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도 끝의 기록》
침묵은 왜 가장 약한 사람에게 향하는가
제1장. 민원
비가 내리던 날이었습니다.
세상에는 오래 기억되는 비가 있습니다. 소나기처럼 격렬하게 쏟아지다 사라지는 비가 아니라, 오전부터 저녁까지 느릿느릿 내리며 모든 것을 조금씩 젖게 만드는 그런 비. 하늘이 회색빛으로 낮게 깔리고, 멀리서 천둥소리 한 번 없이, 그냥 조용히, 집요하게 내리는 비.
박민지는 그날 아침 학교에 일찍 도착했습니다. 여섯 시 오십 분. 교문이 열리기 전이었습니다. 경비 아저씨가 철제 문을 삐걱거리며 밀어 열 때, 민지는 이미 교문 앞 처마 아래 서 있었습니다. 우산을 접은 채로, 운동화 앞코가 절반쯤 젖은 채로.
경비 아저씨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습니다. "어째 이렇게 일찍 오셨어요, 선생님." 민지는 그냥 웃었습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간밤에 거의 잠을 못 잤습니다. 새벽 두 시부터 눈을 감고 있었지만, 눈꺼풀 안쪽에서 자꾸 어제 일이 재생되었습니다. 어제, 그리고 그 전날, 그 전전날.
이 학교에 발령받은 지 여섯 달이 지났습니다.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민지에게는 그 어느 학교보다 긴 시간처럼 느껴졌습니다. 지난 삼 년 동안 세 곳의 학교를 옮겨 다녔습니다. 기간제 교사란 그런 것입니다. 계약이 끝나면 짐을 싸고 다음 학교로 갑니다. 이번 학교는 달라지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아니, 달라지긴 했습니다. 더 나빠지는 방향으로.
교무실은 아직 어두웠습니다. 형광등 두 개가 켜지는 데 시간이 걸렸고, 하나는 깜빡거리다 꺼졌습니다. 민지는 자신의 책상에 가방을 내려놓고 의자를 당겨 앉았습니다. 책상 위에는 어제 퇴근하면서 미처 치우지 못한 서류들이 쌓여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교육청 민원 접수 통보서.
민지는 그 서류를 다시 들었습니다. 읽었습니다. 어제 처음 봤을 때 눈이 흐릿해져서 내용이 잘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오늘 다시 읽었습니다. 내용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민원 내용 요약: 담임교사가 수업 중 특정 학생을 지속적으로 소외시키고 정서적으로 학대하였으며, 이로 인해 해당 학생이 등교 거부 증상을 보이고 있음. 학부모는 담임 교체 및 교육청 차원의 공식 조사를 요청함.
민지는 서류를 내려놓았습니다. 천천히 숨을 내쉬었습니다. 빗소리가 유리창에 부딪혔습니다. 복도 끝에서 청소 아주머니가 대걸레를 밀고 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민지는 그 아이를 떠올렸습니다. 최준서. 삼 학년 사 반. 수업 중에 친구의 필통을 가져가서 숨겼던 아이. 짝꿍의 머리채를 잡아당겨 울린 아이. 화가 나면 책상을 발로 차고, 소리를 지르고, 교실을 뛰쳐나갔던 아이. 그 아이가 힘들 때마다 민지는 개별로 대화를 시도했고, 학부모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상담 교사와도 연계했습니다. 아이의 행동을 교육 일지에 기록했습니다.
그 기록들이 지금 "정서적 학대의 증거"로 둔갑해 있었습니다.
민원을 제기한 학부모는 서은채였습니다. 최준서의 어머니.
민지는 서은채를 처음 만났던 날을 기억했습니다. 삼 월 학부모 총회 날이었습니다. 서은채는 맨 앞줄에 앉았습니다. 정장을 입고 있었고, 손에는 작은 수첩을 들고 있었습니다. 민지가 학급 운영 방침을 설명하는 내내, 서은채는 그 수첩에 무언가를 적었습니다. 회의가 끝나고 다른 학부모들이 자리를 뜰 때, 서은채 혼자 남았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선생님, 준서 아이가 문제가 있을 때 저한테 즉시 연락 주실 건가요?"
민지는 물론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가정과 학교의 연계가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서은채는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 미소가 어딘지 모르게 마음에 걸렸지만, 민지는 그냥 넘겼습니다. 첫인상이라는 것이 항상 정확하지는 않으니까요.
