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은 서류함》은 재벌 회장 박동식의 요트 위 죽음에서 시작합니다. 경찰은 단순 심장마비로 사건을 종결하려 하지만, 곧 숨겨진 아들과 검은 서류함의 존재가 드러납니다. 서류함에는 차명 계좌, 해외 페이퍼컴퍼니, 정치권 로비, 조직폭력배와의 거래 기록이 담겨 있었고, 이는 한 가문의 몰락을 예고합니다. 변호사 박형준과 기자 홍민희는 진실을 추적하며 권력과 범죄의 연결고리를 파헤칩니다. 상속 분쟁과 범죄의 진실이 교차하는 이 이야기는 한국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드러내는 범죄 스릴러입니다.
부산, 2024년 늦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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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언제나 무언가를 남깁니다.
어떤 죽음은 슬픔을 남기고, 어떤 죽음은 분노를 남깁니다. 그리고 아주 드문 경우, 어떤 죽음은 비밀을 남깁니다.
부산 영도구 앞바다. 짙은 안개가 조선소 굴뚝 사이를 기어오르던 10월의 새벽, 동해해운 박동식 회장의 요트가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요트의 이름은 '청해'. 그 이름처럼 맑지는 않았습니다.
선실 안에서 발견된 박동식은 이미 차가워져 있었습니다. 눈은 반쯤 감겨 있었고, 오른손은 뒤집힌 위스키 잔 옆에 축 늘어져 있었습니다. 갑판에는 파도가 남긴 물기만이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경찰은 단순 사고사라고 했습니다. 고혈압과 심장 질환이 있던 노인이, 늦은 밤 홀로 요트에서 음주를 하다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사건은 그렇게 종결될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장례식이 끝나기도 전에, 비밀은 스스로 걸어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비밀은 단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검은 서류함 안에는 한 가문이 수십 년간 쌓아올린 범죄의 기록이 담겨 있었습니다. 차명 계좌. 해외 조세회피처 법인. 정치권 로비 내역. 조직폭력배 자금 세탁 기록.
그 서류함이 열리는 순간, 가족은 끝이 났습니다.
이것은 한 남자의 죽음에서 시작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죽음이 단순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두 사람, 변호사 박형준과 기자 홍민희의 이야기입니다.
진실은 항상 가장 어두운 곳에 숨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찾으려는 사람은, 반드시 그 어둠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 제1장 】
요트 위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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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도다리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소금기를 품고 있었습니다. 조선소에서 흘러나오는 용접 불꽃의 냄새, 녹슨 철판과 기름의 냄새, 그리고 오래된 항구 도시 특유의 습한 공기가 뒤섞인 그 냄새를 박형준은 차 안에서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케이티엑스로 두 시간 반. 박형준은 도착하자마자 부산 영도구 경찰서를 찾아갔습니다. 그의 손에는 의뢰인 박시온이 보내온 긴급 서류 봉투가 들려 있었습니다.
박형준은 서른아홉 살이었습니다. 서울대 법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사법시험에 최연소 합격한 뒤, 대검찰청 특수부에서 칠 년을 근무했습니다. 재벌 비리, 정치 자금, 기업 횡령. 그가 손댄 사건마다 구속자가 나왔습니다. 하지만 그는 검사복을 벗었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법이 때로는 권력의 방패가 된다는 것을 너무 많이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그는 대형 로펌 정법의 파트너 변호사였습니다. 기업 범죄와 상속 분쟁이 주 전공이었습니다. 그 두 가지가 동시에 폭발하는 사건을 맡게 될 줄은 몰랐지만.
경찰서 면담실은 낡았습니다. 형광등이 미세하게 깜빡였고, 벽에는 오래된 부산 항구 사진이 비뚤게 걸려 있었습니다. 담당 수사관 최기봉 경감은 박형준을 보는 눈이 곱지 않았습니다.
「서울에서 오신 변호사 선생님이 뭘 더 알고 싶으신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사건은 이미 마무리됐습니다. 사고사입니다.」
박형준은 서류를 펼치지 않았습니다. 대신 최 경감의 눈을 조용히 바라봤습니다. 오랜 법정 생활에서 체득한 습관이었습니다. 상대가 먼저 말을 이어가게 만드는 침묵.
「박동식 회장은 고혈압 약을 복용 중이었습니다. 요트 위에서 위스키를 마셨고, 심장이 버티지 못한 거죠. 부검 결과도 심근경색이라고 나왔습니다. 더 볼 게 없습니다.」
박형준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습니다.
「요트 씨씨티브이 기록은 확인하셨습니까.」
최 경감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습니다. 그 흔들림을 박형준은 놓치지 않았습니다.
박동식 회장의 죽음이 공식 발표된 것은 10월 14일 새벽이었습니다. 요트는 영도 남항동 선착장에 정박해 있었고, 새벽 네 시 반, 요트 관리인이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경찰이 도착했을 때 박동식은 이미 체온을 잃은 상태였습니다.
사인은 급성 심근경색. 부검은 간단히 이루어졌습니다. 고혈압 약과 알코올의 조합. 담당의는 그것으로 충분한 설명이 된다고 서명했습니다.
하지만 박형준이 부검 감정서를 처음 읽었을 때, 한 가지가 걸렸습니다. 혈중 알코올 농도가 예상보다 낮았습니다. 위스키 잔이 엎어져 있었고 바닥에도 흔적이 있었지만, 그것이 실제로 마신 양인지 쏟아진 양인지는 아무도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요트 선실 안은 정리가 너무 잘 되어 있었습니다. 갑자기 심장마비가 오는 사람이, 그렇게 단정하게 쓰러진다는 것은 이상했습니다. 손에 쥔 것도 없었고, 쓰러지면서 넘어뜨린 것도 위스키 잔 하나뿐이었습니다.
박형준은 경찰서를 나와 곧바로 선착장으로 향했습니다. 요트 '청해'는 아직 봉쇄 해제가 되지 않은 채 계류되어 있었습니다. 파란 경찰 테이프 너머로 보이는 요트는 나름 고급이었습니다. 삼십 피트급. 동해해운이 사내 접대용으로 보유하고 있던 선박이었습니다.
박형준은 수첩을 꺼냈습니다. 그의 수첩에는 이미 여러 줄의 메모가 적혀 있었습니다. 요트 씨씨티브이 보존 여부. 부두 씨씨티브이 확인 필요. 요트 관리인 박성태 진술서 재검토. 박동식 마지막 전화 기록.
그리고 한 줄이 더 있었습니다.
사망 당일 밤 누가 함께 있었는가.
그 질문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습니다.
같은 날 오후, 부산 해운대구의 한 카페에서 박형준은 처음으로 홍민희를 만났습니다.
