 업무 시간 외에도 걸려왔습니다. 어떤 날은 법원 주차장 앞에 낯선 차가 세워져 있기도 했습니다. 검은색 중형 세단이었는데, 번호판이 임시 번호판이었습니다.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면서 존재 자체로 압박을 가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 차를 볼 때마다 김학수는 외면했습니다. 그러나 외면하는 것 자체가 이미 그들이 원하는 반응이라는 걸, 그는 알면서도 다른 선택을 하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밤에는 자정이 넘어서 전화가 왔습니다.
아내가 혹시 받을까봐 방에서 나와 부엌에서 받았습니다. 목소리는 젊은 남자였습니다. 용건은 간단했습니다. 다음 달 이자가 늦어지면 원금 전액을 즉시 상환 요구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끊었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그는 부엌 싱크대 앞에 서서 한 동안 물을 틀었습니다. 물소리가 나야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해 늦가을, 해원시 재개발 사업과 관련된 건설사 비리 사건이 해원고등법원 형사합의부에 배당됩니다.
사건 번호는 이십이년 형합 삼백십칠호였습니다. 피고인은 해원 최대 건설그룹 산하 시행사 대표 임태오, 그리고 시 도시계획과 출신 전직 공무원 두 명이었습니다. 공소사실은 뇌물공여, 배임, 건축법 위반이었습니다. 검찰이 구형한 징역은 합계 이십삼 년이었습니다.
사건이 배당됐다는 통보를 받은 건 오후 세 시였습니다.
법원 행정처에서 내려온 배당 결과 공문이었습니다. 서기가 결재를 받으러 왔을 때, 김학수는 공문을 받아 들고 서명했습니다. 손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이십 년 동안 배당 공문을 받아온 손이었습니다. 그런데 서기가 나간 뒤 혼자 남은 집무실에서, 그는 사건 번호 옆에 적힌 피고인 이름을 천천히 읽었습니다. 임태오. 해원개발. 재개발 비리. 그 세 단어가 연결되는 순간, 뒤통수에 서늘한 것이 흘렀습니다.
이 사건은 지역에서 큰 관심을 받고 있었습니다.
검찰이 임태오를 구속 기소할 때 기자회견을 열었고, 지역 신문 일면에 나흘 연속 기사가 실렸습니다. 재개발 구역 주민들은 비공식 모임을 만들어서 사건 진행 상황을 추적하고 있었습니다. 변호인 선임 소식도 이미 알려져 있었습니다. 법무법인 해동, 강현우 변호사. 이 이름 역시 지역 법조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사건이 배당된 날 저녁, 김학수는 오랫동안 창밖을 바라보았습니다.
해원항의 불빛이 검은 수면 위에 길게 늘어졌습니다. 그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습니다. 술도 마시지 않았습니다. 그냥 앉아 있었습니다. 아내가 병실에서 보내온 문자 메시지 하나가 화면에 떠 있었습니다. 오늘 많이 아팠어. 그래도 당신 생각하면 괜찮아. 잘 자요.
그는 그 문자를 오래 들여다봤습니다.
이정숙과는 대학교 이학년 때 만났습니다. 법학과 도서관에서 그녀가 빌려간 민사소송법 책이 그에게도 필요했고, 대출 기록을 보고 찾아간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사흘 뒤에 같은 자리에서 각자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다음 주에도. 그다음 주에도. 그게 그들의 연애였습니다. 조용하고 느리고, 별다른 드라마 없이 자연스럽게 이어진. 결혼 십사 년, 아내가 처음 손목 통증을 호소한 게 그 중 십일 년이 지났을 때였습니다. 처음에는 단순 관절염인 줄 알았습니다.
아무도 그게 이렇게 깊어질 줄 몰랐습니다.
그는 수첩을 꺼냈습니다. 이번 달 갚아야 할 금액에 밑줄을 그었습니다. 숫자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새로 배당된 사건 번호를 천장을 향해 중얼거렸습니다.
이십이년 형합 삼백십칠호.
아무도 없는 집 안에 그 숫자만 울렸습니다.
다음 날 아침, 그의 휴대폰으로 모르는 번호의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그 번호는 수신 차단 목록에 없었습니다. 해외 번호 형식도 아니었습니다. 어딘가 국내 번호인데 등록된 곳이 없었습니다. 내용은 단 열여섯 글자였습니다.
'사건 잘 부탁드립니다. 아내분 치료비 걱정 마십시오.'
그는 삼십 초 동안 그 문자를 바라봤습니다.
뇌가 먼저 반응했습니다. 이것은 증거입니다. 스크린샷을 찍고, 법원 감찰위원회에 신고하고, 해당 번호 추적을 의뢰하는 것이 절차입니다. 이십 년의 판사 경력이 자동으로 만들어낸 반응이었습니다. 몸이 그 반응을 따르려 했습니다.
그런데 손가락이 멈췄습니다.
아내분 치료비 걱정 마십시오.
이 문장이 문제였습니다. 협박이 아니었습니다. 협박이었다면 오히려 쉬웠습니다. 무시하거나, 신고하거나. 그런데 이 문장은 다른 언어를 쓰고 있었습니다. 제안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제안 속에 들어 있는 것은, 지난 열네 달 동안 그를 새벽마다 깨운 바로 그 숫자들이었습니다.
그는 문자를 지웠습니다.
하지만 그 열여섯 글자는 이미 그의 뇌에 새겨진 뒤였습니다.
그날 밤, 그는 처음으로 퇴근 후에 아내의 병실에 가지 않았습니다. 평소라면 저녁 여섯 시에 병실로 가서 한 시간쯤 있다 왔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법원 집무실 의자에 앉아 창밖이 어두워지는 것을 바라봤습니다. 저녁 여덟 시가 지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병원에 가는 방향이 아니라 집으로 향하면서, 그는 자신이 지금 무언가로부터 달아나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무엇으로부터인지는 분명했습니다.
아내의 얼굴. 그 눈빛 앞에서 자신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가 들킬 것 같았습니다.
제2장. 취재 파일
홍미희가 해원시로 내려온 건 이 년 전이었습니다.
한국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전국 일간지 사회부 기자로 십이 년을 일했습니다. 서울 시내 특수부 검사와 법조 브로커 간의 뒷거래를 폭로하는 탐사보도 기사를 쓴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기사는 나갔고, 반향은 컸으며, 그 다음 주에 그녀는 편집국장실에 불려갔습니다.
그 전날 밤, 그녀는 자신의 책상 서랍 안을 정리했습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습니다. 그냥 그렇게 했습니다. 인사 조치가 있을 거라는 예감은 있었습니다. 편집국 내부의 분위기가 기사 나간 다음 날부터 달라졌습니다. 선배 기자들이 눈을 피했습니다. 부국장이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 아무 말 없이 지나쳤습니다. 그 침묵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녀는 십이 년 경력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편집국장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책상 위에 서류 한 장을 밀어놨습니다. 인사 발령 통지서였습니다. 해원지국 사회부 기자. 그녀는 웃었습니다. 본인조차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습니다. 도망치거나 무너지는 대신, 그 서류를 들고 편집국장실 문을 나서면서 오히려 명확해졌습니다. 중앙 언론은 처음부터 그런 기사를 원하지 않았다는 것을.
다만 한 가지는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녀는 발령 통지서를 가지고 인사국으로 가는 대신 편집국 바닥에서 제일 오래된 선배, 이십삼 년 차 데스크 기자 박관호를 찾아갔습니다. 그는 사회부 데스크였지만 실질적으로 사내에서 누가 무슨 압력을 받는지 다 아는 인물이었습니다. 그에게 직접 물었습니다. 위에서 내려온 거냐고. 박관호는 담배를 피우러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낮게 말했습니다. 기사 나가기 전날 밤부터 법무팀 전화가 왔다고. 그것만으로 충분했습니다.
해원지국은 건물 삼층, 화장실 옆 공간에 있었습니다.
기자는 그녀 포함 셋이었고, 지국장은 정년을 삼 년 앞둔 최모 부장이었습니다. 최 부장은 세상을 바꾸는 기사 같은 것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시의회 브리핑을 받아쓰고, 축제 일정을 알리고, 지역 유지의 부고를 실었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했습니다. 홍미희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머지 두 기자는 이십대였습니다. 한 명은 막 수습을 마친 남자 기자였고, 다른 한 명은 경력 삼 년 차 여자 기자였습니다. 두 사람 모두 홍미희를 어색하게 대했습니다. 서울 본사에서 뭔가 문제가 생겨서 내려온 사람이라는 소문이 이미 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홍미희는 그 어색함을 굳이 풀려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혼자 취재 파일을 만들었습니다.
해원시 재개발 구역은 시내 북쪽 항구 인근 이천오백 세대 규모 주거 지역이었습니다. 오래된 다세대 주택과 영세 상가들이 밀집한 그 지역은, 십 년 전부터 재개발 얘기가 나왔다가 번번이 무산됐습니다. 그런데 이 년 전부터 갑자기 사업이 속도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해원개발이라는 시행사가 사업자로 선정됐고, 불과 여섯 달 만에 도시계획 변경 허가가 났습니다. 통상 이 년에서 삼 년이 걸리는 절차였습니다.
