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장. 붕괴의 전야
서울 마포구 상암동의 스타트업 허브 건물은 밤이 깊어도 불이 꺼지지 않는 곳입니다.
스물두 개 층 가운데 열세 개 층에 입주한 기업들이 저마다의 꿈을 태우며 자정을 넘기던 그날 밤, 열한 번째 층 가장 안쪽 사무실에서는 한 남자가 모니터 세 대를 앞에 두고 홀로 앉아 있었습니다. 사무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직원들은 이미 네 시간 전에 귀가 지시를 받았고, 외부인 출입을 막는 보안 잠금 장치는 그가 직접 설정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김동민이었습니다.
서른여섯 살. 대한민국 최상위권 이공계 대학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신호처리 이론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졸업 후에는 국방과학연구소에 입소해 전자전 분야에서 칠 년을 보냈습니다. 적의 레이더를 교란하고, 유도탄의 항법 신호를 왜곡시키며, 통신 체계를 무력화하는 기술. 총 한 방 쏘지 않고 전장의 흐름을 바꾸는 보이지 않는 전쟁의 기술. 그것이 그가 평생 파고든 세계였습니다.
연구소를 나온 것은 서른두 살이었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조직은 너무 느렸고, 관료주의는 너무 두꺼웠습니다. 그가 개발한 신형 전파 간섭 알고리즘은 심사 기간만 삼 년이 넘었고, 최종 결재를 받기까지 열두 개 부서의 도장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 사이에 해외 경쟁국은 이미 두 세대 앞선 기술을 실전 배치했습니다. 그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습니다.
창업은 퇴직 후 열한 달 만에 이루어졌습니다. 회사 이름은 '에어로가드테크'. 전자전 시스템 분야의 기술 스타트업이었습니다. 초기 자본은 본인 퇴직금과 지인들의 엔젤 투자, 그리고 중소기업 기술 개발 지원 사업의 정부 보조금으로 충당했습니다. 직원은 다섯 명으로 시작했고, 창업 이 년 만에 열여덟 명으로 늘었습니다. 그들 중 열세 명이 국방 관련 연구기관 또는 방산 대기업 출신이었습니다. 김동민이 직접 찾아다니며 영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창업 삼 년째 되던 해, 에어로가드테크는 대한민국 방위산업청이 공고한 차세대 전자전 시스템 개발 사업의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되었습니다.
사업 규모는 총 이천사백억 원.
국내 방위산업 사상 스타트업이 단독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언론은 '방산의 역사를 새로 쓴 작은 거인'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쏟아냈고, 업계 전문가들은 에어로가드테크가 보유한 원천 기술의 독창성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김동민은 인터뷰 요청을 모두 정중히 거절하며 기술 개발에만 집중했습니다.
그것이 여섯 달 전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모니터 세 대를 앞에 앉아 있는 그의 표정에는 환희도, 긍지도 없었습니다. 오직 가늘고 차가운 분노만이 창백한 얼굴 위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모니터 가운데 화면에는 한 문서가 띄워져 있었습니다. 방위산업청이 그날 오후 네 시에 공식 발표한 보도자료였습니다. 제목은 이러했습니다.
『차세대 전자전 시스템 개발 사업, 우선협상대상자 변경 통보 — 에어로가드테크에서 한성방산그룹 주식회사로 변경』
그는 문서를 읽지 않았습니다. 이미 열일곱 번을 읽은 뒤였습니다. 그가 바라보는 것은 문서의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여섯 달 전 에어로가드테크가 제출했던 기술 제안서의 핵심 도면 파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옆 화면에는 오늘 오전, 한 방산 전문지 기자가 제보를 통해 전달해온 한성방산그룹의 내부 개발 문서 사본이 열려 있었습니다.
두 문서 사이의 유사성은 우연으로 설명하기 불가능한 수준이었습니다.
신호 분리 알고리즘의 구조, 주파수 적응 제어 로직의 설계 방식, 복수 표적 동시 교란 처리 흐름. 에어로가드테크가 사 년에 걸쳐 개발한 독자 기술의 심장부였습니다. 특허 출원 번호도 달랐고, 세부 수치도 일부 바뀌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구조의 뼈대는 같았습니다. 마치 원본 설계도를 보고 다시 그린 것처럼.
김동민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습니다. 천장을 바라보았습니다.
사무실 안은 완전히 조용했습니다. 건물 바깥으로는 한강변을 달리는 차들의 소음이 희미하게 들려왔습니다. 그는 눈을 감지 않았습니다. 눈을 감으면 이 모든 것이 사라질 것 같은 두려움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정반대의 감각이었습니다. 눈을 감는 순간, 사라져야 할 것들이 도리어 더 선명하게 보일 것 같은 예감이었습니다.
그는 서랍을 열었습니다. 안에는 봉투 하나가 들어 있었습니다. 두 주 전 익명으로 배달된 봉투였습니다. 내용물은 단 두 장. 첫 번째 장에는 특정 날짜와 파일 전송 기록의 로그가 인쇄되어 있었습니다. 두 번째 장에는 손으로 쓴 짧은 문장이 있었습니다.
『당신의 설계도는 심사 기간 중에 이미 유출되었습니다. 제보자를 보호해 줄 수 있다면, 연락하십시오.』
그는 그 봉투를 받은 날부터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제보자를 찾는 것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회사 내부 보안 시스템의 접근 로그를 전수 점검했습니다. 외부 협력 기관과의 데이터 공유 이력을 하나씩 확인했습니다. 방위산업청에 제출했던 기술 자료의 열람 권한 부여 내역도 검토했습니다.
그리고 닷새째 되던 밤, 그는 하나의 이상한 접속 기록을 발견했습니다.
심사 기간 중, 정확히 두 달 전 목요일 새벽 두 시 십칠 분. 에어로가드테크의 내부 기술 문서 서버에 접속한 기록이 있었습니다. 접속에 사용된 계정은 내부 직원 계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접속 위치는 사무실 내부 아이피가 아니었습니다. 외부 브이피에엔 주소를 경유한 것이었으며, 그 경유지는 세 개국을 거쳐 있었습니다. 그리고 접속한 계정의 직원은 그 시각에 해외 출장 중이었습니다.
김동민은 그 직원의 이름을 오래 바라보았습니다.
이창호. 서른한 살. 에어로가드테크 기술전략팀 선임 연구원. 김동민이 사 년 전 직접 영입한 사람이었습니다. 동생처럼 아꼈던 사람이었습니다. 기술 개발의 절반 이상을 함께 밤을 새우며 진행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 이름을 지우지 않았습니다.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 밤, 그는 처음으로 변호사를 찾기로 결심했습니다. 법정을 선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마지막 수단이었습니다. 법보다 진실이 먼저라고 그는 믿었습니다. 그러나 진실만으로는 아무것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이제 알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책상 한켠에 놓인 명함 하나를 손에 들었습니다.