홍민희는 서른여섯 살이었습니다. 부산 지역 방송국에서 탐사보도 기자로 일하다가 사 년 전 동해해운 비자금 의혹 기사를 준비하던 중 갑자기 해고 통보를 받았습니다. 방송국 이사회는 '경영 악화로 인한 인원 감축'이라고 했지만, 당시 동해해운 측 법무팀이 방송국 대주주에게 접근했다는 소문은 업계에 파다했습니다.
이후 홍민희는 독립 언론 플랫폼 '해안선'을 창간했습니다. 구독자 수는 아직 많지 않았지만, 다룬 기사마다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녀의 기사는 꼼꼼했고, 근거가 분명했으며, 무서울 만큼 집요했습니다.
홍민희는 박형준이 들어오는 것을 보자마자 노트북을 닫았습니다. 그리고 커피 한 잔을 밀어주었습니다.
「변호사님이 박시온 씨 쪽이라는 건 알고 있어요. 그리고 저도 박동식 사건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제안이 있어요.」
박형준은 커피잔을 들지 않은 채 상대를 바라봤습니다.
「무슨 제안입니까.」
「저는 자료가 있습니다. 변호사님은 법적 접근권이 있습니다. 따로 움직이면 둘 다 절반밖에 못 봅니다. 같이 움직이면 전체를 볼 수 있습니다.」
홍민희의 말은 군더더기가 없었습니다. 박형준은 잠시 그녀를 관찰했습니다. 거짓말하는 사람의 눈은 자주 깜빡입니다. 홍민희의 눈은 고요했습니다.
「어떤 자료입니까.」
홍민희는 노트북을 다시 열어 화면을 돌려 보였습니다. 화면 위에는 사 년 전 그녀가 작성하다 중단한 기사 초안이 띄워져 있었습니다. 제목은 이러했습니다.
동해해운, 조직폭력배 연계 자금 세탁 의혹. 취재원 진술 확보.
박형준은 그것을 읽으며 눈을 가늘게 좁혔습니다.
그날 저녁, 두 사람은 각자 다른 호텔에 체크인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머릿속에는 같은 질문이 맴돌고 있었습니다.
박동식은 정말로 혼자 죽은 것일까.
그리고 그 검은 서류함은 어디서 왔을까.
부산 앞바다에 바람이 불었습니다. 조선소의 불빛이 어둠 속에서 가물거렸습니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그 서류함의 행방을 걱정하며 밤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 제2장 】
숨겨진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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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은 가장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옵니다.
장례식은 사흘째 날이었습니다. 부산 영도구 박동식 회장의 자택, 오래된 일본식 건물을 개조한 2층짜리 석조 저택. 마당에는 국화꽃 화환이 줄지어 서 있었고, 문상객들이 끊임없이 드나들었습니다. 동해해운의 임원들, 부산 정재계 인사들, 그리고 조용히 차에서 내려 빠르게 조의를 표하고 사라지는 이름 모를 인물들.
박준혁은 검은 정장 차림으로 문을 지켰습니다. 서른여섯 살, 키가 크고 턱선이 각진 그는 아버지를 닮았지만 눈빛은 훨씬 날카로웠습니다. 미국 와튼스쿨에서 엠비에이를 마치고 동해해운에 입사한 지 십일 년. 이미 부회장 직함을 달고 있었습니다.
조문객 하나가 손을 내밀었습니다. 박준혁은 기계적으로 악수를 했습니다. 얼굴은 무표정했지만 머릿속은 다른 곳에 가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사무실 금고. 그 안에 있다는 서류들. 회계팀장 이원섭이 새벽에 전화를 걸어왔을 때,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습니다.
「부회장님, 비밀 금고가 열렸습니다. 회장님이 따로 관리하던 것입니다. 내용물이 심상치 않습니다.」
박준혁은 그 전화를 받은 뒤 곧바로 이원섭의 입을 막았습니다. 아직 아무것도 손대지 말 것.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 것. 자신이 갈 때까지 기다릴 것.
하지만 장례 마지막 날, 예상치 못한 폭탄이 터졌습니다.
한지영이었습니다.
박동식의 둘째 부인. 나이는 마흔셋. 서울 태생으로 젊은 시절 특급 호텔 컨시어지로 일하다 박동식과 만났습니다. 첫 번째 부인이 암으로 세상을 떠난 지 삼 년 만에 재혼했습니다. 동해해운 내부에서 그녀를 곱게 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특히 박준혁은 그녀를 아버지 재산을 노린 여자라고 공개적으로 무시해왔습니다.
한지영은 조문객이 거의 빠진 저녁 무렵, 조용히 서류 한 장을 꺼냈습니다. 그리고 가족들이 모인 거실 한가운데서, 너무도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박동식 씨가 저에게 유언을 남겼습니다. 이분의 존재를 알려달라고요.」
그녀가 내민 것은 사진 한 장이었습니다. 젊은 남자. 짧게 깎은 머리, 카메라를 든 채 항구 어딘가에 서 있는 청년.
「박시온 씨입니다. 스물여섯 살. 박동식 씨와 전 연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입니다.」
거실이 얼어붙었습니다.
박준혁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습니다. 그것은 분노보다 더 무서운 표정이었습니다. 냉각된 분노. 통제되고 있지만 언제든 폭발할 준비가 된 감정.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한지영은 눈을 내리깔지 않았습니다.
「박동식 씨가 생전에 유전자 검사를 진행했습니다. 결과가 나왔습니다. 친자가 맞습니다.」
봉투 안에는 유전자 검사 결과지가 있었습니다. 서울의 공인 유전자 검사 기관 도장이 찍혀 있었습니다. 일치 확률 구십구 점 구퍼센트 이상.
박준혁은 그 서류를 낚아챘습니다. 읽었습니다. 두 번 읽었습니다.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습니다. 하지만 목소리는 놀라울 만큼 안정적이었습니다.
「이 사람,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그 다음 날, 박시온이 나타났습니다.
부산역 근처의 낡은 고시원. 박시온이 묵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는 서울 출신이었지만 다큐멘터리 촬영을 위해 부산에 내려온 지 석 달이 됐습니다. 조선소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를 제작 중이었습니다. 예산은 바닥났고, 먹을 것을 아껴가며 작업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박시온은 박동식의 존재를 알고 있었습니다. 어머니에게서 들었습니다. 어머니는 젊은 시절 동해해운 사무직으로 일하다 박동식과 관계를 맺었고,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박동식은 이미 첫 번째 부인과 결혼한 상태였습니다. 그는 생활비를 보내겠다고 했지만 인정은 거부했습니다. 어머니는 홀로 시온을 키웠습니다.