홍미희는 그 여섯 달에 주목했습니다.
그녀는 처음에 직접 재개발 구역을 걸어다녔습니다. 지도를 들고 골목을 돌았습니다. 거기서 살고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이십 년 넘게 그 골목에 살았다는 칠십대 할머니가 말했습니다. 갑자기 집을 비워달라는 통보를 받았을 때, 구청에 물어봤더니 이미 허가가 났다고 했다고. 언제 허가 난 거냐고 물어봤더니 아무도 정확하게 알려주지 않았다고.
정보공개청구로 받아낸 회의록에는 의결 내용만 있었고, 실제 논의 과정은 지워져 있었습니다. 도시계획 변경 심의위원 명단을 보니 외부 전문가 다섯 명 중 셋이 해원개발과 자문 계약을 맺고 있었습니다. 이해충돌 회피 서약서는 제출됐지만 내용은 열람 불가였습니다. 형식은 다 갖췄는데 내용이 없었습니다.
두 번째 정보공개청구에서는 애초에 공개 거부 통보를 받았습니다. 사유는 개인정보 보호 및 행정 내부 의사결정 과정 보호였습니다. 홍미희는 거부 처분에 대해 행정심판을 청구했습니다. 그 절차에만 두 달이 걸렸습니다. 결과는 일부 공개였습니다. 받아낸 것은 그마저도 절반 이상이 검게 지워진 서류들이었습니다.
그녀의 취재 노트 첫 장에는 한 가지 질문만 적혀 있었습니다.
누가, 언제, 얼마에.
그해 여름, 검찰이 해원개발 대표 임태오를 구속 기소하면서 사건은 수면 위로 올라왔습니다. 하지만 홍미희의 의심은 기소 사실보다 훨씬 깊은 곳을 향해 있었습니다. 검찰이 잡은 건 시행사 대표와 공무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규모의 비리가 그 선에서 끝났을 리 없다고, 그녀는 판단했습니다.
한 가지 단서가 있었습니다.
재개발 인허가 과정에서 해원개발 측이 법원에 낸 가처분 신청이 기이한 속도로 기각됐다는 것이었습니다. 반대편 주민들이 낸 개발 금지 가처분이었는데, 통상 수개월 걸리는 심리가 삼 주 만에 끝났습니다. 결정문을 분석하니 법리가 허술했습니다. 증거 채택 기준도 일반 기준에 비해 눈에 띄게 완화돼 있었습니다.
결정문을 분석한 건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홍미희는 서울에서 알고 지내던 법학 교수에게 익명으로 결정문 사본을 보내 의견을 물었습니다. 교수는 사흘 뒤 전화를 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느 판사 결정문이냐고는 묻지 않겠지만, 이 결정이 법원 내부에서 이의 없이 통과됐다면 그건 해당 법원 문화가 특이한 거라고. 일반 민사 결정에서도 이 정도 허술한 근거는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담당 판사 이름을 확인한 순간, 그녀의 손이 멈췄습니다.
김학수.
해원 법조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이름이었습니다. 그 이름과 허술한 결정문이 함께 있다는 것이 이상했습니다. 완벽주의자로 알려진 판사의 결정문치고는 너무 성근 구석이 많았습니다.
그녀는 파일을 다시 펼쳤습니다.
법원 기록 열람 신청서, 판결문 분석 노트, 해원개발 등기 내역, 임태오 개인 금융거래 조회 신청서. 모두 혼자 작성한 것들이었습니다. 지국장에게 보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지국장 최 부장에게 해원개발 사건 보도를 계속 확대하고 싶다고 말한 건 그해 여름이었습니다. 최 부장은 한참을 침묵하다가 물었습니다. 얼마나 깊이 들어갈 생각이냐고. 법원까지 연결된다는 말이냐고. 홍미희가 그렇다고 하자, 최 부장은 그날부터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추가 취재 승인은 해줬지만 결재 속도가 느려졌습니다. 기사 출고 전에 묻는 말이 많아졌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는 그녀가 자리를 비울 때 컴퓨터 화면이 꺼져 있는 경우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밤, 법원 인근 편의점에서 라면을 먹으며 노트북을 열었을 때, 그녀는 우연히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법원 방향에서 걸어오는 사람이었습니다. 양복 차림에 서류가방을 든 오십 대 남자. 피곤한 눈빛, 다소 처진 어깨. 그냥 지나쳤다면 기억하지 못했을 얼굴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남자의 시선이 잠깐 그녀의 노트북 화면 위에 멈췄습니다. 화면에는 '김학수 부장판사'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 남자의 시선이 화면에서 그녀의 얼굴로 천천히 옮겨왔습니다.
딱 이 초였습니다. 그러나 그 이 초 동안 그는 눈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말을 걸지도 않았습니다. 뭔가를 결정하는 것처럼, 혹은 뭔가를 참는 것처럼 보이는 표정이었습니다.
남자는 아무 말 없이 편의점을 나갔습니다.
홍미희는 뒤를 돌아봤습니다. 남자는 이미 어둠 속으로 사라져 있었습니다. 그녀는 다시 화면을 봤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확신에 가까운 감각을 느꼈습니다.
이 사건은 생각보다 훨씬 깊이 들어간다는 것을.
그로부터 사흘 뒤, 그녀의 취재 파일 중 일부가 사라졌습니다.
사무실 컴퓨터에 저장해두었던 문서들이었습니다. 서버에도 없었습니다. 백업도 날아갔습니다. 외부 해킹 흔적은 없었습니다. 누군가 직접 접근해서 삭제한 것이었습니다. 사무실 열쇠는 지국장과 그녀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홍미희는 그날 오전에 보안 업체에 전화를 했습니다. 사무실 내부 접근 기록을 확인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무실에는 내부 접근 감시 설비 자체가 없었습니다. 건물 공용 씨씨티브이도 전날 밤 영상이 저장 오류로 날아가 있었습니다.
너무 깔끔했습니다.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지국장 최 부장은 그날 아침 출근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그는 조기 명예퇴직 신청서를 제출했습니다. 통보 없이. 그리고 그 뒤로 홍미희의 연락을 받지 않았습니다.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았습니다. 문자를 보내도 읽지 않았습니다. 이 년이 넘게 같은 공간에서 일했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사라졌습니다.
그 밤, 홍미희는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화가 나는 것과 두려운 것은 다릅니다. 지금 자신이 느끼는 것은 분노가 아니라 공포에 더 가깝다는 걸 그녀는 솔직하게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그 공포 뒤에는 다른 감각도 있었습니다. 파일을 지울 만큼 누군가가 신경 쓰고 있다는 것. 그것은 역설적으로 자신이 옳은 방향을 보고 있다는 증거였습니다.
그녀는 새 노트를 꺼냈습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다시 썼습니다. 손으로.
제3장. 첫 번째 균열
이십이년 형합 삼백십칠호 첫 공판은 십일월 초에 열렸습니다.
공판 전날 밤, 김학수는 자정이 넘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침대에 누웠지만 눈이 감기지 않았습니다. 천장을 바라보며 그는 내일 법정에서 해야 할 것들을 순서대로 떠올렸습니다. 착석, 개정 선고, 공소사실 낭독, 피고인 확인, 변호인 진술. 이십 년 동안 반복한 절차들이었습니다. 몸이 기억하는 순서였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에는 그 순서들이 제대로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중간중간에 다른 것들이 끼어들었습니다. 열여섯 글자. 아내의 문자. 수첩의 숫자.
새벽 두 시에 그는 일어나서 서재로 갔습니다.
불은 켜지 않았습니다. 어두운 서재에 서서 창밖의 거리를 바라봤습니다. 새벽 해원 시내는 조용했습니다. 가끔 택시 한 대가 지나갔습니다. 멀리 항구 쪽에서 불빛이 반짝였습니다. 그는 그 불빛을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법관 윤리 선언문을 처음 낭독하던 날을. 연수원 수석 수료식 날, 단상 앞에서 선서하던 자신의 목소리를. 그 목소리가 지금도 귓속 어딘가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에는 그 목소리가 너무 멀리 들렸습니다.
방청석은 절반이 넘게 찼습니다. 해원 지역 언론사 기자들, 재개발 구역 주민 대표들,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양복 차림의 중년 남성들 몇몇이 뒤쪽에 조용히 앉아 있었습니다. 피고인 임태오는 짙은 감색 정장에 흰 셔츠를 입고 피고인석에 앉아 있었습니다. 오십 대 후반, 머리는 단정하게 빗어 넘겼고 표정은 무겁되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임태오는 공판 시작 십 분 전부터 피고인석에 앉아 정면을 바라봤습니다.