그 판단이 틀렸다는 것을 민지가 깨닫는 데는 두 달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사 월이 되었을 때, 서은채로부터 처음 문자메시지가 왔습니다. 준서가 수업 중에 발표를 시켜달라고 손을 들었는데 선생님이 무시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민지는 당황했습니다. 그날 수업 시간에 발표 지명을 어떻게 했는지 기억을 더듬었습니다. 골고루 지명했습니다. 준서도 포함해서. 민지는 정중하게 답장을 보냈습니다. 사실과 다르다고, 준서는 발표 기회를 가졌다고. 서은채의 다음 문자는 열 시간 뒤에 왔습니다. 그 내용은 달랐습니다.
"선생님이 기억하지 못하신다면, 제가 더 정확하게 확인해 드릴 수 있습니다."
그 문장의 뜻을 민지가 이해하는 데 일주일이 걸렸습니다. 서은채가 무언가를 녹취하고 있다는 것을, 그 사실을 민지가 알게 된 것은 오 월 말이었습니다.
오 월의 어느 월요일, 준서가 교실에서 같은 반 학생에게 욕설을 했습니다. 민지는 준서를 교실 밖 복도로 데리고 나가 조용히 이야기했습니다.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왜 그런 말을 하면 안 되는지, 친구가 어떤 기분이었을지를 설명했습니다. 준서는 처음에 눈을 피했지만, 나중에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대화는 오 분을 넘지 않았습니다.
그날 저녁, 서은채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선생님, 오늘 준서를 복도로 내보내셨죠? 무슨 이유로 수업 중에 아이를 복도에 세워두신 건가요?"
민지는 설명했습니다. 복도에 세워둔 것이 아니라 함께 나가서 대화를 나눈 것이라고. 그 시간이 오 분 이내였고, 수업 시간이 아닌 쉬는 시간이었다고. 서은채는 잠시 침묵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선생님, 저는 이 통화도 녹취하고 있어요. 나중에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요."
민지의 손이 떨렸습니다. 통화를 마치고 화장실 칸 안에 들어가 문을 잠갔습니다. 울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었습니다. 그 순간부터 민지는 학교에서 말을 아끼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에게 말을 걸 때마다 이 말이 녹취될 수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습니다.
그때부터 민지의 불안이 시작되었습니다.
교장 이희준은 예순두 살이었습니다. 이 지역에서 삼십 년 넘게 교직 생활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교감을 거쳐 교장이 된 지 사 년째였고, 다음 해에 정년퇴직이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민지에게 처음 민원 내용을 전달했을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박 선생, 일단 좀 참아요. 이 시기만 잘 넘기면 돼요. 학부모한테 더 신경 써주고, 민원이 더 올라오기 전에 마무리합시다."
교장의 말에서 민지가 느낀 것은 위로가 아니었습니다. 책임 회피였습니다. 교장은 민지를 보호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퇴임 전까지 이 사건이 불거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었습니다. 민지는 그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기간제 교사는 교장 앞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습니다.
학년부장 최상훈은 민지에게 다가와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박 선생, 그 학부모 함부로 건드리면 안 돼요. 그 분이 어떤 분인 줄 알아요?"
민지는 모른다고 했습니다.
"학부모회 부회장이에요. 전 지역 의원 부인이기도 하고. 교육청에 라인이 있어요. 얼마 전에도 학교 하나에서 교장 날렸거든요."
최상훈은 그 말을 하고 자리를 떴습니다. 민지는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그 말이 경고인지, 조언인지, 아니면 그냥 상황 설명인지조차 알 수 없었습니다. 어느 쪽이든 결과는 같았습니다. 민지는 더 조용해져야 했습니다.
민원 통보서가 온 날로부터 사흘 뒤, 교육청 장학사 오정민이 학교를 방문했습니다. 오정민은 마흔다섯 살의 여성이었습니다. 말씨가 단정하고 표정에서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민지를 소회의실로 불렀습니다.
오정민은 민원 내용에 대해 하나씩 물었습니다. 민지는 대답했습니다. 수업 일지를 가져왔고, 상담 기록도 준비했습니다. 오정민은 자료를 받아서 훑어보았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준서 학생이 요즘 등교를 거부하고 있는 건 사실이에요. 학부모 측에서는 그 원인이 교실 내 분위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어요."
"저는 그 아이가 등교를 거부하는 이유가 교실 분위기 때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아이를 차별하거나 소외시킨 적이 없습니다."
오정민은 잠시 침묵했습니다.
"선생님, 저도 이 상황이 쉽지 않다는 건 알아요. 그런데 민원이 접수된 이상, 저도 절차를 밟을 수밖에 없어요. 이 사안은 아동학대 신고 가능성도 열려 있어서요."