박시온에게 박동식은 아버지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돈을 보내는 낯선 남자였습니다. 매달 계좌에 입금되는 돈. 이름도 없는 관계.
그런 박시온 앞에 갑자기 상속 분쟁이 찾아왔습니다.
한지영이 보낸 법무법인 소속 변호사가 박시온의 고시원 문을 두드렸을 때, 그는 편집 중이던 영상 파일을 저장하고 문을 열었습니다.
그것이 시작이었습니다.
박시온은 변호사가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홍민희가 그에게 박형준을 소개했습니다. 두 사람은 같은 대학 동문이었고, 홍민희는 박형준의 능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박형준은 박시온을 처음 만난 날, 두 가지를 확인했습니다.
첫째, 이 청년은 돈을 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진실을 원하고 있었습니다.
둘째, 그 진실을 알게 되면 이 청년은 위험해질 수 있었습니다.
박형준은 수임 계약서를 내밀며 말했습니다.
「제가 법적으로 당신의 권리를 보호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박시온이 그를 바라봤습니다.
「어떤 조건이든 혼자 움직이지 마십시오. 이 사건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습니다.」
박시온은 잠시 침묵하다가 계약서에 사인했습니다. 그리고 카메라를 들었습니다.
「저는 이것도 찍겠습니다. 모든 것을.」
박형준은 그 말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하지만 막지 않았습니다. 그 카메라가 결국 가장 중요한 증거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그때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날 저녁, 동해해운 본사 사무실에서는 박준혁이 법무팀과 긴급 회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회의 내용은 단 하나였습니다. 박시온의 상속 청구를 막는 법적 방법.
그리고 같은 시간, 한지영은 자신의 아파트에서 박동식이 남긴 다른 서류를 꺼내보고 있었습니다. 그 서류에는 그녀조차 알지 못했던 것이 적혀 있었습니다.
한지영의 얼굴이 굳었습니다. 손이 떨렸습니다.
그녀는 서류를 다시 집어 넣고, 창밖을 바라봤습니다. 부산 앞바다의 불빛이 어두운 바다 위에서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박동식은 죽기 전에 무언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한지영의 머릿속을 처음으로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 제3장 】
검은 서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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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은 항상 물질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때로는 종이 위의 숫자이고, 때로는 봉인된 봉투이고, 때로는 녹슨 금고 속의 묵은 서류입니다.
박동식 회장의 개인 사무실은 동해해운 본사 건물 사층에 있었습니다. 부산 중구 중앙동의 낡은 오피스 빌딩. 외관은 낡았지만 내부는 리모델링이 잘 되어 있었습니다. 사층 전체가 회장실이었고, 비서실이 별도로 붙어 있었습니다.
금고는 회장실 안쪽 벽면 서재 뒤에 있었습니다. 서가 전체가 미닫이 구조로 되어 있었고, 그것을 밀면 드러나는 공간에 두 개의 금고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회사 공용 금고로 법인 서류와 도장이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 회장 개인 금고.
개인 금고는 지문 인식과 비밀번호 이중 잠금이었습니다. 사망 직후 경찰이 현장 조사를 마치고 난 뒤, 법무팀이 공증 절차를 밟아 금고를 개봉했습니다. 박준혁이 직접 입회했습니다.
금고 안에는 여러 개의 봉투와 파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안쪽에, 두꺼운 검은 가죽 서류함이 있었습니다. 잠금장치가 달려 있었고, 열쇠는 없었습니다.
박준혁은 그 서류함을 보는 순간, 무언가를 느꼈습니다. 오랫동안 숨겨져 있던 것이 가진 특유의 침묵. 열어서는 안 될 것 같은, 그러나 반드시 열어야 하는 것의 무게.
잠금장치는 자물쇠 전문가를 불러 이틀 만에 해제됐습니다. 법무팀장 홍성찬이 서류함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내용물을 꺼내는 손이 멈췄습니다.
서류함 안에는 크게 다섯 개의 묶음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묶음은 차명 계좌 내역이었습니다. 타인의 명의로 개설된 개인 계좌 열두 개. 통장 사본과 거래 내역이 꼼꼼하게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총 잔액을 합산하면 사백억 원이 넘었습니다.
두 번째 묶음은 해외 법인 서류였습니다. 영국령 버진아일랜드, 케이맨 군도, 싱가포르에 설립된 페이퍼 컴퍼니 세 개. 각 법인의 설립 서류와 계좌 내역, 자산 현황이 담겨 있었습니다. 금액을 환산하면 천오백억 원을 넘겼습니다.
세 번째 묶음은 정치권 로비 내역이었습니다. 날짜, 금액, 이름. 국회의원 보좌관 계좌 번호. 지방 행정 관계자에 대한 현금 전달 기록. 구체적인 청탁 내용까지 박동식의 친필로 메모되어 있었습니다.
네 번째 묶음이 가장 충격적이었습니다. 조직폭력배 연계 기록. 부산 지역 조직 '남항파'와의 거래 내역. 항만 하역 노동자 파업을 진압하는 데 동원된 조직원들에 대한 사례비 지급 기록. 조직폭력배를 통한 자금 세탁 경로.
다섯 번째 묶음에는 손으로 쓴 노트 한 권이 있었습니다. 박동식의 일기였습니다. 마지막 페이지에는 사망 삼일 전 날짜가 적혀 있었습니다.
홍성찬 법무팀장은 서류를 다시 서류함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리고 박준혁을 바라봤습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습니다.
박준혁이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이 서류함은 지금부터 없는 겁니다.」
홍성찬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문이 열렸습니다.
한지영이었습니다.
그녀는 두 사람을 바라봤습니다. 그리고 서류함을 바라봤습니다. 그녀의 눈에 무언가 스쳐지나갔습니다. 박준혁은 그것을 보았습니다.
「왜 여기 계십니까.」
「저도 이 회사의 법적 이해관계자입니다. 유류분이 있습니다.」
한지영의 목소리는 침착했습니다. 오히려 너무 침착했습니다. 박준혁은 그 침착함이 무서웠습니다.
서류함의 존재는 그렇게 세 사람만이 알게 됐습니다. 아니,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틀 후, 국세청 조사국에 익명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박동식 회장의 개인 금고에 차명 계좌와 해외 조세회피처 법인 서류가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같은 날, 부산 지방 검찰청 특수부가 동해해운에 대한 내사를 시작했습니다.
제보자는 누구였을까요.
박준혁은 한지영을 의심했습니다. 한지영은 박준혁을 의심했습니다. 홍성찬 법무팀장은 서울로 긴급 출장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박형준은 이 모든 것을 홍민희에게 전달받았습니다.