그 시선이 어디를 향하는지, 법정 안 사람들은 각자 다르게 읽었습니다. 어떤 이는 체념이라고 봤습니다. 어떤 이는 오히려 자신감이라고 봤습니다. 변호인 강현우만이 정확하게 알았습니다. 저건 계산입니다. 임태오는 어떤 상황에서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도록 스스로 훈련된 사람입니다. 삼십 년 넘게 건설업계에서 살아남은 방식이었습니다.
임태오의 변호인은 법무법인 해동의 강현우 변호사였습니다.
서울 법대 출신에 검사 경력 십오 년, 이 지역에서 손꼽히는 형사 전문 변호사였습니다. 해원 법조계에서 그가 맡은 사건의 무죄 선고율은 육십삼 퍼센트였습니다. 그 숫자는 우연이 아니라 전략의 결과였습니다. 강현우는 법정에서 감정을 쓰는 법이 없었습니다. 언제나 숫자와 논리만으로 상대방을 해체했습니다.
강현우는 첫 공판 전날 사무실에서 혼자 공소장을 다시 읽었습니다.
다섯 번째 읽는 것이었지만 이번에는 각도를 달리했습니다. 검찰이 가장 공들인 부분이 어디인지 찾는 것이 아니라, 검찰이 가장 약한 부분이 어디인지를 찾았습니다. 진술 의존도가 높은 부분. 물증이 간접적인 부분. 그리고 시간 흐름상 연결고리가 취약한 부분. 그렇게 표시하다 보니 공소장 전체에서 빨간 밑줄이 열세 개가 나왔습니다. 그는 그 열세 개를 순서대로 정렬했습니다. 이것이 그의 방패였습니다.
검사 측에서는 해원지검 특수부 소속 윤정호 검사가 주심을 맡았습니다.
삼십대 중반, 서울에서 내려온 지 이 년 된 검사였습니다. 부임 직후부터 해원개발 사건에 달라붙어 방대한 수사 기록을 혼자 다 분석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말이 적고, 눈빛이 날카로우며, 공판 준비를 철저히 하는 사람으로 내부 평가가 좋았습니다.
그러나 윤정호가 해원으로 내려온 것이 완전히 자발적인 선택은 아니었습니다.
서울 지검 특수부에서 일할 때 수사하던 대형 비자금 사건이 갑작스럽게 공판 전 단계에서 부장검사 교체로 흐지부지된 적이 있었습니다. 윤정호는 당시 지청장에게 이의를 제기했고, 그것이 빌미가 됐습니다. 표면상 발령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좌천이었습니다. 그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해원에 와서 똑같이 일했습니다. 오히려 더 꼼꼼하게.
그가 이 사건에서 가장 공을 들인 것은 계좌 추적이었습니다.
임태오가 공무원에게 건넨 금품의 경로를 역추적하는 데 넉 달이 걸렸습니다. 용역 계약서, 납품 대금, 골프장 회원권 대납 기록. 파편처럼 흩어진 자료들을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하는 작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흐름의 끝에는 아직 설명되지 않는 출구가 하나 있었습니다. 칠억 원대의 자금 중 일부가 용역비 명목으로 빠져나간 뒤 어디서도 재등장하지 않았습니다. 그 빈자리가 윤정호를 불편하게 했습니다.
첫 공판에서 검사는 공소사실을 조목조목 낭독했습니다.
임태오가 도시계획 변경 과정에서 시 공무원에게 건넨 금품의 총액은 이억사천만 원이었습니다. 전달 방법은 골프 회동, 해외 출장 경비 대납, 건설 기자재 납품업체를 우회한 현금 전달이었습니다. 건축 허가 과정에서 서류를 허위로 꾸민 정황, 그리고 그 과정에 관여한 심의위원들의 진술도 포함됐습니다.
낭독은 이십오 분 동안 이어졌습니다.
방청석에서 재개발 구역 주민 대표가 수첩에 무언가를 받아 적었습니다. 기자들은 노트북을 열었습니다. 임태오는 내내 정면을 바라봤습니다.
변호인 강현우는 모두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단순 부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공소사실의 구조 자체를 문제 삼았습니다. 금품 전달의 증거는 진술에만 의존하고 있으며, 진술자들은 모두 공범 또는 참고인 자격으로 검찰과 합의된 인물들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독립적 물적 증거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진술의 신빙성을 공격하는 전략이었습니다.
강현우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습니다.
차분하게, 그러나 명확하게. 마치 수학 공식을 설명하듯 반박했습니다. 공소사실 구조의 허점을 짚는 방식은 그의 특기였습니다. 아직 증거 채택이나 증인 신문이 시작되기 전임에도, 법정 안의 공기는 이미 양쪽으로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습니다.
김학수는 그 모든 과정을 빠짐없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법정에 앉아 있는 그의 머릿속에는 또 다른 숫자가 맴돌고 있었습니다. 이번 달 사채 이자 상환 기한은 공판 이틀 뒤였습니다. 아직 돈이 없었습니다.
그 생각을 지우려고 했습니다. 법정에서는 그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검사가 증거를 열거할 때도, 변호인이 반박할 때도, 그 숫자는 의식 한쪽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것 자체가 이미 문제였습니다. 법정에 앉아서 사건이 아닌 다른 것을 생각하는 판사. 그 자체가 이미 그는 온전하지 않았습니다.
공판이 끝난 날 저녁, 그의 휴대폰으로 전화가 왔습니다.
발신 번호는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습니다. 목소리는 중저음, 또렷하고 느긋했습니다.
"잘 지켜봤습니다. 판사님 스타일대로 진행하시면 됩니다. 자세한 건 아시는 분이 말씀드릴 겁니다."
통화는 이십 초도 안 되어 끊어졌습니다.
그는 전화기를 한참 들고 서 있었습니다.
신고. 기록. 증거 보존. 머릿속에서 절차들이 떠올랐습니다. 판사로서 당연히 해야 할 것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 다른 생각들이 조용히 자리를 잡았습니다. 아내의 얼굴. 병원 복도. 수첩의 숫자들.
그 생각들은 조용히 자리를 잡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빠르게 번지고 있었습니다. 처음 문자를 받았을 때와 지금이 달랐습니다. 그때는 지웠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전화는 다음 단계였습니다. 그 다음 단계를 무시하는 것은 이전보다 더 큰 의지가 필요했습니다.
그는 그 의지가 지금 자신에게 있는지 확인하려 했습니다.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전화기를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신고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첫 번째 균열이었습니다.
이틀 뒤, 그의 통장에 정확히 천오백만 원이 입금됐습니다. 송금인 이름은 '해원보증서비스'였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회사였습니다.
그는 통장 잔액을 여러 번 확인했습니다.
돈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실재했습니다. 그는 그 돈을 사흘 동안 쓰지 않았습니다. 손대지 않고 두었습니다. 만약 자신이 쓰지 않는다면 이건 아직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흘째 되는 날 밤, 사채 업자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이번엔 목소리가 달랐습니다. 낮고 선명했습니다. 이번 주 안에 해결 안 되면 다른 방법을 쓴다고 했습니다. 다른 방법이 무엇인지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돈으로 사채를 갚았습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말했습니다. 한 번뿐이라고.
사채를 갚고 나서 처음으로 해방감이 아닌 다른 감각이 왔습니다.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감각이었습니다. 법정에서 이십 년 동안 유지해온 어떤 것이 조용히 사라졌다는 것을, 그는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 돈은 사라진 뒤였습니다.
제4장. 브로커의 언어
법조 브로커 류인석을 처음 만난 건 법원 청사 뒤편 주차장이었습니다.
이 년 전 어느 저녁이었습니다. 아직 임태오 사건이 기소되기 전이었고, 김학수는 다른 사건 관련 서류를 차 안에 넣으러 주차장에 내려갔습니다. 낯선 남자가 옆 칸에 서 있었습니다. 일부러 기다린 것처럼 보였습니다.
키가 크고 세련된 차림의 오십대 초반 남자였습니다. 명함은 없었고, 자신을 법무 컨설턴트라고 소개했습니다. 목소리는 낮고 친절했습니다. 마치 오랜 지인을 대하듯, 조심스럽게 거리를 좁혔습니다. 법원 주변에는 이런 인물들이 드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남자는 다른 무언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상대방이 지금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때는 그냥 지나쳤습니다. 연락처를 받지도 않았고, 이름을 기억하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남자는 이후에도 계속 나타났습니다. 법원 근처 식당에서, 법원 인근 커피 가게에서, 한 번은 병원 주차장에서. 우연이라기엔 너무 많았습니다.
류인석은 김학수의 빚을 어떻게 알고 있었는지 한 번도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알고 있었습니다. 사채 업체 이름, 원금, 이자율, 아내의 병원 진료 기록까지. 전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정보를 쥔 채로 어떤 협박도 하지 않았습니다. 협박보다 훨씬 무서운 방식을 택했습니다. 배려처럼 보이는 언어로 상대를 옭아맸습니다.
류인석이 처음 직접적으로 언급한 건 아내의 새 치료제였습니다.