석 달 전, 한 업계 세미나에서 받은 명함이었습니다. 짧게 인사를 나눈 뒤 별다른 인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명함에 적힌 이름 옆에는 작은 글씨로 이런 설명이 있었습니다.
『기술 탈취 소송 전담. 기업 지식재산권 분쟁 전문 변호사.』
이름은 박성희였습니다.
제2장. 냉혹한 조력자
박성희는 서른아홉 살이었습니다.
그녀가 앉아 있는 사무실은 광화문 대형 오피스 빌딩의 이십사 층에 있었습니다. 대형 로펌 '한길법률사무소'의 파트너 변호사로 재직한 지 이 년째였습니다. 그 전에는 국내 최대 규모의 로펌에서 팔 년을 보냈고, 팔 년 중 사 년은 기술 탈취 분쟁 전담팀에서 일했습니다. 담당한 소송만 마흔세 건. 그중 서른여덟 건을 원고 측 완전 승소 또는 피고 측 합의 유도로 마무리했습니다. 업계에서는 '기술 사건의 저승사자'라는 별명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녀는 별명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저승사자란 이미 죽은 것을 거두는 존재였습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죽기 전에 막는 것이었습니다.
서울대 법학부를 수석에 가까운 성적으로 졸업하고, 사법연수원을 마친 뒤 처음 맡은 사건이 바로 기술 탈취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의뢰인은 작은 소프트웨어 개발사 대표였고, 상대방은 국내 굴지의 대기업이었습니다. 패소했습니다. 증거가 부족했고, 기술 감정 기준도 불명확했으며, 법원은 대기업이 제출한 자체 개발 증거를 신뢰했습니다. 의뢰인은 소송 비용을 감당하지 못하고 폐업했습니다.
박성희는 그 의뢰인의 마지막 얼굴을 아직도 기억했습니다. 판결문을 받아 든 날, 법원 복도에서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울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판결문을 조용히 접어 가방에 넣고, 돌아서서 걸어갔습니다. 그 등이 복도 끝에서 사라지기까지, 박성희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그날 이후 그녀는 기술 분쟁 사건에 집착하기 시작했습니다. 기술 감정 기준의 허점을 파고들었고, 디지털 포렌식 전문가들과 협업 체계를 구축했습니다. 특허법과 영업비밀보호법의 경계를 누구보다 정밀하게 공부했습니다. 승소율이 높아질수록 그녀의 의뢰 비용도 올랐고, 대형 로펌의 스카우트 제안도 늘었습니다. 그녀는 그 제안들을 받아들이면서도 한 가지 원칙을 유지했습니다. 대기업을 상대로 한 중소기업 또는 스타트업의 기술 분쟁 사건을 최우선으로 수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김동민이 처음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박성희의 첫인상은 '이 사람은 분노를 너무 잘 억제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정중하게 인사를 했고, 자료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왔으며, 목소리는 차분했습니다. 그러나 박성희는 오랜 경험으로 훈련된 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눈으로 보면, 김동민의 손이 테이블 위에서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이 보였습니다. 눈 아래에는 며칠 치 잠을 못 잔 흔적이 역력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자료를 꺼내는 순간, 가방 속에서 익명 제보 봉투가 살짝 보였습니다.
그녀는 자료를 하나씩 검토했습니다. 오 분이 지났습니다. 십 분이 지났습니다. 삼십 분이 지나도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김동민은 기다렸습니다. 조급하게 설명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인내심이 박성희의 두 번째 인상이었습니다.
박성희가 마침내 입을 열었을 때, 그녀의 말은 위로가 아니었습니다.
"이 사건을 맡으면, 저는 당신 편이 아닐 수 있습니다."
김동민은 미간을 좁혔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진실입니다. 진실이 당신에게 불리하면, 저는 그것도 당신에게 말합니다. 법적으로 유리한 방향만 찾아드리는 변호사가 필요하시다면, 저는 맞지 않습니다."
김동민은 잠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을 찾아온 겁니다."
박성희는 자료를 다시 한 번 훑어보았습니다. 서버 접속 로그. 파일 전송 기록. 익명 봉투 사본. 그리고 두 문서 사이의 기술적 유사성 분석 자료. 그녀는 속으로 계산했습니다.
이 사건은 단순하지 않았습니다. 표면적으로는 기술 탈취 의혹이었지만, 그 아래에는 여러 층위가 겹쳐 있었습니다. 내부자의 개입 가능성. 방위산업청 심사 과정의 절차적 하자. 대기업이 어떤 경로로 유사 기술을 확보했는가의 문제. 그리고 우선협상대상자 변경이라는 행정 처분의 적법성 문제.
민사 소송 하나로 끝날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형사 고발이 수반될 가능성이 높았고, 행정 소송 또한 병행해야 할 수 있었습니다. 피고 측인 한성방산그룹은 국내 방산 업계 2위 규모의 대기업이었습니다. 법무팀만 해도 사십 명이 넘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박성희가 자료에서 발견한 한 가지는 그녀의 계산을 멈추게 만들었습니다.
서버 접속 로그의 타임스탬프.
새벽 두 시 십칠 분. 그 시각의 접속은 흔치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접속 지속 시간이었습니다. 그 계정이 서버에 접속해 있었던 시간은 단 사 분 이십삼 초였습니다. 사 분 이십삼 초. 전문적인 기술 문서를 검토하거나 복사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파악하고 있는 특정 파일의 위치를 알고 직접 접근해 다운로드만 한다면,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해킹이 아니었습니다. 내부 구조를 알고 있는 사람이 관여했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이창호인지 아닌지는, 아직 알 수 없었습니다.
박성희는 파일을 덮었습니다.
"수임하겠습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김동민은 기다렸습니다.
"제가 조사하는 과정에서 발견되는 모든 사실에 대해, 당신은 감정적으로 반응하기 전에 제게 먼저 확인해야 합니다. 이 사건은 속도보다 정확성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창호 씨에 대한 접근은, 제가 허가할 때까지 절대로 하지 마세요."
김동민의 얼굴이 굳었습니다.
"그를 아직 배신자라고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가 사건의 핵심 증인이 될 수도 있고, 피해자일 수도 있으며, 공범일 수도 있습니다. 당신이 먼저 움직이면, 세 가지 가능성이 모두 사라집니다."