「어떻게 알았습니까.」
홍민희는 노트북 화면을 가리켰습니다. 그녀의 취재원이 검찰청 내부에 있었습니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입니다.」
국세청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상속 재산의 상당 부분이 범죄 수익으로 분류되어 환수 조치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상속세 역시 천문학적으로 증가할 것이었습니다. 동해해운의 해외 자산과 차명 계좌가 모두 국세청 손에 들어가면, 회사는 버티기 어려웠습니다.
박시온의 입장에서는 상황이 복잡했습니다. 그는 법적 상속인으로 인정받기 위해 싸우고 있었지만, 정작 상속받을 재산이 범죄 수익으로 환수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리고 박형준은 클라이언트에게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지금 당신이 받을 수 있는 유산은 줄어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뭡니까.」
「당신 아버지가 왜 죽었는지.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박시온은 카메라를 들었습니다. 렌즈가 박형준을 향했습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그 순간, 박형준의 전화기가 울렸습니다. 모르는 번호였습니다. 받았습니다.
전화기 너머 목소리는 낮고 갈라져 있었습니다. 남자였습니다.
「변호사님, 요트 씨씨티브이 기록이 삭제되기 전에 복사본이 있습니다. 그날 밤 요트에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원하신다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전화가 끊어졌습니다.
박형준은 전화기를 내려놓고 창밖을 바라봤습니다. 부산의 밤이 내려앉고 있었습니다. 조선소의 조명이 어둠 속에서 붉게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사건은 이제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 제4장 】
법정의 첫 번째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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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은 무대입니다. 하지만 대본이 없는 무대입니다.
부산 가정법원 303호 법정. 10월 마지막 주 목요일. 오전 열 시 삼십 분.
박시온의 친자 확인 및 상속 분쟁 1차 심리가 시작됐습니다.
방청석은 조용했습니다. 언론은 공식적으로는 아직 이 사건을 크게 다루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법조계와 재계에서는 이미 소문이 퍼져 있었습니다. 방청석 한구석에 홍민희가 앉아 있었습니다. 노트를 펼쳐 든 채, 아무것도 놓치지 않겠다는 표정으로.
박준혁 측 변호인은 법무법인 대광의 박태성 변호사였습니다. 연배가 있는 인물로, 상속 소송에서 수십 번의 승소 기록을 가진 베테랑이었습니다. 그는 서류를 정리하면서 박형준을 훑어봤습니다. 상대를 가볍게 여기지 않는 눈빛이었습니다.
박형준은 그날 아침 다섯 시에 일어났습니다. 호텔 방 책상에서 세 시간 동안 서류를 검토했습니다. 그의 준비는 치밀했습니다.
친자 확인 소송에서 유전자 검사 결과는 핵심 증거입니다. 하지만 상대 측은 그 검사 자체의 절차적 하자를 문제 삼을 것이었습니다. 박동식의 생전 동의 여부. 검사 시료의 진위. 검사 기관의 신뢰성. 그 하나하나를 막아야 했습니다.
박형준이 먼저 제출한 서류는 다섯 가지였습니다. 유전자 검사 결과 원본. 검사 기관의 공증 자료. 박동식이 생전에 공증 사무소에서 작성한 자필 확인서. 한지영을 통해 전달받은 박동식의 유언장 사본. 그리고 시온의 어머니가 보관해온 박동식과의 통신 기록 십칠 년치.
심리가 시작되자 상대 측이 바로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재판장님, 유전자 검사 결과의 시료 채취 경위가 불명확합니다. 고인의 사망 이후에 채취된 시료라면, 누가, 언제, 어떤 방식으로 확보했는지 입증 책임이 있습니다.」
박태성의 목소리는 안정적이었습니다. 경험에서 나오는 침착함이었습니다.
박형준이 일어섰습니다.
「재판장님, 유전자 검사 시료는 박동식 회장의 생전에 이루어졌습니다. 박동식 씨 본인이 공증 사무소를 통해 자발적으로 시료를 제출했고, 검사 결과를 확인한 뒤 이를 공증했습니다. 해당 공증 원본을 을 제3호증으로 제출하겠습니다.」
방청석에서 미세한 웅성거림이 있었습니다. 박준혁은 표정 없이 앞을 바라봤습니다.
공증 서류는 결정적이었습니다. 상대 측의 절차적 이의는 첫 번째 공방에서 봉쇄됐습니다.
하지만 박태성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설령 친자 관계가 인정된다 하더라도, 상속권 인정 범위를 따져봐야 합니다. 박시온 씨는 법적으로 인지된 자녀가 아니었습니다. 인지 절차가 진행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상속권은 제한적입니다.」
박형준은 미리 준비한 판례집을 펼쳤습니다.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유전자 검사로 친자 관계가 인정된 경우 피상속인의 사망 후에도 인지 청구 소송을 통해 상속권이 소급 인정됩니다. 저희는 이미 인지 청구 소송을 병합 제기했습니다. 또한 민법 제일천 조 이항에 따라, 피상속인이 생전에 인지 의사를 공증한 경우 이는 인지 효력과 동일하게 해석됩니다.」
그것은 준비된 반박이었습니다. 상대가 어떤 논리로 나올지 미리 예측하고, 그 논리를 막을 판례를 찾아둔 것이었습니다.
재판부의 수석 판사가 안경을 고쳐 쓰며 서류를 넘겼습니다.
첫 번째 심리는 두 시간 삼십 분 만에 마무리됐습니다. 결정적인 결론은 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재판의 흐름은 박형준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습니다. 박태성은 서류를 정리하면서 박형준을 다시 봤습니다. 이번에는 조금 다른 눈빛이었습니다.
법정 밖 복도에서 박준혁이 박형준의 앞을 막았습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한 발씩 물러섰습니다.
「변호사.」
박준혁의 목소리는 낮았습니다.
「이길 수 없는 싸움입니다. 박시온이 원하는 게 뭔지 알아요? 돈입니까? 그거면 따로 합의할 수 있습니다.」
박형준은 박준혁의 눈을 바라봤습니다. 오랫동안 권력과 맞서온 검사 출신 변호사의 눈이었습니다. 압박에 흔들리지 않는 눈.
「제 의뢰인이 원하는 것은 법적 인정입니다. 그리고 진실입니다. 그 두 가지는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박준혁의 표정이 굳었습니다. 그는 돌아서다 멈췄습니다.
「당신, 나중에 후회할 겁니다.」
박형준은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복도 끝에서 홍민희가 이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손에는 메모장이 들려 있었습니다.
법원 밖으로 나온 박형준에게 홍민희가 다가왔습니다.