해외에서 임상 중인 류마티스 신약이 있는데, 국내 특정 병원에서 비용을 지원받아 사용할 수 있는 경로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 경로를 연결해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아무 조건도 달지 않았습니다. 그냥 해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 말 뒤에 오는 것이 무엇인지 김학수는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아내가 전날 밤에 했던 말이 먼저 들려왔습니다. 요즘 손가락이 안 펴져. 글씨를 쓰기가 어렵다고.
"판사님이 어렵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가 있잖습니까."
이 말이 류인석의 언어였습니다.
그 말은 서비스 업체 직원처럼 들렸습니다. 친절하고, 전문적이고, 부담 없이. 그러나 그 뒤에 오는 것은 서비스가 아니라 계약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계약의 내용은 종이에 적히지 않았습니다. 목소리와 눈빛으로만 전달됐습니다.
김학수는 두 번째 공판이 열리기 사흘 전, 류인석이 건넨 서류 뭉치를 열어봤습니다.
공식 증거물이 아닌 자료들이었습니다. 임태오 측이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법리 분석 자료와, 해당 사건에서 증인으로 나올 예정인 인물들의 신상 정보가 담겨 있었습니다. 증인들의 과거 전과 기록, 진술 번복 가능성에 대한 분석, 심지어 가족 관계 정보까지 포함돼 있었습니다.
그 정보들은 정확했습니다.
그 정밀도가 더 무서웠습니다. 무작위로 모은 정보가 아니라 선별된 정보였습니다. 어떤 정보가 판사에게 유용한지 아는 사람이 만든 자료였습니다. 법원 내부 사정을 아는 사람, 아니면 법원 내부에 연결된 사람이 아니면 만들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서류 맨 뒤에는 한 줄이 적혀 있었습니다.
'증거능력 판단은 재판부의 고유 권한입니다.'
그 문장은 너무 정확했습니다.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명령이었습니다. 특정 증인의 진술을 증거로 채택하지 말라는 의미였습니다. 법 조문 한 줄로 포장된 지시였습니다.
김학수는 그 서류를 파쇄하지 않았습니다.
서랍에 넣었습니다.
파쇄하지 않은 이유를 나중에 그는 스스로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증거로 쓰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신고하기 위해서도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이 상황 전체를 현실로 남겨두고 싶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서류를 없애버리면 자신이 여기까지 와 있다는 사실 자체가 지워질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지워져서는 안 됐습니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했습니다.
그것이 마지막 남은 판사 본능인지, 아니면 단순한 두려움인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두 번째 공판에서 검찰은 핵심 증인 세 명의 진술을 증거로 신청했습니다. 그 중 첫 번째 증인은 임태오가 공무원에게 돈을 전달하는 자리에 함께 있었다고 진술한 전직 회사 직원이었습니다. 이름은 김병찬이었고, 해원개발에서 오 년간 자금 담당 대리로 일했다가 이 년 전에 퇴직한 인물이었습니다.
변호인 강현우는 그 증인의 과거 사기 전과를 거론하며 증인 자격을 문제 삼았습니다.
김병찬은 사 년 전 소액 사기 전과가 있었습니다. 지인에게 투자금 명목으로 돈을 받아 갚지 못한 사건으로 벌금형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강현우는 그 전과를 꺼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금전적으로 불안정한 이력이 있는 사람이, 검찰과 협조하면서 형사 처벌을 면하는 조건으로 진술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그것은 억측이었지만 법정에서 주장 자체는 가능했습니다.
김학수는 잠시 멈췄습니다.
판사의 그 침묵은 짧았습니다. 그러나 법정 안에서 그 침묵의 의미를 읽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해당 증인의 신빙성에 대한 판단은 증인 신문 이후에 합니다."
그 말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법적으로 하자가 없는 발언이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증인 채택 자체를 미루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공판은 증인 신문 없이 끝났습니다.
그런데 원래 이번 공판에서 증인 신문이 진행될 예정이었습니다.
윤정호는 이미 증인 소환장을 발부받았고, 김병찬은 법정 밖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공판 순서상 증인 신문이 다음이었습니다. 그런데 김학수는 그 순서를 그냥 넘겼습니다. 법적으로 문제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그가 해온 방식은 아니었습니다.
검사 윤정호는 공판 후 기록을 검토하면서 이마를 짚었습니다.
그는 이전에도 류인석이라는 이름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서울에서 일할 때, 한 선배가 해원으로 내려가면 조심해야 할 사람이 있다고 귀띔해줬습니다. 이름은 기억했지만 얼굴은 몰랐습니다. 지금 그 이름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그날 밤 윤정호는 검찰청 내부 데이터베이스를 뒤졌습니다.
류인석이라는 이름으로 검색했습니다. 직접 수사 기록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참고인 진술 기록에 두 번 이름이 나왔습니다. 모두 해원 지역 법인 관련 사건이었습니다. 한 건은 삼 년 전 부동산 사기 사건이었고, 다른 한 건은 오 년 전 입찰 담합 사건이었습니다. 두 사건 모두 불기소 처분으로 끝났습니다.
윤정호는 그 두 사건의 담당 검사 이름을 확인했습니다. 지금은 다른 지역으로 전출된 상태였습니다. 전화를 해봤습니다. 한 명은 받았습니다. 그 검사는 잠깐 침묵하더니 말했습니다. 그 사건은 기억하는데, 뭔가 더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정확하게는 기억이 안 난다고. 그리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윤정호는 그날 밤, 혼자 법원 기록을 다시 펼쳤습니다.
지난 삼 년 동안 해원고등법원에서 진행된 형사합의부 사건 중 무죄 또는 집행유예 선고 비율이 비정상적으로 높았던 사건들을 뽑아냈습니다. 공통점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피고인 유형, 변호인 이름, 사건 규모. 그리고 담당 판사 이름이 반복됐습니다.
그 이름은 하나였습니다.
김학수.
윤정호는 파일을 닫지 않았습니다. 출력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인쇄물에 날짜를 적고 별도 봉투에 넣었습니다. 아직 확신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봉투는 이미 그의 서랍 가장 깊은 곳에 들어갔습니다.
제5장. 홍미희의 파일
홍미희의 두 번째 취재 파일은 이번에는 클라우드에만 저장했습니다.
사무실 컴퓨터도, 회사 서버도 쓰지 않았습니다. 개인 노트북에만 작업했고, 와이파이는 공공 인터넷을 피했습니다. 취재 노트는 손으로 썼습니다. 디지털 흔적을 최소화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누군가가 그녀의 첫 번째 파일을 지운 이후, 그 조심성은 본능에 가까워졌습니다.
지국장이 나간 뒤 해원지국에는 변화가 생겼습니다.
본사에서 새 지국장이 내려왔습니다. 사십 대 초반의 강남규 부장이었습니다. 그는 부임 첫날 전 직원 회의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역 언론의 역할은 지역 사회와의 신뢰 관계를 쌓는 것이라고. 자극적인 의혹 보도는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홍미희는 그 말 안에서 자신에 대한 간접적인 경고를 읽었습니다.
강남규는 부임 일주일 만에 홍미희에게 개별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면담은 짧았습니다. 현재 진행 중인 취재 건들의 진행 상황을 보고해달라고 했습니다. 홍미희는 일반적인 시의회 관련 보도 몇 건을 말했습니다. 강남규는 더 구체적으로 물었습니다. 법원 관련 취재는 없냐고. 홍미희는 없다고 했습니다. 강남규는 고개를 끄덕이고 더 묻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면담이 끝나고 나오면서, 홍미희는 강남규가 그 질문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녀가 추적하는 건 크게 세 줄기였습니다.
첫째는 해원개발 사건의 자금 흐름이었습니다. 공소사실에는 이억사천만 원이 기재됐지만, 그녀가 입수한 내부 자료에 따르면 실제 거래 금액은 그보다 훨씬 컸습니다. 차명 법인을 통한 용역 계약 형태로 우회된 자금이 별도로 있었고, 총액은 최소 칠억 원대로 추정됐습니다. 그 돈의 일부가 어디로 흘렀는지, 공소사실 어디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 자금의 행방을 추적하기 위해 홍미희는 해원 지역 법인 등기소에서 직접 등기부 등본을 뽑기 시작했습니다.
차명 법인으로 의심되는 세 군데를 특정하는 데 두 달이 걸렸습니다. 등기부상 대표이사 이름은 모두 달랐지만, 설립 날짜와 법인 주소지, 그리고 등기를 처리한 법무사 사무실이 같았습니다. 같은 법무사가 다른 이름의 법인 세 개를 같은 시기에 처리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법무사를 직접 찾아갔습니다.
법무사는 문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인터폰으로 용건을 말하니 영업 중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명패는 붙어 있었습니다. 사무실 안에 불빛도 있었습니다. 홍미희는 사무실 앞에서 한 시간을 기다렸다가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다시 갔습니다. 세 번째 갔을 때, 법무사는 문을 열었지만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보고 있다가 다시 문을 닫았습니다.
그 침묵이 오히려 확신을 줬습니다.
둘째는 재판부와 브로커 간의 연결 고리였습니다.