김동민은 한참 동안 창밖을 바라보았습니다. 광화문 광장에는 저녁 출퇴근 인파가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숨을 한 번 깊게 들이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박성희는 그제야 서랍에서 수임 계약서를 꺼냈습니다. 그리고 계약서 뒤에는 직접 작성한 한 장의 체크리스트가 붙어 있었습니다.
긴급 디지털 포렌식 의뢰. 방위산업청 기술 심사 절차 정보공개 청구. 한성방산그룹 관련 특허 출원 타임라인 분석. 이창호 행적 조사 위임. 언론 대응 가이드라인 수립. 그리고 마지막 항목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제보자 신원 파악. 보호 방안 선행 확보 후 접촉.』
김동민은 그 체크리스트를 보며 처음으로 표정이 조금 풀렸습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 이제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이 여자가 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날 밤 박성희는 자정이 훨씬 넘도록 사무실에 남아 있었습니다. 조수처럼 일하는 이 년 차 변호사 장수아에게 포렌식 전문업체 목록을 정리하도록 지시하고, 본인은 방위산업청 홈페이지에서 기술 심사 위원 구성 공고문을 하나씩 내려 받았습니다. 그리고 한성방산그룹의 최근 이 년간 특허 출원 내역을 열람하기 시작했습니다.
두 시간 뒤, 그녀는 화면 속에서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하고 손을 멈추었습니다.
한성방산그룹이 이 년 전 출원한 특허 하나. 전자전 시스템 관련 신호 처리 방법 특허였습니다. 출원 일자는 에어로가드테크가 방위산업청에 기술 제안서를 제출하기 정확히 열한 달 전이었습니다. 그러나 해당 특허의 발명자 명단에는 낯선 이름이 하나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창호.
박성희는 잠시 눈을 감았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습니다.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혼자였지만, 그녀는 분명히 말했습니다.
"이건 시작부터 설계된 것이다."
제3장. 파열
이창호는 그 연락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박성희의 사무실에서 연락이 온 것은 에어로가드테크 측의 수임 선언으로부터 열흘이 지난 뒤였습니다. 전화는 직접적이었습니다. 만남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질문 하나를 던지는 전화였습니다.
"이 년 전에 한성방산그룹 명의로 출원된 특허에, 당신 이름이 공동 발명자로 올라가 있습니다. 알고 계십니까?"
이창호는 삼 초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삼 초가 박성희에게는 모든 것을 말해 주었습니다.
"모릅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직접 확인하시겠습니까?"
또 다른 침묵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이창호는 전화를 끊었습니다.
박성희는 통화 종료음을 들으며 의자에 등을 기댔습니다. 이창호의 반응은 세 가지 해석이 가능했습니다. 첫째, 그가 진짜로 몰랐다면, 누군가가 그의 이름을 도용한 것입니다. 둘째, 그가 알았지만 잊고 있었다면, 이미 관여된 상태에서 거리를 두려 한 것입니다. 셋째, 그가 알고 있었고 시치미를 뗀 것이라면, 이 사건의 설계에 그가 깊이 개입된 것입니다.
세 가지 가능성 모두에서 이창호는 이미 사건의 핵심에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이틀 뒤, 이창호가 직접 박성희의 사무실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키가 크고 마른 체형이었습니다. 검은 패딩 점퍼를 입고 야구 모자를 깊게 눌러썼습니다. 눈이 충혈되어 있었고, 면도를 이틀은 하지 않은 듯했습니다. 박성희를 보자마자 그는 먼저 말했습니다.
"저도 피해자입니다."
박성희는 그를 자리에 앉히고 물 한 잔을 내밀었습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창호는 물을 마시지 않았습니다. 그는 테이블 위에 스마트폰을 놓았습니다. 화면에는 이메일 하나가 열려 있었습니다.
"일 년 반 전입니다. 한성방산그룹 기술기획팀에서 이메일이 왔습니다. 에어로가드테크 재직 중이었을 때입니다. 자문 요청이었습니다. 전자전 기술 분야의 시장 동향과 기술 트렌드에 대한 의견서를 작성해주면 사례비를 지급하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법률적으로 문제가 없는지 몰랐습니다. 에이아이 시장 분석이나 기술 트렌드 분석 정도는 자문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셨습니까?"
"했습니다. 두 번. 첫 번째는 문서로 제출했습니다. 두 번째는 영상 통화로 진행했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그 외에는 아무런 정보도 제공하지 않았고, 에어로가드테크의 기술 문서에는 손도 대지 않았습니다."
박성희는 그의 눈을 직접 바라보았습니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의 눈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었습니다. 이창호의 눈에는 공포가 있었습니다. 거짓말하는 사람의 공포가 아니라,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에 의해 묶여 있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의 공포였습니다.
"그 자문 내용에 에어로가드테크 기술의 구체적인 설명이 포함되었습니까?"
이창호는 잠시 멈추었습니다. 그 멈춤이 박성희의 눈에 날카롭게 들어왔습니다.
"...포함되지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작성한 기술 트렌드 분석에, 에어로가드테크가 연구 중인 방향성이 간접적으로 반영되어 있었을 수는 있습니다."
"간접적으로."
"예."
박성희는 잠시 눈을 내리깔았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이창호 씨, 저는 지금 당신을 조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당신이 지금 이 자리에서 저에게 한 모든 말은, 이후 법정에서 당신의 진술과 대조될 수 있습니다. 그 사실을 인지하고 말씀하고 계십니까?"
이창호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래서 왔습니다."
박성희는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습니다.
"새벽 두 시 십칠 분, 해외 출장 중 당신 계정으로 에어로가드테크 서버에 접속한 기록이 있습니다."
이창호는 얼굴이 굳었습니다. 그리고 눈 아래가 미세하게 떨렸습니다.
"저는 그 시각에 접속하지 않았습니다."
"당신 계정입니다."
"저는 접속하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긴 침묵이 흘렀습니다. 박성희는 그 침묵을 깨지 않았습니다. 침묵은 증거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침묵 속에서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알고 있는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를 드러냈습니다.
이창호가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제 계정 비밀번호가 도용된 것이라면... 그것도 누군가 계획적으로 한 것입니다."
"누가 당신의 계정 정보를 알 수 있었겠습니까?"
이창호는 오래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습니다.
"한성방산그룹과 자문 진행 중에, 그쪽에서 협업 문서 플랫폼 계정 연동을 요청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임시로 접근 허용을 했습니다. 그때 뭔가 가져갔을 수도 있습니다."
박성희는 눈을 감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의 표정에는 어떤 감정도 없었습니다.
"이창호 씨, 오늘 하신 말씀을 전부 서면으로 작성해 주세요. 법무팀에 전달하겠습니다."
이창호는 일어서려다 멈추었습니다.