「오늘 녹취 다 됐습니다. 박준혁이 복도에서 한 말도요.」
「그건 아직 쓰지 마세요.」
「알아요. 하지만 필요할 때를 위해 가지고 있겠습니다.」
두 사람은 법원 앞 계단에서 잠시 서 있었습니다. 부산의 11월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차갑고 습했습니다.
홍민희가 말을 이었습니다.
「그 전화, 추적했습니다. 씨씨티브이 복사본이 있다던 사람.」
박형준이 몸을 돌렸습니다.
「부두 노동자입니다. 남항 선착장 경비원. 이름은 정태식. 그날 밤 당직이었어요. 그런데 사흘 전부터 연락이 안 되고 있습니다.」
바람이 강해졌습니다. 멀리 영도 방향에서 안개가 몰려오고 있었습니다.
박형준의 눈이 가늘어졌습니다. 그 안개 속에 무언가가 숨어 있다는 것을 그는 직감적으로 느꼈습니다.
「찾아야 합니다. 그 사람.」
홍민희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정태식이 사라진 것이 우연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 제5장 】
배신의 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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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은 갑자기 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랫동안 준비되어 있습니다. 다만 당신이 눈치채지 못할 뿐입니다.
정태식은 사흘 뒤에 나타났습니다. 나타난 것이 아니라, 발견됐습니다.
부산 동구 범일동 소재 낡은 여관. 방 삼십이호. 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고, 여관 주인이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경찰이 문을 따고 들어갔을 때, 정태식은 침대 위에 의식을 잃은 채 쓰러져 있었습니다.
다행히 살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수면제가 다량 검출됐습니다. 스스로 먹었는지, 먹게 됐는지는 불분명했습니다.
홍민희가 제일 먼저 현장에 도착했습니다. 그녀의 취재원이 경찰 내부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응급 이송 직전의 정태식 옆에서 단 한 가지를 확인했습니다.
정태식의 바지 주머니 안에 유에스비 드라이브가 하나 있었습니다. 경찰 눈을 피해 그것을 사진으로 찍었습니다. 그리고 형사가 그것을 가져가기 전, 홍민희는 이미 빠져나와 있었습니다.
병원으로 이송된 정태식은 이틀 만에 의식을 회복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박형준이 병실을 찾아갔습니다. 정태식은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오십대 중반의 남자. 거칠어진 손, 굽은 어깨. 오래 부두에서 일한 사람의 몸이었습니다.
「무섭습니까.」
박형준의 첫 마디였습니다. 정태식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습니다.
「당연히 무섭죠.」
「누가 협박했습니까.」
정태식은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박형준은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습니다.
「당신이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당신이 본 것은 이미 기록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밝혀냅니다. 그 누군가가 당신 편인 게 낫겠습니까, 당신과 적대하는 게 낫겠습니까.」
정태식은 한동안 침묵했습니다. 그리고 입을 열었습니다.
「그날 밤, 열 시 이십 분쯤이었습니다. 저는 당직이었어요. 씨씨티브이 모니터 보다가 청해 요트 쪽에 사람 둘이 올라가는 걸 봤습니다. 회장님인 건 알았고요. 다른 한 명은 얼굴이 잘 안 보였지만, 체형이나 걸음걸이가 여자 같았어요.」
박형준의 손에서 펜이 움직였습니다.
「그 이후는요.」
「두 시간쯤 지나서, 그 여자가 혼자 내려오는 걸 봤습니다. 아무 일 없는 것처럼요. 그리고 새벽에 관리인이 신고를 한 거고요.」
「씨씨티브이 원본은 어떻게 됐습니까.」
「이틀 뒤에 확인하니까 덮어씌워져 있었습니다. 열흘치가 한꺼번에요. 시스템 오류라고 했는데, 저는 그런 오류 본 적 없었습니다. 그래서 미리 유에스비에 복사해뒀던 거고.」
박형준은 그 유에스비가 현재 경찰 손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홍민희가 찍어둔 사진이 있었습니다. 유에스비 일련번호. 제조사. 그것을 통해 원본 복구 가능성을 추적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이 있었습니다.
정태식이 말한 '여자'.
그날 밤 박동식과 함께 요트에 오른 사람. 그리고 혼자 내려온 사람.
박형준은 정태식과 헤어지면서 법적 진술 확보를 위한 절차를 안내했습니다. 진술 보호 신청도 함께 넣었습니다. 정태식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눈에 안도가 섞였습니다.
병원 복도에서 박형준은 홍민희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여자입니다. 그날 밤 함께 있던 사람.」
전화기 너머에서 홍민희가 잠시 침묵했습니다.
「한지영입니까.」
「아직 모릅니다. 하지만 확인할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그 시간, 동해해운 본사에서는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한지영이 검은 서류함의 사본을 들고 부산 지역 방송국 기자를 만났습니다. 단독 인터뷰 요청이었습니다. 조건은 단 하나. 오늘 밤 메인 뉴스에 내보낼 것.
방송국 기자는 흥분했습니다. 이것은 특종이었습니다. 차명 계좌, 해외 법인, 조직폭력배 연계. 하나하나가 폭탄이었습니다.
뉴스는 밤 여덟 시에 나갔습니다.
부산 전역이 들끓었습니다. 포털 실시간 검색어 상위권에 동해해운과 박동식이 올랐습니다. 국세청과 검찰이 즉각적인 입장을 요청받았습니다. 박준혁의 휴대폰에는 전화가 폭주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가장 큰 충격을 받은 사람은 박형준이었습니다.
홍민희가 연락을 해왔습니다. 한지영이 언론에 넘긴 서류 중에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박형준이 아직 보지 못한 문서.
그것은 박동식이 사망 일주일 전에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메모였습니다.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나는 준혁이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아이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아이가 무서워졌다. 나를 협박하는 것이 외부 사람이 아닐 수 있다.
박형준은 그 문장을 세 번 읽었습니다.
박동식을 협박한 사람이 외부가 아닐 수 있다.
그리고 그 의심의 대상은 장남 박준혁이었습니다.
상황이 역전되고 있었습니다. 가족 중 한 명이 요트에 있었다는 정태식의 진술. 박동식이 두려워했다는 메모. 씨씨티브이 덮어씌우기.
이것은 이제 상속 분쟁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살인 의혹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의혹의 중심에 박준혁이 있었습니다. 혹은 한지영이 있었습니다. 아니면, 두 사람 모두가.
【 제6장 】
검찰의 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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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권력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개인은 작아집니다.
부산 지방 검찰청 특수부가 동해해운에 압수수색 영장을 집행한 것은 뉴스 보도 이틀 후였습니다. 동해해운 본사, 박동식 회장의 자택, 그리고 박준혁의 개인 사무실이 동시에 수색됐습니다.