류인석이라는 이름은 해원 법조계에서 공공연한 비밀이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공식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홍미희는 석 달에 걸쳐 법원 주변 인물들을 탐문했습니다. 법원 서기, 전직 법원 직원, 폐업한 법무사 사무실 직원. 이름을 밝히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만난 한 전직 법원 직원이 결정적인 단서를 줬습니다. 류인석이 법원 근처에 나타나는 날이 있는데, 그날은 항상 큰 사건의 공판 전후라고 했습니다.
그 전직 직원은 법원 내부 출입이 가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직접 류인석을 만난 적은 없지만, 그 이름을 들은 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법원 내부 식당에서 어느 행정직원이 전화 통화를 하면서 그 이름을 말하는 걸 들었다고. 언제냐고 물으니 일 년 전쯤이라고 했습니다. 그 직원이 지금 어디 있냐고 물으니 이미 퇴직했다고 했습니다. 빨리 나갔다고.
셋째는 김학수 개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처음에 이 줄기를 취재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개인을 파는 기사는 하지 않겠다는 스스로의 원칙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처분 결정문의 허술함, 공판에서 반복되는 이상한 침묵들, 그리고 사채 업체 출입 제보. 세 가지가 겹쳤을 때, 개인이 아니라 시스템 붕괴의 증거라는 판단이 섰습니다.
사채 업체 제보는 익명이었습니다.
법원 인근 골목 대부업체를 드나드는 중년 남성의 사진이 문자 메시지로 왔습니다. 화질이 낮아 얼굴은 알아보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뒷모습, 걸음걸이, 그리고 남자가 들고 있던 서류가방의 형태가 그녀가 편의점에서 마주쳤던 남자와 일치했습니다.
그 제보 문자는 밤 열두 시 삼십 분에 왔습니다.
모르는 번호였습니다. 사진 한 장과 짧은 메시지였습니다. 확인해보세요. 그게 전부였습니다. 홍미희는 그 번호로 답장을 보냈습니다. 돌아온 건 발신 불가 문자였습니다. 번호가 이미 정지된 상태였습니다.
누가 보낸 것인지, 왜 보낸 것인지. 그 두 가지 질문이 그녀를 며칠 동안 붙들었습니다.
확신은 서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의혹은 자랐습니다.
어느 날 오후, 그녀는 해원 지방법원 민사부 앞에서 우연히 검사 윤정호와 마주쳤습니다. 그는 서류를 한 아름 들고 계단을 내려오다가 그녀와 거의 부딪힐 뻔했습니다. 서류 몇 장이 계단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둘이 같이 주워 올리다가 눈이 마주쳤습니다.
윤정호는 기자라는 걸 알아봤습니다. 그녀 역시 그가 이 사건 담당 검사라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홍미희는 그가 줍다 잠깐 놓쳤던 서류 한 장의 제목을 읽었습니다.
'형사합의부 판결 패턴 이상 분석 보고서.'
계단 아래로 내려가면서 그녀는 그 일곱 글자를 되뇌었습니다.
검찰도 같은 방향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결정적인 확인이었습니다. 그녀 혼자 들여다보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 그리고 동시에 경고이기도 했습니다. 검찰이 움직인다는 것은, 상대방도 그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타이밍은 홍미희의 취재 속도에도 영향을 줄 수 있었습니다.
그날 밤 그녀는 취재 파일에 새 항목을 만들었습니다. 제목은 '내부'였습니다. 법원 안에서 무언가가 무너지고 있었고, 그 붕괴를 보고 있는 사람이 그녀만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그 다음 날 오전에는 또 다른 일이 있었습니다.
출근하러 집을 나서다가 문 앞 복도에서 낯선 남자와 마주쳤습니다. 아파트 복도였는데, 남자는 그녀 집 문 앞을 지나치는 척하면서 아주 잠깐 멈췄습니다. 눈을 마주치지 않았습니다.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그 발걸음이 어디서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계단으로 사라졌습니다.
홍미희는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계단으로 내려갔습니다.
남자는 없었습니다.
그것이 감시인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일상의 한 장면인지, 구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날부터 그녀는 외출할 때 스마트폰 녹음 기능을 켜두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아침, 그녀의 우편함에 봉투 하나가 꽂혀 있었습니다.
수신인도, 발신인도 없는 봉투였습니다.
안에는 재판 기록 복사본 다섯 장이 들어 있었습니다. 공식 봉인이 찍혀 있었습니다. 법원 내부 인간이 아니라면 접근할 수 없는 서류들이었습니다.
그 서류 중 하나는 첫 번째 공판 당일 법원 내부에서 작성된 비공개 재판장 메모였습니다. 판사가 공판 중에 적는 개인 메모는 원칙적으로 외부에 공개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메모 사본이 홍미희 손에 들어온 것이었습니다. 내용을 보는 순간 그녀는 숨을 멈췄습니다.
메모의 마지막 줄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2차 공판 전 연락 확인 요.
봉투 안에 메모 한 장이 함께 있었습니다.
'3차 공판 전 확인하세요.'
제6장. 3차 공판
세 번째 공판은 두 번째 공판보다 훨씬 팽팽했습니다.
공판 전날 밤, 검사 윤정호는 검찰청 회의실에서 혼자 마지막 리허설을 했습니다.
책상 위에 서류를 모두 펼쳐놓고, 각 증거와 주장이 어떤 순서로 연결되는지 다시 정리했습니다. 공소사실 요지, 계좌 거래 증거, 증인 진술 신청, 그리고 예상되는 변호인 반박에 대한 대응. 모두 스물두 개의 단계로 정리됐습니다. 그는 그 스물두 개를 순서대로 소리 내어 읽었습니다. 처음에는 일반 속도로. 그다음에는 빠르게. 그다음에는 변호인 반박을 가정하면서 각 단계마다 즉각 대응할 수 있는지 확인했습니다.
이 방식은 서울에서 일할 때 스승 같은 선배 검사에게 배운 것이었습니다. 법정은 무대가 아니라 전쟁터라고. 이기려면 상대방보다 준비를 더 많이 해야 한다고.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재판장이 어디를 의심할 것인지를 미리 알아야 한다고.
이번 공판에서 윤정호가 가장 신경 쓰인 것은 재판장이었습니다.
판사 본인이 아니라, 재판장의 판단이 가져올 결과가. 두 번의 공판을 거치면서 그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 확신을 근거로 행동할 수는 없었습니다. 확신은 증거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확신 위에서 오늘 공판을 어떻게 운영할 것인지는 달라질 수 있었습니다.
방청석은 만석이었습니다.
재개발 구역 주민 대표 모임에서 조직적으로 방청을 신청했고, 해원 지역 시민단체 두 곳도 방청인을 보냈습니다. 주민 대표 중 한 명은 법원 복도에서 기자들에게 말했습니다. 이 재판은 우리 집이 걸린 재판이라고.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우리는 계속 지켜볼 것이라고.
그 말이 법정 안으로 들려오지는 않았지만, 법정 안의 공기에는 그 분위기가 배어 있었습니다.
홍미희는 기자석 맨 앞줄에 앉았습니다. 손에는 출입 허가증과 노트가 있었고, 눈은 피고인석보다 판사석을 향해 있었습니다.
전날 밤 그녀는 봉투에서 꺼낸 재판장 메모를 다시 읽었습니다.
메모 사본의 출처는 여전히 불분명했습니다. 그러나 내용은 명확했습니다. 2차 공판 전 연락 확인 요. 이 문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홍미희는 여러 가지로 해석해봤습니다.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은 하나였습니다. 누군가와의 연락을 확인한다는 메모. 그 누군가는 법원 외부 인물이었습니다.
오늘 공판에서 그녀는 그 판단이 맞는지 확인하려 했습니다.
검사 윤정호는 이날 핵심 증인 신문을 강행했습니다.
이차 공판에서 미뤄진 전직 직원 김병찬이었습니다. 그는 임태오와 도시계획과 공무원이 직접 금품을 주고받는 자리에 함께 있었다고 진술했습니다. 구체적인 장소, 날짜, 금액, 그리고 그 자리에 동석했던 또 다른 인물의 이름까지 진술했습니다.
증인석에 앉은 김병찬은 처음에는 목소리가 안정돼 있었습니다.
그는 진술을 준비한 사람처럼 답했습니다. 날짜가 물으면 날짜를, 장소가 물으면 장소를. 윤정호의 주신문은 체계적이었습니다. 사건 당일 자신이 어디 있었는지부터 시작해서, 어떤 순서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시간 순서대로 이끌었습니다.
증인의 진술이 이어지는 동안 방청석은 조용했습니다.
다섯 줄 뒤쪽에 앉아 있던 주민 대표 한 명이 수첩에 무언가를 적었습니다. 다른 주민 대표는 그 사람의 팔을 가볍게 잡아당겼습니다. 법정에서는 기록을 해도 되지만 소란을 일으키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변호인 강현우의 반대 신문은 치밀했습니다.