"김동민 대표님은... 저를 배신자로 보고 있습니까?"
박성희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말했습니다.
"그것은 제가 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닙니다."
이창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사무실을 나갔습니다. 그의 등이 문 밖으로 사라지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습니다.
박성희는 그제야 깊은 숨을 내쉬었습니다.
이창호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오랜 경험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를 무고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지는 않았습니다.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사람은 범죄의 부품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녀가 진짜 걱정하는 것은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만약 이창호의 계정이 도용된 것이라면, 그 도용은 매우 정교한 것이었습니다. 에어로가드테크 서버 구조를 알고 있는 사람이 관여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정교함은, 단순히 한성방산그룹의 기술기획팀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박성희는 디지털 포렌식 업체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오늘 안에 착수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전화를 끊은 뒤, 사무실 창밖을 바라보았습니다.
광화문 광장에는 한 무리의 시위대가 피켓을 들고 서 있었습니다. 무엇을 요구하는 것인지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피켓을 든 손들이, 박성희에게는 어떤 진실을 향해 뻗어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어느 방향인지도 모른 채.
제4장. 법정의 서막
소장 접수는 에어로가드테크가 수임 계약을 맺은 지 삼 주 뒤에 이루어졌습니다.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 합의부에 제기된 소송의 정식 사건명은 이러했습니다. 『영업비밀 침해 및 부정경쟁행위 금지 청구 등에 관한 소』. 피고는 한성방산그룹 주식회사였습니다.
동시에,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는 한성방산그룹 임직원 수 명을 대상으로 한 형사 고발장이 접수되었습니다. 『산업기술의 유출방지 및 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 이 두 건의 서류가 접수되던 날 아침, 에어로가드테크의 법적 조치 사실이 언론에 동시 다발적으로 알려졌습니다.
박성희의 설계였습니다.
언론 공개는 전략이었습니다. 한성방산그룹의 규모라면, 소송 초기에 에어로가드테크를 무력화하려 할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합의 압박, 회사 신용도 공격, 핵심 인력 이탈 유도 등 여러 방면으로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그것을 막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공론화였습니다. 언론이 사건을 주목하는 순간, 한성방산그룹은 노골적인 압박을 가할 수 없게 됩니다. 그것이 박성희의 계산이었습니다.
그러나 계산에는 부작용이 있었습니다.
언론이 사건을 보도하기 시작하면서, 한성방산그룹의 주가가 하루 만에 팔 퍼센트 하락했습니다. 소액 주주들이 불안해하기 시작했고, 증권 시장 분석가들은 방산 계약 취소 가능성을 언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방위산업청이 입장을 발표했습니다.
『당사 청은 현재 진행 중인 민사 및 형사 절차와 별개로, 차세대 전자전 시스템 개발 사업의 정상적인 추진을 계속합니다. 우선협상대상자 변경은 적법한 절차에 따라 이루어진 행정 처분이며, 어떠한 기술 탈취와도 무관합니다.』
공식 발표였지만, 그 안에는 한 가지 중요한 단어가 없었습니다. 에어로가드테크의 기술이 독창적이지 않다는 주장도, 심사 결과가 정당하다는 설명도, 구체적인 근거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입장 표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박성희에게는 하나의 신호였습니다.
방위산업청 내부가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심리 기일은 소장 접수 이십이 일 뒤로 지정되었습니다. 서울중앙지방법원 제삼민사 합의부 사백이십호 법정. 박성희는 사흘 전부터 최종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그 사이에 한성방산그룹 측의 법무팀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상대측 대리인으로 선임된 변호사는 유명했습니다. 강선호. 오십이 세. 로펌 '한국종합법률'의 시니어 파트너. 대기업 분쟁 전문이었고, 기술 탈취 사건에서 피고 측 대리인으로 나선 경험만 이십삼 건이었습니다. 패소는 단 네 건. 그중 두 건은 항소심에서 뒤집었습니다.
박성희와 강선호가 처음 상대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삼 년 전, 반도체 설계 기업의 기술 탈취 소송에서 두 사람은 각각 원고와 피고를 대리했습니다. 그 소송은 삼심까지 갔고, 대법원에서 원고 일부 승소로 끝났습니다. 강선호가 패소한 네 건 중 하나였습니다. 그 이후로 두 사람은 법정 밖에서도 거리를 유지했습니다. 존중이 아니라, 경계심이었습니다.
첫 심리 기일.
법정 안은 낯선 긴장감으로 가득했습니다. 방청석에는 기자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에어로가드테크 직원 몇 명이 뒤쪽에 조용히 자리를 잡았습니다. 법원 관계자들 사이에서도 이 사건에 대한 관심이 있다는 것은, 재판장이 보조 재판관을 두 명씩 배치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습니다.
재판장은 이재명 판사였습니다. 예순에 가까운 나이였지만 눈매가 날카로웠습니다. 기술 분쟁 사건을 십오 년 이상 담당해 온 베테랑이었고, 판결의 논리가 철저하기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법정에서 불필요한 감정적 발언을 용납하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했습니다.
박성희가 먼저 기초 사실 진술을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차분하고 정확했습니다. 에어로가드테크의 기술 개발 경과, 방위산업청 제안서 제출 일자, 심사 기간 중 서버 접속 이상 기록의 발견, 한성방산그룹 특허 출원 내역과의 시간적 관계. 그리고 두 기술 문서 사이의 유사성에 대한 전문가 의견서 요지.
이재명 판사는 박성희의 진술을 듣는 내내 메모를 했습니다. 그리고 진술이 끝난 뒤 한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원고 측 서버 접속 이상 기록은 원고 측이 직접 발견한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그 기록의 원본 보존 상태는 어떻게 확보되었습니까?"
박성희는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독립 디지털 포렌식 업체를 통해 접속 로그의 원본 해시 값을 공증받은 상태입니다. 제출 예정 증거 목록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판사는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강선호를 바라보았습니다.
강선호는 침착하게 일어섰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안정적이었습니다.
"피고 측은 원고의 주장이 근거 없음을 강하게 부인합니다. 한성방산그룹이 출원한 기술은 독자적인 연구 개발의 결과물이며, 에어로가드테크와의 기술적 유사성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동일 분야에서 유사한 방향으로 기술이 발전해 온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리고 그는 한 가지를 추가했습니다.
"또한, 피고 측은 원고 측이 주장하는 서버 접속 이상 기록에 대해 심각한 의구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해당 기록이 원고 측에 의해 사후 조작된 것은 아닌지, 피고 측은 독자적인 포렌식 분석을 요청할 예정입니다."