압수수색 당일 아침, 박형준은 특수부 담당 검사 이재훈을 만났습니다. 이재훈은 박형준의 검찰 시절 후배였습니다. 두 사람은 같은 기수가 아니었지만, 검찰 조직 특유의 선후배 문화 속에서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었습니다.
만남은 검찰청 구내 식당에서였습니다. 이재훈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선배님이 박시온 씨 측 변호를 맡으셨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검은 서류함의 원본이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박형준은 커피를 천천히 내려놓았습니다.
「영장 없이 변호인에게 그런 질문을 하는 건 적절하지 않습니다.」
이재훈이 약간 웃었습니다.
「선배님답습니다. 하지만 알아두십시오. 이번 수사는 조직 차원입니다. 박동식 개인의 세금 문제가 아닙니다. 연계된 정치인들, 조직폭력배, 금융 기관 복수의 공범 구조가 있습니다. 그 그물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잡힙니다.」
박형준은 잠시 이재훈을 바라봤습니다.
「박시온 씨는 피의자가 아닙니다.」
「지금은 그렇습니다.」
대화는 짧게 끝났습니다. 하지만 박형준은 이재훈의 마지막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수사가 확대되면, 가족 전체가 피의자 선상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박시온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압수수색 현장. 동해해운 본사 일층 로비는 검찰 수사관들로 가득 찼습니다. 직원들이 복도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수사관들은 서류 박스를 하나씩 들고 나왔습니다. 박준혁은 법무팀장과 함께 현장을 지켜봤습니다. 얼굴은 굳어 있었지만 눈은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계산하는 눈이었습니다.
압수된 서류 중에 무엇이 있고 무엇이 없는지를 따지고 있었습니다.
박형준은 압수수색 목록을 법적 경로로 확보했습니다. 검토하면서 한 가지를 발견했습니다. 검은 서류함의 원본 문서들이 목록에 없었습니다. 이미 이동됐거나, 처음부터 원본이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홍민희에게 연락했습니다.
「한지영이 언론에 넘긴 건 사본입니다. 원본은 어디 있습니까.」
홍민희는 빠르게 생각하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한지영에게 직접 물어야 합니다.」
한지영을 만난 것은 그날 오후였습니다. 해운대 소재 한 호텔 커피숍. 한지영은 단정한 검은 재킷을 입고 있었습니다. 표정은 평온했습니다. 하지만 그 평온함 아래 무언가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박형준은 느꼈습니다.
「원본 서류가 어디 있습니까.」
한지영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습니다.
「왜 변호사님이 그걸 알아야 합니까.」
「원본이 검찰 손에 들어가지 않으면, 수사의 중심이 가족 쪽으로 집중됩니다. 범죄수익 환수보다 공범 관계를 먼저 파고들겠죠. 당신도 포함해서요.」
한지영의 눈이 잠시 흔들렸습니다. 그것을 박형준이 보았습니다.
「원본은 안전한 곳에 있습니다. 저는 그것으로 협상할 계획입니다.」
「검찰과 협상합니까.」
「아니요. 박준혁과요.」
박형준은 그 대답이 예상 밖이었습니다. 잠시 정리했습니다.
한지영의 전략은 이러했습니다. 원본 서류를 카드로 쥐고 박준혁과 협상. 조건은 유류분 인정과 자신의 법적 안전 보장. 박준혁이 거부하면 검찰에 원본을 제출하겠다는 위협.
그것은 영리한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빠진 것이 있었습니다.
「박준혁이 당신의 협상 제안을 들어줄 이유가 없습니다. 당신이 원본을 검찰에 제출하면 박준혁도 당신도 함께 무너집니다. 그것은 상호 확증 파괴입니다. 그 균형은 언제든 깨질 수 있어요.」
한지영은 박형준을 바라봤습니다.
「그래서 변호사님은 저에게 뭘 원하십니까.」
「원본 서류를 저에게 주십시오. 법적 절차를 통해 박시온 씨의 상속권과 당신의 유류분을 동시에 보호하겠습니다. 그리고 검찰 수사에서 참고인으로 협조하는 조건으로 당신의 개인적 면책을 협의하겠습니다.」
한지영은 오랫동안 창밖을 바라봤습니다. 해운대 바다가 보였습니다. 늦가을의 파도가 조용히 밀려왔습니다.
그녀가 다시 박형준을 보았을 때, 눈빛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려야 할 게 있습니다.」
박형준은 몸을 앞으로 내밀었습니다.
「그날 밤 요트에 간 사람, 저 아닙니다. 하지만 누구인지는 알고 있습니다.」
바람이 창문을 두드렸습니다. 파도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습니다.
박형준은 천천히 숨을 들이켰습니다.
이 사건의 지형이 다시 한번 바뀌고 있었습니다.
【 제7장 】
법정의 두 번째 전쟁, 그리고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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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이 무기가 될 때, 그것을 쥔 손은 반드시 떨립니다.
한지영이 말한 이름은 홍성찬이었습니다.
동해해운 법무팀장. 박동식이 이십 년 동안 곁에 두고 신뢰해온 인물. 그리고 검은 서류함의 내용을 박동식 다음으로 가장 잘 알고 있던 사람.
한지영의 말에 따르면, 홍성찬은 박동식이 사망하기 일주일 전부터 따로 박동식을 만나왔습니다. 두 사람의 만남은 공식 일정에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박동식은 그 만남 이후 극도로 불안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한지영은 이것을 알았지만 말하지 않았습니다. 말할 경우 자신도 조사를 받게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박형준이 면책 가능성을 제시했습니다.
박형준은 즉시 홍민희에게 연락했습니다.
「홍성찬을 추적해주십시오. 서울 출장 간다고 했던 날부터 지금까지 동선 전부.」
홍민희는 오랜 취재 경험에서 쌓인 인맥을 총동원했습니다. 신용카드 사용 내역, 교통카드 기록, 통신사 기지국 접속 내역. 이 모든 것을 공식 루트로 얻을 수는 없었지만, 그녀는 정식 탐문과 비공식 제보를 병행했습니다.
이틀 후. 홍민희가 확보한 것은 홍성찬이 사망 당일 밤 부산에 있었다는 증거였습니다. 그는 서울 출장을 간다고 했지만, 그날 밤 남항 인근 주차장에서 그의 차량이 찍혔습니다. 민간 주차 관리 업체의 씨씨티브이였습니다. 경찰이 확인하지 않았던 각도의 카메라였습니다.
그리고 시간은 박동식의 사망 추정 시각 삼십 분 전이었습니다.
박형준은 이 증거를 검찰에 제출하기 전에 먼저 홍성찬을 만났습니다. 직접 대면이 필요했습니다. 도망갈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 변호사 자격으로 면담을 신청했습니다.