과거 사기 전과를 다시 꺼내 들었고, 당시 검찰 조사 과정에서 불리한 처벌을 면하기 위해 허위 진술을 유도받았을 가능성을 거론했습니다. 진술이 두 번 바뀐 점도 파고들었습니다. 강현우는 구체적으로 물었습니다. 첫 번째 경찰 조사에서 당신은 해당 날짜에 그 자리에 없었다고 진술했는데, 왜 두 번째 검찰 조사에서 있었다고 바뀌었냐고.
증인은 흔들렸습니다.
한 번은 대답을 못 했습니다. 강현우는 기다렸습니다.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그 침묵 자체가 그에게는 무기였습니다. 법정 안의 모든 사람이 그 침묵을 듣고 있었습니다.
강현우는 다음 단계로 넘어갔습니다.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는 또 다른 인물에 대해 물었습니다. 그 인물과 증인이 이전에 어떤 관계였는지, 그 관계가 진술 내용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닌지. 증인은 관계가 없다고 했습니다. 강현우는 세 가지 사례를 들어 그 관계의 존재를 구체적으로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강현우는 김학수를 향해 고개를 들었습니다.
"재판장님, 이 증인의 진술은 독립적 물증 없이 전적으로 주관적 기억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수사기관의 유도 신문 가능성도 있습니다. 증거 능력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법정 안이 잠시 고요해졌습니다.
김학수는 안경을 고쳐 쓰고 기록을 들여다봤습니다.
그 동작이 몇 초였는지, 법정 안의 모든 사람이 느꼈습니다. 판사석의 침묵이 법정의 공기를 바꾸고 있었습니다.
그 침묵 동안 그의 머릿속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습니다.
김학수는 알았습니다.
강현우의 반박은 맞지 않았습니다. 진술의 변경이 있었다고 해서 그 진술이 증거로 채택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진술의 신빙성은 증거 채택의 문제가 아니라 증거 가치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 판단은 증인 신문이 충분히 이루어진 후에 해야 합니다. 지금 강현우의 주장은 법리적으로 절차를 뒤바꾸려는 시도였습니다.
그러나 그 판단을 법정에서 그대로 말하는 것이, 지금의 그에게는 불가능했습니다.
"증인 신문을 계속하겠습니다."
채택도, 기각도 아니었습니다. 결정을 뒤로 미루는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나 검사 윤정호는 그 말의 진짜 의미를 알아차렸습니다. 이 진술은 이번 공판에서는 증거로 채택되지 않을 것이었습니다.
윤정호는 다음 카드를 꺼냈습니다.
"재판장님, 금일 추가 증거로 해원개발 법인 계좌 금융 거래 내역 원본을 제출하겠습니다."
그 서류는 준비된 것이었습니다. 계좌 이체 기록, 용역 계약서, 수취인 정보. 임태오와 공무원들 사이의 자금 흐름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물증이었습니다. 진술 의존도가 높다는 변호인의 공격에 대한 정면 반박이었습니다.
변호인이 즉각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영장 없는 금융 정보 수집이 적법한 절차를 밟았는지 검토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강현우는 구체적인 법 조항을 인용했습니다. 금융실명법 제 사 조, 그리고 대법원 판례 두 건. 준비된 반박이었습니다. 이 서류가 나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습니다.
윤정호는 그 순간,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더 강하게 느꼈습니다.
변호인이 이 증거를 미리 알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였습니다. 검찰 내부 누군가가 흘렸거나, 아니면 이 서류가 제출될 것이라는 정보가 다른 경로로 전달됐거나. 두 가지 모두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또다시 판사석의 침묵.
김학수의 눈이 서류를 훑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해당 증거의 수집 절차에 대한 소명을 다음 공판 전까지 제출하십시오."
윤정호의 턱이 굳었습니다.
증거 채택을 다음으로 미루는 것이었습니다. 물증이 법정에서 검토되기 전에, 변호인 측이 절차상 하자를 찾을 시간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소명 기간 동안 변호인은 해당 금융 자료의 수집 경위를 분석하고, 법리적 반박 논리를 더 촘촘하게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정이 이상하다는 걸 홍미희도 알았습니다.
절차를 이유로 채택을 미루는 것은 법적으로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해당 증거는 금융감독원을 통한 정식 조회 절차를 거친 것이었습니다. 절차 소명이 필요할 만큼 취약한 부분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이유로 미룬 것은, 판사가 변호인 측에 시간을 주는 것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녀는 노트에 밑줄을 그었습니다. 두 줄로.
공판이 끝나고 방청객들이 우르르 나가는 틈에, 홍미희는 자리에 남았습니다. 법정 문이 닫히고 기자 몇 명만 남았을 때, 그녀는 판사석 쪽을 바라봤습니다. 김학수는 서류를 정리하며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그가 잠깐 시선을 들었고, 그 시선이 기자석 방향으로 왔습니다. 홍미희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눈빛 안에서 그녀는 뭔가를 읽었습니다.
두려움. 그리고 피로. 그리고 그 아래 층위에서, 수치심처럼 보이는 것.
그게 전부가 아닐 수도 있었습니다. 착각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홍미희는 직감적으로 알았습니다. 저 사람은 지금 무너지는 중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균열이 커지고 있다는 신호라는 것도.
그날 밤, 홍미희는 취재 파일에 마지막으로 한 줄을 추가했습니다. 그리고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아직 확보한 증거만으로 기사를 쓸 것인가, 아니면 더 기다릴 것인가.
그녀는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오래 기다릴 수는 없었습니다. 이미 누군가가 그녀를 감시하고 있었고, 그것은 시간이 제한돼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제7장. 균열이 터지는 밤
사 차 공판을 일주일 앞둔 어느 목요일 밤, 해원 지역 온라인 커뮤니티에 게시물 하나가 올라왔습니다.
제목은 '해원 법조 비리 내부 고발자의 증언'이었습니다.
내용은 길었습니다. 해원개발 사건 피고인 측이 재판부에 접근하기 위해 브로커를 고용했다는 것, 그 브로커가 법원 내부 인사와 연결됐다는 것, 그리고 특정 판사의 금전 문제가 이용됐다는 것이었습니다. 판사의 이름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기술된 세부 사항들, 재직 법원, 담당 재판부, 아내의 병, 이런 정보들은 이름이 없어도 특정 개인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게시물 문체는 정연했습니다.
단순한 루머나 감정적인 폭로가 아니었습니다. 사건 배경, 시기, 방법, 그리고 금액까지 구체적으로 기술돼 있었습니다. 그 구체성이 오히려 이상했습니다. 내부 고발자라면 이렇게 정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정도 정확성은 직접 당사자이거나, 당사자로부터 들은 사람이거나, 아니면 다른 목적으로 이 정보를 의도적으로 배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게시물은 두 시간 만에 오천 건의 조회 수를 넘겼습니다.
지역 커뮤니티 외에도 전국 단위 온라인 법조 포럼에 복붙됐습니다. 밤 열 시가 넘으면서 포털 실시간 검색어에 '해원 판사 비리' 라는 단어가 올라왔습니다. 댓글은 수백 개가 달렸습니다. 분노, 냉소, 의심, 그리고 더 많은 의혹을 요구하는 반응들이 뒤섞였습니다.
홍미희는 그 게시물을 자정이 넘어서 확인했습니다.
손이 떨렸습니다. 이건 그녀가 찾던 내용의 일부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터지는 건 원치 않았습니다. 익명 게시물로 먼저 유포되면 진실과 루머가 뒤섞이게 됩니다. 검증 없이 퍼진 정보는 취재를 방해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만약 이 게시물이 누군가 의도적으로 심어놓은 것이라면 의심의 방향 자체가 틀어질 수도 있었습니다.
그녀는 게시물 원문을 저장하고 즉시 발신자 추적에 나섰습니다.
아이피 추적은 커뮤니티 운영자 협조 없이는 불가능했습니다. 그녀는 커뮤니티 운영자에게 연락했습니다. 게시자 아이피 정보 제공을 요청했습니다. 운영자는 법원 영장 없이는 제공이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예상된 답이었습니다. 대신 게시물 최초 작성 시각, 접속 기기 유형, 이용한 망 유형을 확인했습니다. 망 유형에서 특이한 점이 있었습니다. 공공 와이파이가 아닌 법인 전용망으로 접속된 흔적이 있었습니다. 어떤 법인인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동시에, 그 밤 김학수는 법원 집무실에서 그 게시물을 보고 있었습니다.
화면 앞에 오랫동안 앉아 있었습니다. 자신에 관한 이야기라는 걸 알면서도, 처음에는 현실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글을 반복해서 읽었습니다. 판사. 병원비. 브로커. 이 단어들이 모여서 하나의 형상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 형상은 지난 일 년의 자신이었습니다.
아직 그의 이름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는 사람은 알 것이었습니다. 해원 법조계에서 형사합의부 부장판사 중 아내가 오래 입원해 있는 사람은 한 명이었습니다.
그는 집무실 조명을 껐습니다.