법정 안에 순간적인 소음이 퍼졌습니다. 방청석의 기자들이 펜을 움직였습니다. 에어로가드테크 직원들의 얼굴이 굳었습니다.
김동민은 뒤쪽 방청석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의 손이 무릎 위에서 천천히 주먹을 쥐었습니다.
박성희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강선호의 발언을 듣는 내내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발언의 의미는 정확하게 파악했습니다.
한성방산그룹 측은 에어로가드테크의 증거를 직접 반박하는 대신, 증거 자체의 신뢰성을 공격하는 전략을 택했습니다. 그것은 기술적 사실 관계를 다투기 어렵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법정에서 가장 효과적인 방어 전략이기도 했습니다.
증거의 신뢰성이 흔들리면, 사실 관계는 무의미해집니다.
박성희는 법정을 나오면서 단 하나의 생각만 했습니다.
포렌식 자료를 더 완벽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제보자를 찾아야 합니다. 지금 당장.
제5장. 내부의 균열
제보자는 생각보다 가까이 있었습니다.
디지털 포렌식 업체가 제출한 중간 분석 보고서를 검토하던 박성희는, 서버 접속 로그 외에 한 가지를 더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에어로가드테크가 방위산업청에 제출한 기술 제안서 파일의 메타데이터였습니다. 메타데이터에는 파일의 최종 수정 시각, 수정자 정보, 그리고 문서를 열람한 계정 목록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열람 계정 중에 낯선 것이 있었습니다.
방위산업청 심사 과정 중, 특정 외부 검토자 계정이 해당 파일을 열람한 기록이 있었습니다. 그 계정은 방위산업청 자체 시스템 계정이 아니었습니다. 외부 자문단 계정이었으며, 자문단 명단에 있는 인물의 계정이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그 자문단 위원은 방위산업청의 공식 심사위원이 아니었습니다. 정식 열람 권한 부여 없이 파일에 접근한 것이었습니다.
자문단 위원의 이름. 이후철. 예순한 살. 전직 국방과학연구소 부소장. 퇴직 후 민간 기업 두 곳의 자문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한성방산그룹이었습니다.
박성희는 그 이름을 찾아내는 순간, 처음으로 이 사건의 구조가 보였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기술 탈취가 아니었습니다. 방위산업청 내부의 심사 과정에 한성방산그룹과 연결된 인물이 개입했고, 그 인물이 에어로가드테크의 핵심 기술 문서에 무단으로 접근했으며, 그 정보가 한성방산그룹의 기술 개발에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우선협상대상자가 에어로가드테크에서 한성방산그룹으로 변경되었습니다.
구조가 있었습니다. 설계가 있었습니다.
박성희는 즉시 행정 소송 제기를 검토하기 시작했습니다. 방위산업청의 우선협상대상자 변경 처분 자체가 절차적 하자를 가지고 있을 수 있었습니다. 공정한 심사 과정에서 특정 자문위원의 부당 개입이 있었다면, 그 행정 처분은 무효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주장하려면 이후철의 불법 접근 사실이 공식 증거로 채택되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입증하려면, 방위산업청 내부의 협조가 필요했습니다.
방위산업청 내부에서 협조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했습니다.
박성희는 전화 한 통을 생각했습니다. 오래된 연락처였습니다. 방위산업청 감사팀에서 근무하는 사람으로, 과거 한 소송에서 참고인으로 만난 인물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아직 그 자리에 있는지는 몰랐습니다. 그러나 시도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전화는 연결되었습니다.
그리고 상대방이 한 마디 듣고 말했습니다.
"그 이름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박성희는 숨을 참았습니다.
"이후철 전 부소장이 심사 과정에서 특정 파일에 접근한 기록이 내부적으로도 문제가 제기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심사 결과가 발표된 이후 그 건은 내부적으로 처리되었습니다."
"어떻게 처리되었습니까?"
침묵이 흘렀습니다.
"담당자 경고 처분으로 종결되었습니다.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고, 심사 결과도 변경되지 않았습니다."
박성희는 눈을 감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습니다.
"그 내부 처리 문서가 존재합니까?"
또 다른 침묵이 흘렀습니다. 더 길었습니다.
"...저도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존재한다면, 감사 기록실에 있을 겁니다."
"감사 기록은 법원 사실 조회 신청이 가능합니까?"
"가능합니다. 그러나 청 내부의 반발이 있을 겁니다."
박성희는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리고 사실 조회 신청서 초안을 작성하기 시작했습니다. 법원을 통한 공식 요청이라면, 방위산업청도 거부하기 어려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 늦게,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박성희의 사무실 이메일 수신함에 익명 이메일 하나가 도착했습니다. 발신자 주소는 임시 계정이었고, 내용은 짧았습니다.
『이후철의 접근 기록이 감사실에 있지 않습니다. 이미 삭제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삭제 이전의 로그를 가지고 있습니다. 만날 수 있다면 연락 주십시오. 저는 방위산업청 내부에 있습니다.』
박성희는 그 이메일을 세 번 읽었습니다.
제보자가 나타났습니다. 그것도 내부에서. 그러나 그것이 진짜 제보자인지, 아니면 반대편에서 설계한 함정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이메일을 출력해 서랍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장수아를 불렀습니다.
"내일 아침, 이 이메일 발신자 추적을 사이버 보안 전문가에게 의뢰하세요. 그리고 이후철 전 부소장의 최근 동향을 파악해 주세요. 현재 어떤 기업의 자문을 맡고 있는지, 최근 해외 출장 이력이 있는지."
장수아가 나간 뒤, 박성희는 창밖을 바라보았습니다.
서울 밤하늘에는 구름이 두껍게 덮여 있었습니다. 별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이 사건이 어디로 향하는지, 이제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방향이,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깊은 곳이라는 것도.
한편, 같은 시각.
서울 종로구의 고급 호텔 라운지에서는 두 남자가 마주 앉아 있었습니다. 한 명은 한성방산그룹의 법무팀장이었습니다. 또 한 명은 그가 처음 보는 사람이었는데, 명함에는 직함이 적혀 있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름 옆에 영어 알파벳 두 글자가 찍혀 있었습니다.
법무팀장은 그 두 글자를 보고 물었습니다.
"정부에서 나오신 겁니까?"
상대방은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봉투 하나를 테이블 위에 놓았습니다.
"이창호 씨가 곧 법원에 자술서를 제출할 예정입니다. 그 안의 내용에 따라, 상황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법무팀장이 봉투를 열었습니다. 그 안에는 이창호의 자술서 초안 사본이 들어 있었습니다.
법무팀장은 얼굴색이 변했습니다.
제6장. 진실의 무게
이창호의 자술서 제출은 예정보다 이틀 앞당겨졌습니다.