홍성찬은 서울에 있는 자택에서 경호원과 함께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만남은 거부했습니다. 하지만 박형준은 다른 방법을 썼습니다. 검찰 측 이재훈에게 홍성찬을 참고인으로 소환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법적 소환 거부는 불가능했습니다.
참고인 조사는 부산 지방 검찰청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박형준은 변호인 자격으로 조사실 밖에서 대기했습니다. 대신 홍민희가 확보한 모든 자료를 이재훈에게 전달했습니다.
홍성찬은 조사에서 두 시간 동안 모든 것을 부인했습니다. 그날 밤 부산에 없었다고. 씨씨티브이는 다른 차량이라고. 박동식과의 만남은 정상적인 업무 협의였다고.
그러나 이재훈은 주차장 씨씨티브이 화면을 들이밀었습니다. 번호판. 홍성찬 본인 명의의 차량이었습니다.
그 순간 홍성찬의 태도가 변했습니다. 그는 조용히 한 마디를 내뱉었습니다.
「변호사를 선임하겠습니다.」
그것은 자백의 전 단계였습니다.
사흘 후, 부산 가정법원에서 상속 소송 2차 심리가 열렸습니다. 이번에는 방청석이 꽉 찼습니다. 언론이 몰려왔습니다. 홍민희의 독립 언론 플랫폼 해안선은 이미 수만 명의 구독자를 새로 확보했습니다.
박형준은 이번 심리에서 결정적인 카드를 꺼낼 준비를 했습니다.
상대 측 박태성 변호사는 여전히 침착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이전에 없던 긴장이 보였습니다. 사건이 예상보다 훨씬 복잡해졌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습니다.
심리가 시작되자 박준혁 측은 새로운 주장을 제기했습니다. 박동식의 정신 상태 이상. 사망 전 수개월간 인지 능력이 저하됐으며, 공증 서류는 그 상태에서 작성됐을 수 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박형준은 그것을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재판장님, 상대 측이 주장하는 정신 능력 저하 주장에 대해 반박 증거를 제출하겠습니다. 박동식 씨는 사망 이 주일 전까지 정상적인 경영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이사회 회의록, 외부 투자자와의 이메일 기록, 그리고 사망 삼 일 전 직접 작성한 메모가 있습니다. 메모의 내용과 필체는 명확합니다. 감정 의뢰 결과도 첨부했습니다.」
박형준의 서류 제출은 체계적이었습니다. 하나를 막으면 다른 것이 뒤따라 왔습니다. 상대의 주장이 나오기 전에 이미 그것을 무력화할 자료를 준비해두는 방식. 검사 시절부터 갈고닦은 전략이었습니다.
그 순간, 법정 문이 열렸습니다.
홍성찬이 검찰 수사관과 함께 들어왔습니다. 그는 이미 피의자 신분으로 전환되어 있었습니다. 재판부가 이 사실을 확인하고 심리를 잠시 중단시켰습니다.
법정이 술렁였습니다. 박준혁의 표정이 처음으로 흔들렸습니다.
박형준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재판장님, 박동식 씨의 사망과 관련하여 검찰이 추가 수사를 진행 중입니다. 이 재판의 상속 결정과 직접 연관될 수 있는 사실이 발견됐습니다. 이에 저는 재판부에 수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심리 잠정 중단을 요청드립니다. 동시에, 피상속인의 사망 경위에 따라 상속권 판단 기준 자체가 달라질 수 있음을 기록에 남겨주십시오.」
법정에 침묵이 흘렀습니다.
재판장은 서류를 내려놓고 안경을 벗었습니다. 그리고 양쪽 변호인을 번갈아 바라봤습니다.
「잠정 중단을 인용합니다. 두 주 후 속행합니다.」
박준혁이 변호인에게 뭔가를 속삭였습니다. 박태성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표정이 굳어 있었습니다.
홍민희는 방청석에서 모든 것을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 해안선 플랫폼에 기사를 올렸습니다.
제목은 이것이었습니다.
동해해운 법무팀장, 박동식 회장 사망 당일 밤 현장 인근 포착. 검찰 피의자 전환.
그 기사가 올라간 지 두 시간 만에 조회수가 백만을 넘었습니다.
부산은 흔들렸습니다. 그리고 서울도 흔들렸습니다.
【 제8장 】
아버지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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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이미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다만 우리가 찾지 못했을 뿐입니다.
홍성찬은 결국 입을 열었습니다.
검찰 조사실에서 그가 진술한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그는 박동식의 지시로 오랫동안 차명 계좌와 해외 법인을 관리해왔습니다. 그것은 처음에 단순한 절세였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규모가 커졌고, 조직폭력배 자금까지 끼어들었습니다. 홍성찬은 거기서 멈추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너무 깊이 들어왔습니다.
문제가 생긴 것은 박동식이 박시온의 존재를 공식화하려고 했을 때였습니다. 박동식은 죽기 전에 모든 것을 정리하고 싶어 했습니다. 차명 계좌를 정리하고, 박시온에게 법적 인정을 해주고, 나머지 가족에게도 일정 부분을 남겨주는 방식으로.
하지만 그 정리 과정에서 홍성찬이 혼자 빼돌린 돈이 드러날 위기에 처했습니다. 박동식이 모르는 돈. 홍성찬이 이십 년간 중간에서 착복해온 금액이었습니다.
홍성찬은 박동식에게 시간을 달라고 했습니다. 정리를 도와주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증거를 없애는 시간을 벌고 있었습니다.
사망 당일 밤, 홍성찬은 박동식을 만났습니다. 요트 위에서. 그 만남은 처음에 협의였습니다. 하지만 박동식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홍성찬이 깨달았을 때, 상황이 변했습니다.
「저는 밀지 않았습니다. 다투다가 그분이 갑자기 쓰러졌습니다. 정말입니다.」
홍성찬의 목소리가 떨렸습니다.
「하지만 저는 구조 요청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 않은 겁니다.」
그것이 진실이었습니다. 살인이 아니라 방관. 구조하지 않은 죄. 하지만 법적으로 그것은 가중적 결과를 낳을 수 있는 범죄였습니다.
검찰은 홍성찬을 살인방조 및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 위반으로 기소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시간, 박시온의 방에서는 다른 일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박시온은 오래된 외장 하드 드라이브를 꺼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그에게 남긴 것이었습니다. 거기에는 파일 하나가 있었습니다.
파일 이름은 이러했습니다. '동식에게, 2021년 봄'.
박시온은 그것을 열지 않았습니다. 오래되어 열리지 않는 파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복구 작업을 통해 마침내 영상 파일이 열렸습니다.
그것은 박동식이 직접 찍은 영상이었습니다.