어두운 방 안에서 그는 처음으로 스스로에게 질문했습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단순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대답이 오지 않았습니다. 지난 일 년 동안 스스로에게 해왔던 모든 설명들이 그 질문 앞에서 힘을 잃었습니다. 한 번뿐이라고 했습니다. 어쩔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아내를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들이 이제는 자신에게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십 년 전 연수원 수석 수료 때 쓴 판사 윤리 선언문을 기억했습니다. 그 선언문은 집에 있었습니다. 서재 책장 맨 위 칸, 오래된 액자 안에 들어 있었습니다. 그 액자를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대답이 오기 전에 휴대폰이 울렸습니다. 류인석이었습니다.
목소리는 여전히 친절하고 느긋했습니다. 게시물 봤냐고 했습니다. 걱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출처를 곧 지울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덧붙였습니다. 사차 공판만 잘 마무리되면 이 모든 걸 끝낼 수 있다고. 마지막 번이라고.
김학수는 전화를 끊지 않고 들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번이라고.
그 말은 처음에 그 돈을 받던 날 자신이 스스로에게 했던 말과 똑같았습니다. 류인석은 그 말을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어떤 자기합리화로 이 자리에 섰는지를. 그리고 그 말을 다시 돌려줌으로써, 다음에도 같은 자기합리화가 가능하게 만들려 했습니다.
그것이 류인석의 방식이었습니다. 상대방의 언어로 상대방을 감쌌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 그 언어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어떤 언어로 스스로를 속여왔는지가 너무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끊겠습니다."
그것이 그가 처음으로 류인석에게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은 날이었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그는 한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두운 집무실에 앉아서. 밖에서 간간이 차 소리가 들렸습니다. 법원 건물 외벽을 타고 바람이 지나갔습니다. 이 건물에서 이십 년을 보냈습니다. 처음에 이 건물에 들어섰을 때 느꼈던 것, 그 무거운 책임감 같은 것이 지금도 어딘가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직 자신 안에 있는지, 아니면 이미 떠나버렸는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다음 날 오전, 윤정호 검사는 특별 소환을 받았습니다.
서울 고검에서 내려온 지시였습니다. 해원개발 사건에 대한 감찰 조사가 개시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조사 대상에는 검찰 수사 과정뿐만 아니라, 재판부의 판결 편향성도 포함된다고 했습니다.
지시서를 받아 들고 윤정호는 창밖을 한 번 봤습니다.
그 지시서를 읽으면서 윤정호는 이상한 기분을 느꼈습니다.
누군가가 정확한 타이밍에 정확한 방향으로 압력을 가한 것이었습니다. 게시물이 뜬 다음 날 서울 고검이 움직인 것. 이건 게시물에 반응한 게 아니었습니다. 이미 준비돼 있던 움직임이었습니다. 게시물은 단지 명분을 만들어준 것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게시물은 누가 올렸는가.
그리고 그 배후에서 움직이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이 두 가지 질문은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류인석이 단순한 브로커가 아닐 수 있다는 것. 어쩌면 그는 이 상황 전체를 설계하고 있는 사람일 수도 있었습니다. 판사를 이용해 사건을 통제하고, 감찰이 시작되면 판사를 버리는 방식으로. 그렇다면 오늘 이 감찰 지시 역시 류인석의 계획 안에 있는 것일 수 있었습니다.
윤정호는 파일을 다시 열었습니다.
그 안에서 류인석이라는 이름 옆에 물음표를 지우고, 빨간 밑줄을 그었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 새로 한 가지를 적었습니다. 누가 이 판을 짰는가.
제8장. 침묵의 법정
이십삼년 일월, 해원고등법원 형사합의부 대법정.
그 공판이 열리는 날 아침, 해원시는 안개가 짙었습니다.
항구에서 올라오는 안개가 법원 언덕까지 번졌습니다. 느티나무는 안개 속에서 형태만 남아 있었습니다. 법원 정문 앞 인도에는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재개발 구역 주민들, 시민단체 회원들, 그리고 취재진. 피켓을 든 사람들은 무언가를 외치지 않았습니다. 그냥 서 있었습니다. 그 조용함이 오히려 더 무거웠습니다.
이 공판은 정식 명칭상으로는 오차 공판이었지만, 실제로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가졌습니다. 법원 감찰 결과가 발표된 지 열흘 뒤였고, 해원 지역 주요 일간지가 '판결 거래 의혹'을 제목으로 기사를 내보낸 지 나흘이 지났습니다. 방청석은 좁은 공간에 백 명이 넘게 앉아 있었고, 법원 청사 앞에는 시민단체와 주민 대표들이 피켓을 들고 서 있었습니다.
홍미희의 기사가 나간 것은 공판 이틀 전이었습니다.
그녀는 그 기사를 쓰기까지 석 달이 걸렸습니다. 류인석의 활동 기록, 해원개발 자금의 우회 경로, 그리고 판결문들 사이의 패턴 이상. 모두 이름을 밝히지 않는 복수의 내부 제보자와, 공개된 법원 기록, 금융 거래 자료를 교차 검증한 결과였습니다. 김학수의 이름은 기사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특정 형사합의부 담당 판사'라는 표현과 함께 제시된 정황 증거들은, 법조계와 언론계 모두 그 이름을 어렵지 않게 읽어냈습니다.
기사가 나간 다음 날 오후, 홍미희는 새 지국장 강남규에게 불려갔습니다.
강남규는 기사 출력물을 탁자 위에 놓고 말했습니다. 법적 검토가 필요한 내용이 있다고. 특히 특정 판사를 암시하는 표현은 명예훼손 가능성이 있다고. 홍미희는 말했습니다. 기사에 나온 모든 내용은 공개 기록과 교차 검증된 제보에 근거하며, 이름을 직접 언급하지도 않았다고. 강남규는 한 번 더 강조했습니다. 법무팀이 검토 중이라고.
홍미희는 그 말을 듣고 나왔습니다. 복도에서 그녀는 잠깐 멈췄습니다. 법무팀. 서울 본사 법무팀. 십이 년 전에도 같은 단어가 나왔었습니다.
기사가 나간 다음 날 오전, 김학수는 법원장실에 불려갔습니다.
법원장 박인준은 사법연수원 삼 기수 선배였습니다. 그와 직접 개인적인 교류는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법원장이라는 자리에서 이 상황이 의미하는 바를, 김학수는 알고 있었습니다.
법원장은 아무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회의실 탁자 위에 기사 출력물과 감찰 의견서를 나란히 놓고, 창밖을 바라봤습니다. 십 분 동안 침묵이 흘렀습니다. 시계 소리만 있었습니다. 삼 초 단위로 딸깍거리는 소리가 침묵을 더 깊게 만들었습니다.
그 침묵 속에서 김학수는 이십 년 넘게 이 건물에서 쌓아온 것들이 무엇인지 떠올렸습니다. 수석 수료, 거절한 서울 발령, 청렴의 상징이라는 말. 그 모든 것들이 지금 이 탁자 위에 놓인 두 장의 종이 앞에서 어떤 의미가 됐는지. 그리고 지금 그것이 어떤 상태인지도.
마침내 법원장이 말했습니다. 정식 감찰 절차가 진행됩니다.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는 법원장실을 나오면서 사직서를 쓸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쓰지 않았습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오차 공판 법정에서 그는 여전히 판사석에 앉았습니다.
재판복을 입고, 안경을 쓰고, 서류를 앞에 두고. 그러나 법정에 들어선 순간 그는 무언가 달라졌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공기가 달랐습니다.
방청객들의 눈빛이 달랐습니다. 기사가 나간 이후였습니다. 방청석의 시선은 더 이상 피고인석을 향하지 않았습니다. 모두 판사석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 시선들이 무엇을 묻고 있는지 그는 알았습니다.
검사 윤정호가 서류를 정리하는 손의 각도가 달랐습니다. 그리고 변호인 강현우조차 표정이 달랐습니다. 강현우는 공판 전 의뢰인 임태오를 면회하면서 이미 상황을 알고 있었습니다. 의뢰인 측의 비밀 로비가 외부로 흘러나갔다는 것을. 강현우는 이 상황에서 의뢰인을 어떻게 방어할 것인지보다, 자신이 어디까지 이 방어에 개입해 있는지를 더 걱정하기 시작했습니다.
공판은 윤정호의 추가 증거 신청으로 시작됐습니다.
"재판장님, 검찰은 추가 증거로 다음을 제출합니다. 피고인 임태오와 법조 브로커 류인석 간의 금전 거래 기록, 그리고 류인석의 통화 내역 중 특정 법원 관계자와의 접촉이 의심되는 구간의 통신 사실 확인 자료입니다."
법정이 일순 조용해졌습니다.
변호인 강현우는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그런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잠깐 서 있다가 다시 앉았습니다. 그 동작은 그가 이 싸움에서 어디까지 싸울 것인지를 스스로 저울질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법정 안의 공기가 한 번 더 변했습니다.
김학수는 그 서류들을 받았습니다.