그것은 박성희의 요청이었습니다. 이메일 제보자의 신원이 아직 확인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창호의 진술을 공식화해 두는 것이 우선이었습니다. 이창호가 법원에 자술서를 제출하는 순간, 그 내용은 증거의 지위를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창호 자신도 그 진술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창호는 자술서를 스스로 작성했습니다. 박성희는 법률적 형식만 조언했고, 내용은 전적으로 이창호의 기억에 따랐습니다. 자술서의 핵심은 두 가지였습니다. 한성방산그룹 측에 제공한 자문의 구체적 내용. 그리고 계정 정보 도용의 가능성이 있는 시점과 경위.
자술서가 법원에 접수된 다음 날, 사건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터졌습니다.
한 인터넷 방산 전문 매체가 단독 보도를 냈습니다. 제목은 이러했습니다.
『에어로가드테크 기술, 국방과학연구소 재직 시절부터 개발 시작 — 김동민 대표, 국가 연구 성과를 사유화했나?』
기사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김동민이 국방과학연구소에서 퇴직하기 전 수행한 연구 과제의 일부가, 에어로가드테크의 핵심 기술과 실질적으로 동일하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익명의 국방과학연구소 관계자를 인용하며, 에어로가드테크가 방위산업청에 제출한 기술 제안서의 일부가 사실상 국가 연구 성과를 무단으로 상업화한 것일 수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습니다.
기사는 오전 여섯 시에 게재되었고, 정오 이전에 주요 언론이 받아 썼습니다. 에어로가드테크의 주가는 개장 직후 십오 분 만에 상한가 반대 방향으로 곤두박질쳤습니다. 직원들의 메신저는 불안감으로 가득 찼습니다. 투자자들의 전화가 이어졌습니다.
김동민은 그 기사를 박성희보다 먼저 읽었습니다. 그는 박성희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이 기사... 대응해야 합니까?"
박성희는 이미 기사를 검토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아닙니다."
"왜입니까?"
"이 기사가 어디서 나왔는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언론 공격이 아닙니다. 이것은 법정 전략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습니다.
박성희는 계속했습니다.
"한성방산그룹 측은 기술 유사성 논쟁에서 불리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전선을 바꾸려 하는 겁니다. 에어로가드테크의 기술 자체가 적법하게 형성된 것인지에 대한 의구심을 심어두면, 법원도 기술의 독창성 여부보다 기술의 소유권 적법성을 먼저 따지게 됩니다. 사건의 초점이 이동하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국방과학연구소에서 퇴직하실 때 어떤 서류에 서명하셨습니까? 연구 성과 귀속에 관한 서류, 전직 제한 동의서 등 모든 것을 저에게 보내주세요. 오늘 안에."
김동민은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리고 집 서재 깊숙이 넣어두었던 서류함을 꺼냈습니다.
박성희는 그 서류를 검토하는 데 반나절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세 가지를 확인했습니다.
첫째, 김동민은 국방과학연구소 퇴직 시 연구 성과 귀속 동의서에 서명했습니다. 단, 그 동의서에 명시된 귀속 범위는 '재직 기간 중 정부 과제로 수행된 연구 결과물'에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둘째, 에어로가드테크의 핵심 기술은 퇴직 후 개발된 것이었습니다. 기술 개발 일지, 특허 출원 날짜, 내부 회의록 등으로 개발 시점이 명확히 입증 가능했습니다.
셋째, 기사가 언급한 '유사성'은 기술 분야 자체의 연속성에서 오는 것이었습니다. 전자전 분야의 기초 이론을 알고 있는 사람이 그 이론 위에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마치 화학을 전공한 사람이 독자적인 제품을 개발했을 때, 화학 기초 지식이 국가 교육의 결과물이라는 이유로 소유권을 다투는 것과 같았습니다.
박성희는 서류를 내려놓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법원에서 이것을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기술의 연속성과 기술의 독창성 사이의 경계는 언제나 회색지대였고, 그 회색지대는 법원의 재량이 크게 작용하는 영역이었습니다.
필요한 것은 기술 감정이었습니다. 독립적이고 권위 있는 전문가가 에어로가드테크의 기술과 국방과학연구소 연구 성과를 명확히 구분해 주는 감정서가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그 감정을 맡을 수 있는 사람은 전국적으로 손에 꼽을 정도였습니다.
박성희는 리스트를 작성했습니다. 그리고 이름 하나를 동그라미 쳤습니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전파 시스템 연구부 수석 연구원, 오재현. 쉰여섯 살. 전자전 분야 학위를 가진 국내 최고 권위의 민간 전문가 중 한 명이었습니다.
박성희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전화 연결음이 세 번 울리고, 연결되었습니다.
"오재현 박사님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저는 변호사 박성희입니다. 전자전 시스템 관련 기술 감정에 대해 의논드리고 싶습니다."
잠시 침묵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재현이 말했습니다.
"...그 사건 말씀이시죠?"
박성희는 눈썹을 살짝 들었습니다.
"알고 계셨습니까?"
"한성방산그룹 측에서도 두 달 전에 연락이 왔었습니다. 저는 거절했습니다."
박성희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오재현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습니다.
"그쪽이 제시한 감정 의뢰 내용이... 중립적이지 않았습니다. 원하는 결론이 정해진 상태에서 그것을 뒷받침하는 보고서를 요청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런 방식으로 일하지 않습니다."
박성희는 조용히 말했습니다.
"저도 그런 방식으로 의뢰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진실입니다. 그것이 저희 의뢰인에게 불리하더라도."
또 다른 침묵이 흘렀습니다. 더 길었습니다.
"...언제 만날 수 있겠습니까?"
제7장. 반전의 반전
오재현이 제출한 기술 감정 보고서는 두 번의 반전을 동시에 담고 있었습니다.
그 보고서는 법원 감정 절차를 통해 공식적으로 채택되었고, 본격적인 심리가 시작된 지 칠 주 만에 제출되었습니다. 두껍기로 유명한 기술 감정서치고도 이백이십 페이지라는 방대한 분량이었습니다. 법원과 양측 변호인단은 그 보고서를 동시에 수령했습니다.
박성희는 보고서를 받자마자 밤새 읽었습니다.
첫 번째 반전은 에어로가드테크에 유리한 것이었습니다. 오재현 감정인은 에어로가드테크의 핵심 기술, 특히 다중 주파수 동시 교란 처리 알고리즘이 국방과학연구소의 기존 연구 결과물과 명확히 다른 독자적 창작물임을 판정했습니다. 기술적 연속성은 인정했지만, 방법론의 구체적 구현에서 에어로가드테크가 독자적인 발명을 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언론의 의혹 보도는 기술 감정 결과 앞에서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반전이 문제였습니다.