화면 속 박동식은 늙어 보였습니다. 영도 선착장이 배경에 있었습니다. 그가 젊은 시절 처음 일을 시작한 곳.
그는 카메라를 직접 들고 혼자 말했습니다. 누군가에게 남기는 메시지처럼.
「시온아. 내가 이걸 보낼 용기가 있을지 모르겠다. 아마 없을 것 같아서 파일로 남긴다. 네 어머니가 가져가도록 부탁했어.」
「나는 가난한 선원이었다. 이 항구에서 열다섯 살부터 일을 시작했어. 먹을 것도 없었고, 잘 곳도 없었어. 그래서 나는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했다. 그 과정에서 내가 한 일들은... 옳지 않았어.」
「돈이 많아질수록 나는 더 많이 잃었어. 정직하게 벌 수 없다는 걸 처음 깨달았을 때 이미 늦어 있었어. 그때는 멈추는 것이 더 위험했거든.」
「준혁이는 나를 닮았어. 너무 닮아서 무서워. 그 아이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것 같아. 나처럼. 그게 제일 두려워.」
「나는 가족을 지키려 했지만 결국 돈 때문에 모두를 망쳤다. 시온아, 미안하다. 네가 원하는 게 있으면, 진실이라면, 그것만은 줄 수 있어. 이 파일에 내가 아는 모든 것을 남겨뒀다. 필요하다면 써라.」
영상은 거기서 끝났습니다.
박시온은 오랫동안 화면을 바라봤습니다. 그의 눈에 눈물이 고였습니다. 하지만 흘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카메라를 들었습니다. 자신의 카메라로 그 화면을 다시 찍었습니다. 그리고 속삭이듯 말했습니다.
「이걸로 만들겠습니다.」
며칠 뒤, 박형준은 법원에 새로운 자료를 제출했습니다. 박동식의 자필 영상 진술과 외장 하드 드라이브에 담긴 자료 전체. 여기에는 홍성찬의 횡령 기록, 차명 계좌의 실제 소유 구조, 그리고 박동식이 생전에 박시온에게 남기려 했던 자산 분배 계획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박형준은 법정에서 마지막 최후 진술을 준비하면서 한 가지를 정리했습니다.
이 사건에서 악인은 누구인가.
홍성찬은 분명히 죄를 지었습니다. 하지만 박동식도 죄가 없지 않았습니다. 박준혁도 자료를 없애려 했습니다. 한지영도 협상에 서류를 이용했습니다.
그러나 박시온은 단 하나를 원했습니다. 진실.
그것이 변호인으로서 박형준이 보호해야 할 것이었습니다.
최종 심리일, 박형준이 법정에서 마지막 발언을 했습니다.
「재판장님. 이 사건은 상속 소송으로 시작됐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판단해야 할 것은 단순히 재산 분배가 아닙니다. 박시온 씨는 아버지로부터 버려졌습니다.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 아버지가 남긴 마지막 말은 인정이었습니다. 법은 그 말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유전자는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공증 서류는 명확합니다. 그리고 고인의 영상 진술은 법적 효력을 가집니다. 박시온 씨의 상속권을 인정해주시기 바랍니다.」
법정에 침묵이 흘렀습니다.
재판장은 안경을 고쳐 쓰고 오랫동안 서류를 바라봤습니다.
그리고 판결 선고일, 부산 가정법원은 박시온의 친자 인지 및 상속권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박준혁은 항소하지 않았습니다. 항소할 명분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미 검찰 수사로 동해해운 자체가 흔들리고 있는 상황에서 더 이상의 법정 싸움은 득이 없었습니다.
한지영은 유류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검찰 수사에서 참고인 협조로 처벌을 피했습니다.
홍성찬은 기소되어 재판을 받게 됐습니다.
그리고 박시온은 그 모든 과정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 에필로그 】
여섯 달 뒤, 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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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도 선착장에 봄이 왔습니다.
조선소에서는 여전히 불꽃이 튀었고, 바람에는 아직 소금기가 남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겨울보다는 가벼운 공기였습니다.
박시온의 다큐멘터리 '검은 서류함'이 온라인에 공개된 것은 봄이 시작되던 무렵이었습니다. 러닝타임 두 시간 사십 분. 아버지의 고백 영상으로 시작해서, 재판 과정, 검찰 수사, 그리고 해운 노동자들의 이야기로 끝나는 다큐멘터리였습니다.
공개 이틀 만에 조회수는 천만을 넘겼습니다. 댓글에는 눈물이 있었고, 분노가 있었고, 그리고 박동식이라는 인물에 대한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었습니다.
나쁜 사람이었지만, 끝에 가서는 진실을 남기려 했던 사람.
홍민희는 그 다큐멘터리를 보고 기사 하나를 썼습니다. 제목은 이러했습니다.
한 남자의 죽음이 드러낸 것들. 우리는 무엇을 바꿀 것인가.
그 기사는 국회 국정감사에서 인용됐습니다. 해운업계 비자금 및 조세회피 관련 특별법 제정 논의로 이어졌습니다.
박형준은 서울로 돌아갔습니다. 로펌의 회의실에서 다음 사건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의뢰인. 새로운 사건. 그는 언제나 그랬듯이 수첩을 꺼내 첫 메모를 시작했습니다.
그의 수첩 맨 앞장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습니다.
법은 가장 약한 사람의 편에서 설 때 가장 강해진다.
그것은 검사였을 때 처음 썼던 문장이었습니다. 변호사가 된 지금도 그것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동해해운은 구조조정 끝에 새 경영진 체제로 전환됐습니다. 박준혁은 모든 직위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는 해외로 떠났습니다. 어디로 갔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박시온은 부산에 남았습니다. 두 번째 다큐멘터리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조선소 노동자들의 이야기. 아버지에게서 받은 돈 일부를 제작비로 썼습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어머니가 오랫동안 일했던 부산의 작은 NGO에 기부했습니다.
영도 선착장. 박시온은 카메라를 들고 바다를 바라봤습니다. 아버지가 처음 일을 시작했다는 그 부두.
바람이 불었습니다.
파도가 밀려왔다 물러났습니다.
카메라가 돌아갔습니다.
검은 서류함은 법원 증거물 창고에 있었습니다. 안에는 여전히 숫자들이 있었습니다. 그 숫자들이 담은 것은 돈이 아니었습니다. 욕망이었습니다.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리고 너무 늦게 찾아온 후회였습니다.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하지만 기록은 남습니다.
진실은 항상 어딘가에 있습니다. 서류함 안에, 영상 파일 안에, 혹은 오래된 항구 도시의 바람 속에.
그리고 그것을 찾는 사람이 있는 한, 사라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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