민지는 그 말에 가슴이 내려앉는 것을 느꼈습니다. 아동학대. 그 단어는 공기 중에 떠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정서적 학대 신고는 물증이 없어도 신고 자체가 조사로 이어지거든요. 일단 신고가 접수되면 저도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오정민은 그 말을 위로처럼 전했지만, 민지의 귀에는 경고처럼 들렸습니다.
그날 저녁, 민지는 서울로 올라가는 고속버스를 탔습니다. 혼자 가기 싫었지만, 연락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대학 친구들은 각자 바빴고, 가족에게는 걱정을 끼치기 싫었습니다. 버스 창밖으로 불빛들이 지나갔습니다. 민지는 핸드폰을 꺼내 인터넷을 검색했습니다. 교권 침해. 기간제 교사. 아동학대 신고. 그 검색어들이 이어졌습니다.
검색 결과에는 비슷한 사례들이 가득했습니다. 교사가 신고당하고, 직위해제되고, 재판을 받고, 모든 것을 잃는 이야기들. 민지는 핸드폰을 가방에 넣었습니다. 손이 차가웠습니다.
김동수의 사무소는 지하 일 층에 있었습니다.
서울 마포구의 좁은 골목 안, 작은 건물의 반지하였습니다. 간판은 있었지만 글씨가 벗겨져 있었고, 입구에는 화분이 두 개 놓여 있었는데 하나는 죽어 있었습니다. 그래도 불은 켜져 있었습니다.
민지는 그 사무소의 주소를 블로그에서 찾았습니다. 교권 침해 피해 교사들이 모이는 온라인 커뮤니티에 누군가가 올린 글이었습니다. "이 변호사는 돈을 많이 안 받아요. 그리고 끝까지 싸워요." 댓글에는 그런 증언이 여럿 달려 있었습니다.
민지가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김동수는 책상 앞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었습니다. 올려다보지도 않고 말했습니다.
"앉으세요."
책상 위에는 서류가 산처럼 쌓여 있었습니다. 커피잔이 세 개였고, 두 개는 비어 있었습니다. 형광등 하나가 윙윙거렸습니다. 동수는 마흔두 살이었습니다. 얼굴에는 나이보다 더 깊은 주름이 있었고, 눈빛은 피곤하면서도 날카로웠습니다. 전직 형사 출신이라는 것이 어딘가 느껴졌습니다. 말수가 적었고, 질문이 정확했습니다.
민지가 앉자, 동수가 처음으로 고개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묵묵히 민지를 바라보았습니다. 민지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라서 잠시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어디가 다치셨어요?"
뜬금없는 질문이었습니다. 민지는 고개를 갸웃했습니다.
"손이요. 손목에서 팔꿈치까지 긁힌 자국이 있네요."
민지가 소매를 내렸습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소매를 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긁힌 자국은 최근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난 몇 주 동안 잠을 못 자고 불안이 심해지면서, 자신도 모르게 팔을 긁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 얘기 하러 온 건 아니니까요."
동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리고 서류 한 장을 꺼냈습니다.
"말씀하세요. 처음부터요."
민지는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서은채를 처음 만났던 날부터, 녹취 선언을 들었던 날까지. 민원 통보서를 받았을 때의 이야기, 교장의 반응, 장학사의 방문. 동수는 중간에 끊지 않았습니다. 메모를 했습니다. 질문이 필요한 부분에는 손을 들어 잠깐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습니다.
삼십 분이 지났을 때, 동수가 펜을 내려놓았습니다.
"수업 일지나 상담 기록 있어요?"
"네, 가져왔어요."
"전부 다 주세요. 복사본으로."
민지는 가방에서 서류를 꺼냈습니다. 동수는 받아서 빠르게 훑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페이지에서 멈췄습니다. 손가락으로 한 부분을 짚었습니다.
"이 날짜, 사 월 십사 일. 준서 학생이 친구를 폭행했을 때, 선생님이 경위서를 작성해서 교장한테 제출했죠?"
"네."
"교장이 그거 교육청에 보고했나요?"
민지는 잠시 생각했습니다.
"모르겠어요. 확인한 적이 없어서요."
동수가 다시 메모했습니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습니다.
"이 민원, 단순 민원 아니에요."
그 말이 조용히, 그러나 명확하게 민지의 귀에 박혔습니다.
"어떤 뜻인가요?"
"민원 접수 시기, 내용 구성 방식, 사전 녹취 준비. 이거 혼자서 준비한 게 아니에요. 누군가 조언을 했거나, 같이 설계한 거예요. 그 학부모 혼자 이 정도 수위의 민원을 이렇게 정교하게 넣을 수 있는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요."
민지는 가슴이 서늘해졌습니다.
"그럼 배후가 있다는 건가요?"