오재현은 보고서 후반부에서 한 가지를 더 지적했습니다.
한성방산그룹의 기술과 에어로가드테크의 기술 사이에는 분명한 유사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유사성의 원천을 추적한 결과, 오재현은 한 가지 예상치 못한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한성방산그룹이 특허 출원한 기술의 핵심 부분은 에어로가드테크의 기술과 유사했지만, 동시에 에어로가드테크의 기술보다 한 단계 더 발전된 부분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발전된 부분은, 에어로가드테크의 기술 만으로는 도출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원천이 있어야 했습니다.
오재현의 감정 의견은 이러했습니다.
『한성방산그룹의 기술이 에어로가드테크의 기술을 단순 모방한 것이라고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에어로가드테크의 기술을 일부 참조했을 가능성은 있으나, 동시에 제삼의 기술 원천이 존재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박성희는 보고서를 덮었습니다. 그리고 오래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자신에게 불리한 결과였습니다. 단순 기술 탈취가 아니라 더 복잡한 무언가가 있다는 의미였고, 법원이 단죄의 근거를 찾기 어렵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것은 새로운 질문을 열어 주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제삼의 기술 원천. 그것이 무엇인가?
박성희는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한성방산그룹이 에어로가드테크의 기술을 일부 확보했다고 가정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제삼의 기술을 더해 새로운 특허를 만들었다면. 그 제삼의 기술은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그녀의 머릿속에 이후철의 이름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이후철 전 국방과학연구소 부소장. 그는 에어로가드테크 기술 문서에 무단 접근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가 국방과학연구소의 내부 연구 자료에도 접근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면?
퇴직한 전 부소장이 민간 기업 자문을 맡으면서, 국가 기밀 수준의 연구 자료를 이전했다면?
박성희는 그 순간, 이 사건의 규모가 자신이 처음 생각한 것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은 더 이상 기업 간의 기술 탈취 소송이 아니었습니다. 국가 기밀 자료의 유출 가능성. 그것이 실제라면, 사건은 민사와 형사를 넘어서 국가 안보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박성희는 즉시 김동민에게 연락했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날, 예상치 못한 방문자가 박성희의 사무실에 찾아왔습니다.
군복을 입지 않은 남자 두 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꺼내 든 신분증에는 국군방첩사령부라는 명칭이 찍혀 있었습니다.
"변호사님, 잠깐 시간이 되십니까?"
박성희는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앉으세요."
두 사람은 마주 앉았습니다. 한 명이 말했습니다.
"에어로가드테크와 한성방산그룹 사이의 소송에 관여하고 계신 것으로 압니다. 저희가 주목하는 부분이 있어서 협조 요청차 왔습니다."
"어떤 부분입니까?"
"이후철 전 부소장입니다. 그가 민간 기업에 제공했을 가능성이 있는 자료 중 일부가... 국가 기밀로 분류된 자료일 수 있습니다."
박성희는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가 다시 올렸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저희 소송에도 영향이 있겠군요."
"영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 방향으로도 영향이 있습니다."
박성희는 눈썹을 들었습니다.
"반대 방향이라는 것은?"
방첩사 요원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습니다.
"국가 기밀 자료가 개입된 경우, 해당 자료는 법정에서 증거로 사용될 수 없습니다. 기밀 해제가 되지 않는 한. 그리고 기밀 해제 여부는 법원이 아닌 정부가 결정합니다."
박성희는 그 말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했습니다.
만약 이후철이 국가 기밀을 유출한 것이라면, 그 사실이 오히려 소송에서 에어로가드테크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었습니다. 핵심 증거가 기밀로 묶여 법정에 제출될 수 없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함정이었습니다. 그러나 누가 설계한 함정인지는 아직 몰랐습니다.
제8장. 보이지 않는 설계도
마지막 공판은 삼 개월 뒤에 열렸습니다.
그 삼 개월 동안, 사건의 지형은 세 번 더 바뀌었습니다.
방첩사의 수사가 시작되면서, 이후철 전 부소장은 기소 전 조사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모든 혐의를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방첩사가 이후철의 자택과 차량을 압수 수색하는 과정에서 암호화된 외장 하드 드라이브가 발견되었고, 그 안에는 방위산업청 심사 기간 중 복사된 것으로 추정되는 에어로가드테크의 기술 문서 사본과 함께, 국방과학연구소의 내부 연구 자료 수십 건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 순간부터 이후철은 침묵했습니다.
그러나 방첩사의 수사는 또 다른 사실을 드러냈습니다. 이후철이 그 자료들을 유출한 대상이 한성방산그룹만이 아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해외의 한 민간 방산 컨설팅 회사와도 자료 거래를 한 것으로 의심받고 있었습니다. 그 컨설팅 회사는 여러 국가에 사무소를 두고 있었으며, 일부 국가 정보기관과의 연계 의혹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사건은 국제 안보 문제로 번질 가능성이 생겼습니다.
정부는 이 사실을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외교적 파장을 우려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이 민사 소송의 흐름을 결정적으로 꺾어 놓았습니다.
방첩사는 박성희를 통해 에어로가드테크 측에 비공개 협조를 요청했습니다. 이후철 관련 증거의 일부를 법정 제출 대상에서 제외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대신 정부는 에어로가드테크에 대해 별도의 기술 개발 지원 협약을 체결할 의향이 있다고 밝혔습니다.
박성희는 그 요청을 즉시 거부했습니다.
"저는 의뢰인에게 그 제안을 전달하겠습니다. 그러나 결정권은 의뢰인에게 있습니다."
김동민은 그 이야기를 들으며 오래 생각했습니다.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박성희는 그 말을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건을 어떻게 바꿀 것인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이후철 관련 증거 없이는, 한성방산그룹에 대한 기술 탈취 입증이 절반의 강도로 약해졌습니다. 에어로가드테크가 독자 기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입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성방산그룹이 그 기술을 어떤 경로로 획득했는지에 대한 완전한 설명에는 구멍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강선호는 그 구멍을 파고들었습니다.
마지막 공판 당일, 법정은 이른 아침부터 방청석이 가득 찼습니다. 언론, 방산 업계 관계자, 법학 교수, 그리고 이창호도 방청석 한켠에 앉아 있었습니다. 이창호는 이미 자술서를 제출한 상태였지만, 한성방산그룹에 대한 법적 책임은 별도 절차에서 다뤄질 예정이었습니다.
강선호는 최후 변론에서 세 가지 논거를 펼쳤습니다.