류인석과 임태오 간의 금전 거래. 날짜와 금액이 선명했습니다. 세 번의 거래, 총 사천이백만 원. 그리고 통신 사실 확인 자료의 일부에는 모자이크 처리 없이 번호 일부가 드러나 있었습니다. 법원 내부 번호 체계와 일치하는 앞 세 자리였습니다.
그것이 그의 번호였습니다.
김학수는 서류에서 눈을 들었습니다.
법정 안의 모든 시선이 판사석을 향해 있었습니다. 기자석의 홍미희도, 검사 윤정호도, 방청객들도, 그리고 피고인 임태오까지. 그 일순간에 법정은 완전한 침묵 속에 있었습니다.
시계가 딸깍 소리를 냈습니다.
그가 지금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에 따라, 이 법정의 역사가 달라질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정은 단지 이 재판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십 년의 판사 경력이 지금 이 한 순간에 어떻게 기억될 것인지의 문제였습니다.
김학수는 서류 위에 손을 얹었습니다.
그리고 눈을 감았습니다.
짧은 순간이었습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그 순간 그는 아내를 생각했습니다. 병실에서 보내온 문자를. 그래도 당신 생각하면 괜찮아. 그 말이 지금 이 자리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내가 그 말을 할 때 진짜로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이정숙은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남편이 무언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을. 그러면서도 그 말을 했을 것입니다. 당신 생각하면 괜찮아. 그 말은 용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아직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오랜 침묵 끝에 김학수가 입을 열었습니다.
"본 재판부는 제출된 증거들에 대해 충분한 검토가 필요합니다."
법정 안에서 탄식 같은 것이 흘렀습니다. 또 미루는 것인가.
그러나 이번에는 뒤에 다른 말이 이어졌습니다.
"동시에, 본 재판부는 현재 상황에서 공정한 심리를 계속 진행하기 어렵다고 판단합니다."
법정이 술렁였습니다.
"재판장은 이 사건의 재배당을 법원장에게 요청합니다. 사유는 재판부 공정성에 대한 합리적 의심이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강현우가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말이 없었습니다.
윤정호는 볼펜을 쥔 채 멈췄습니다.
홍미희는 노트에 아무것도 쓰지 않았습니다. 단지 보고 있었습니다.
방청석에서 낮은 웅성거림이 일었습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는 사람들과, 아직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의 소리가 섞였습니다.
김학수는 재판복 위로 손을 가지런히 모았습니다.
"본 재판부의 오늘 결정은 이상입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 순간이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날 오후, 김학수는 법원장실에 직접 사직서를 제출했습니다. 감찰 조사가 진행 중인 상황에서의 사직은 절차상 즉각 수리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다렸습니다. 조사에 협조하겠다는 의사를 명시적으로 밝히고, 류인석과의 접촉 경위, 금전 수수 내역, 판결 과정에서의 영향 여부를 자진해서 진술하겠다는 서면을 함께 제출했습니다.
진술서는 오십삼 페이지였습니다.
그 안에는 대부업체 문을 처음 열던 날의 이야기부터, 첫 번째 문자 메시지를 지우던 순간, 돈이 입금됐을 때의 감각, 류인석을 처음 주차장에서 만났을 때, 서류를 서랍에 넣던 날, 그리고 매 공판마다 스스로를 어떻게 합리화했는지까지 적혀 있었습니다. 어떤 문장도 자신을 변호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문장도 아내의 병을 이유로 들지 않았습니다.
그는 변호인을 선임하지 않았습니다.
감찰 조사관이 물었습니다. 왜 변호인 없이 진행하려 하냐고. 김학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건 변호할 일이 아니라고. 기록할 일이라고.
조사관은 한 동안 아무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십이년 형합 삼백십칠호 사건은 재배당 후 사 개월 만에 선고됐습니다.
임태오는 징역 오 년, 전직 공무원 두 명은 각각 삼 년과 이 년 육 개월을 선고받았습니다. 류인석은 별도 사건으로 구속 기소됐고, 뇌물 공여 방조 및 법원 행정 방해 혐의로 징역 사 년을 선고받았습니다. 공판 과정에서 류인석과 임태오 사이의 또 다른 거래가 추가로 드러났습니다. 칠억 원대 자금 중 일부는 류인석을 통해 다른 법원 관계자에게도 흘렀을 가능성이 수사 중이라는 내용이 공소장에 추가됐습니다.
그 사실이 보도되고 나서, 홍미희는 처음으로 취재 파일을 닫았습니다.
완전히 닫은 게 아니었습니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 쓸 수 있는 것은 썼습니다. 해원개발 비리 구조, 자금 우회 경로, 브로커와 법원의 연결, 그리고 그 연결이 만들어낸 판결의 왜곡. 그 모든 것이 기사가 됐습니다.
마지막 기사에서 그녀는 한 가지를 덧붙였습니다.
비리는 순간에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그것은 아주 작은 균열에서 시작해서, 한 번 한 번의 선택이 쌓이면서 커진다고. 그리고 그 균열을 막는 것 역시 순간의 결정이 아니라, 쌓이고 쌓인 어떤 것에서 온다고.
그 문장을 쓰면서 그녀는 오차 공판의 판사석을 떠올렸습니다.
김학수에 대한 형사 재판은 이듬해 봄에 시작됐습니다.
재판이 열리던 날 아침, 해원고등법원 정문 앞 느티나무 아래 오십대 남자가 서 있었습니다. 재판복은 없었습니다. 양복은 걸쳤지만 예전과 달리 서류가방이 없었습니다. 그는 오전 여덟 시 이십 분, 법원 정문 계단을 올라갔습니다.
방청객이 아닌 피고인 자격으로.
계단을 오르면서 그는 이십 년 동안 매일 아침 이 계단에서 봤던 얼굴들을 생각했습니다. 피고인의 가족, 피해자, 증인. 그 사람들이 이 계단 앞에서 무엇을 느꼈는지. 그것을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알면서도 이 자리에 서게 됐습니다.
그게 자신의 실패였습니다.
그가 법정 문을 열었을 때, 방청석은 절반이 비어 있었습니다. 오전 이른 시각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앞줄 기자석에 홍미희가 앉아 있었습니다.
그녀는 노트를 펼쳐놓았지만 아직 아무것도 쓰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의 눈이 잠깐 마주쳤습니다.
그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눈을 피하지도 않았습니다.
단지 걸었습니다. 피고인석을 향해.
법정이 개정됐습니다.
새로 배당된 판사는 삼십대 후반, 해원 부임 삼 년 차였습니다. 그는 기록을 꼼꼼히 살폈고, 양쪽 당사자에게 공평하게 발언 기회를 줬습니다. 아무도 그 판사에 대해 특별한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정상이었습니다.
판사가 착석을 명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피고인은 공소 내용을 인정합니까."
법정 안에 짧은 침묵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김학수가 대답했습니다.
"인정합니다."
두 글자였습니다.
그 두 글자가 법정 안에 오래 머물렀습니다.
홍미희는 그제야 노트에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습니다.
천천히. 한 글자씩.
창밖으로 해원항이 보였습니다. 겨울 바다는 납빛이었습니다. 파도는 없었습니다. 잔잔하고 무거운 수면이 수평선까지 이어졌습니다. 그 수면 위로 어선 한 척이 멀리 지나갔습니다.
법정의 시계는 오전 아홉 시를 가리켰습니다.
재판은 계속됐습니다.
그리고 그 도시의 하루도, 그 판결과 상관없이, 계속됐습니다.
재개발 구역의 오래된 골목에는 아직 짐을 싸지 않은 집들이 있었습니다. 항구에는 새벽부터 나간 배들이 저녁에 돌아왔습니다. 법원 앞 느티나무는 바람이 불 때마다 가지를 흔들었습니다.
아무것도 한순간에 무너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한순간에 되돌아오지도 않습니다.
법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가장 오래 외면했던 사람 역시,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침묵의 법정은 그렇게 닫혔습니다.
그러나 그 법정에서 있었던 일들은 기록으로 남았습니다. 판결문에, 진술서에, 취재 노트에. 그리고 그것을 들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하지만 세상 어딘가에서, 또 다른 법정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그 법정 앞에서도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피고인의 가족, 피해자, 증인. 그 사람들이 이 건물 앞에서 무엇을 기다리는지 판사는 알아야 했습니다.
그 법정의 판사는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만은.
'단골책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원금 보장됩니다" / 그 말을 믿은 / 내가 바보였습니다 (1) | 2026.05.16 |
|---|---|
| 체호프 원작을 각색한 오디오북, 6호 병동. 인간의 광기와 사회의 무관심을 해부하는 냉혹한 이야기 (1) | 2026.05.15 |
| "돈은 받았지만, 유죄를 때렸습니다" 어느 판사의 위험한 거래 (0) | 2026.05.14 |
| 죽은 회장이 숨긴 비밀 금고에서 나온 충격 녹음파일 (0) | 2026.05.13 |
| 아들이 왜 죽었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1) | 2026.05.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