첫째, 에어로가드테크가 제출한 서버 접속 로그는 이창호 계정의 도용 여부가 완전히 입증되지 않았으므로, 내부자에 의한 의도적 유출로 단정할 수 없다는 주장이었습니다. 둘째, 한성방산그룹의 기술이 에어로가드테크의 기술보다 발전된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는 오재현의 감정 결과는, 오히려 한성방산그룹의 독자적 기술 역량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주장이었습니다. 셋째, 우선협상대상자 변경은 방위산업청의 적법한 행정 처분이었으며, 한성방산그룹은 그 결정의 수혜자에 불과하다는 주장이었습니다.
논리는 치밀했습니다. 그러나 박성희는 세 논거 모두에 반론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천천히 일어섰습니다.
법정 안이 고요해졌습니다.
"재판장님, 피고 측의 논거는 하나의 전제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과정보다 결과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기술이 어떤 경로로 전달되었는지보다, 결과물의 완성도가 피고의 독자성을 증명한다는 논리입니다."
그녀는 잠시 멈추었습니다.
"그러나 법은 다르게 말합니다. 과정이 위법하다면, 결과물의 완성도는 면죄부가 될 수 없습니다. 더 좋은 집을 지었더라도, 남의 땅에 지은 집은 내 것이 아닙니다."
법정 안에 조용한 공명이 퍼졌습니다.
그녀는 계속했습니다.
"에어로가드테크의 기술 문서에 대한 무단 접근 사실은 디지털 포렌식으로 입증되었습니다. 이후철 전 부소장의 무단 열람 사실은 방위산업청 자체의 내부 감사 기록으로 확인되었습니다. 한성방산그룹 특허에 이창호 씨의 이름이 무단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이창호 씨 본인이 부인하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는 각각의 고리로서, 전체 경로를 구성합니다."
강선호가 이의를 제기하려 했습니다. 재판장이 손을 들어 막았습니다.
이재명 판사는 잠시 눈을 내리깔았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습니다.
"원고 측 변호인에게 묻겠습니다. 원고 측이 주장하는 기술 탈취 경로에서, 이후철 전 부소장의 역할이 핵심적이라면, 그에 대한 형사 절차의 결과가 나오기 전에 민사 판결을 내리는 것이 적절한가에 대한 견해는 어떻습니까?"
박성희는 그 질문을 예상했습니다.
"재판장님, 민사와 형사는 독립된 절차입니다. 형사 절차의 결과를 기다리는 것은 의뢰인에게 불필요한 시간적 손해를 가져옵니다. 현재 법원이 확인할 수 있는 증거만으로도, 피고의 행위가 영업비밀보호법상 부정 취득 행위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판단하기에 충분합니다."
재판장은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판결 선고 기일은 삼 주 후로 지정되었습니다.
그 삼 주 동안, 김동민은 사무실에 거의 나오지 않았습니다. 직원들은 대표의 부재를 느꼈지만, 아무도 묻지 않았습니다. 에어로가드테크의 분위기는 무거웠습니다. 우선협상대상자 지위를 잃은 이후 회사는 신규 계약을 맺지 못했고, 운영 자금은 빠르게 소진되고 있었습니다. 몇몇 직원들은 이직 의사를 넌지시 비쳤습니다. 김동민은 그들을 붙잡지 않았습니다.
이창호는 에어로가드테크 사무실에 한 번 찾아왔습니다.
김동민이 자리에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직원에게 전언을 남기고 돌아갔습니다.
「 죄송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
김동민은 그 전언을 받아 읽고, 서랍에 넣었습니다.
판결이 선고되었습니다.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 합의부는 피고 한성방산그룹 주식회사의 영업비밀 침해 행위를 부분 인정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에어로가드테크 서버의 무단 접근 사실 및 기술 문서의 무단 활용 가능성이 상당 부분 소명되었다고 판단했습니다. 법원은 한성방산그룹에 손해 배상금 이백삼십억 원을 원고 에어로가드테크에 지급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차세대 전자전 시스템 개발 사업의 우선협상대상자 지위 회복 청구는 기각했습니다. 방위산업청의 행정 처분은 별개의 행정 소송 절차에서 다루어야 한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한성방산그룹은 항소를 예고했습니다.
방위산업청은 입장 표명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후철은 구속되었습니다.
그리고 언론은 그 판결을 두고 '절반의 승리'라고 보도했습니다.
사무실에 불이 꺼졌습니다.
직원들이 모두 떠난 뒤에도, 김동민은 책상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창밖에는 서울의 야경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한강 위로 빛이 반사되고 있었습니다. 도시는 평온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평온이, 그에게는 낯설었습니다.
그는 이백삼십억 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돈으로 회사를 살릴 수 있었습니다. 새로운 직원을 채용할 수 있었습니다. 기술 개발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이 원한 것이었는지, 그는 알 수 없었습니다.
기술을 빼앗겼다는 것은 증명했습니다. 하지만 그 증명의 과정에서, 이창호를 의심했습니다. 직원들에게 진실을 숨겼습니다. 제보자를 이용했습니다. 정부와 협상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 거부가 옳은 것이었는지도,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
박성희는 판결 당일 저녁 그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항소심 준비가 필요하시면 연락 주세요.』
그는 그 문자를 읽고, 오래 화면을 바라보았습니다.
박성희는 이 사건이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알고 있었습니다. 이후철의 구속이 전체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줄 것인지, 아니면 더 깊은 곳으로 이어지는 문을 열게 될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습니다. 국제 방산 컨설팅 회사와의 연결 고리. 그것이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 방첩사도 아직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녀 자신도, 이 사건을 통해 자신이 믿었던 몇 가지가 흔들렸습니다. 법이 진실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에서, 법은 진실의 일부만을 담을 수 있었습니다. 나머지는 국가 안보라는 이름 뒤에 가려졌습니다. 그것이 옳은 것인지, 그녀는 아직 답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김동민은 창밖을 바라보다가 혼잣말처럼 말했습니다.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서울 야경을 향해 그는 조용히 말했습니다.
"우리는 기술을 빼앗긴 게 아닙니다. 서로를 믿을 이유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 말이 텅 빈 사무실 안에 잠시 머물다가, 사라졌습니다.
한성방산그룹은 항소했습니다. 방위산업청은 새로운 심사를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이후철의 재판은 비공개로 진행되었습니다. 에어로가드테크는 손해 배상금이 실제로 입금되기까지 또 다른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세상은 계속 움직였습니다. 다만 신뢰는, 판결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이 이야기의 끝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진짜 설계도는, 아직 보이지 않는 곳에 있을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설계도》 — 完
이 작품은 완전한 허구이며, 실존하는 기업, 인물, 기관과 무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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