동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서류를 다시 훑었습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확인해 봐야죠."
창밖으로 빗소리가 들렸습니다. 민지는 그 순간, 이 사람과 함께하면 무언가가 달라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습니다. 확신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방향이 생겼다는 느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동수는 이미 다음 서류를 넘기고 있었습니다.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고, 집요하게.
제2장. 녹취
법은 평등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법정 밖에서 싸움이 시작될 때, 평등은 가장 먼저 증발하는 것들 중 하나입니다. 김동수는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습니다. 형사로 일했던 십이 년 동안 그는 수없이 많은 장면들을 목격했습니다. 돈이 있는 쪽이 먼저 변호사를 선임하고, 먼저 언론에 접촉하고, 먼저 증거를 정리하는 것을. 그 반대편에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조차 모른 채 혼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동수가 형사 조직을 떠난 것은 여덟 해 전이었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그는 내부 고발을 했습니다. 동료 형사들이 피의자로부터 금품을 수수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상부에 보고했습니다. 상부는 조용히 처리하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조용히 처리된 것은 그 사건이 아니라 동수 자신이었습니다. 좌천 통보가 왔고, 재조사 압박이 이어졌고, 결국 동수는 사직서를 냈습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사직 후에도 동료들의 압박이 계속되었고, 주거지 근처에서 이상한 낌새가 느껴지는 날들이 있었습니다. 동수는 결국 지방으로 내려가 로스쿨에 입학했습니다. 나이 서른네 살에. 공부는 쉽지 않았습니다. 학비가 없어 야간 아르바이트를 병행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졸업했고, 변호사 자격증을 땄습니다.
지금의 사무소는 처음에 친구가 빌려준 공간이었습니다. 반지하였고,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눅눅했습니다. 하지만 동수는 그 공간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사건 의뢰비를 낮게 책정했습니다. 돈을 낼 수 없는 사람들은 무료로 도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무소는 항상 바빴지만, 통장 잔고는 항상 비어 있었습니다.
박민지가 다녀간 다음 날, 동수는 아침 일찍부터 서류를 정리했습니다.
민지가 두고 간 자료들을 다시 꼼꼼히 읽었습니다. 수업 일지, 상담 일지, 교장 면담 기록, 서은채와 주고받은 문자메시지 캡처본. 동수는 이것들을 시간순으로 배열했습니다. 그 배열을 보면서 하나의 흐름을 읽었습니다.
서은채의 민원은 즉흥적이지 않았습니다. 사 월부터 오 월까지 두 달 동안, 서은채는 체계적으로 자료를 모으고 있었습니다. 통화 녹취, 문자 보관, 학교 방문 시 직원들과의 대화 기록. 그리고 민원 접수일 직전, 교육청에 공식 민원을 넣기 이틀 전, 서은채는 지역 신문사 기자에게 연락을 취했습니다.
동수는 그 부분에서 손가락을 멈췄습니다. 지역 신문사 연락. 그 정보는 민지가 직접 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민지가 두고 간 문자 캡처본 중에, 서은채와 다른 학부모 사이의 대화가 섞여 있었습니다. 아마 민지가 모르는 사이에 다른 학부모가 공유해 준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 대화에서 서은채가 기자에게 연락했다는 사실이 한 줄 언급되어 있었습니다.
"언론에 터뜨리기 전에 교육청이 움직이는 게 낫지. 그래야 조용히 정리가 되니까."
동수는 그 문장을 메모했습니다. 밑줄을 그었습니다. 그리고 휴대폰을 들었습니다. 전화를 건 곳은 지역 교육청 내부에서 일하다 퇴직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름은 강철호. 육십이 살. 동수가 예전 사건을 맡았을 때 알게 된 사람이었습니다. 퇴직 후에는 작은 교육 관련 컨설팅을 하고 있었습니다.
강철호가 전화를 받았습니다.
"야, 동수야. 오랜만에 전화하네. 또 무슨 일이냐."
"민원 설계 방식이 특이한 사건이 있어서요. 민원 내용이 법률 조언을 받은 것 같은데, 교육청 민원 처리 절차를 아주 잘 알고 있어요. 어디서 그런 걸 배울 수 있는지 생각해 봤는데."
전화 너머로 잠시 침묵이 흘렀습니다.
"어느 지역?"
동수가 학교 이름을 말했습니다.
강철호는 한참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거기 서은채라는 학부모 때문이야?"
동수는 손에 힘이 들어갔습니다.
"어떻게 알아요?"
"그 사람 이름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야. 작년에도 다른 학교에서 비슷한 민원이 있었어. 담임 교사 교체됐지. 그 전에도 한 건 더 있어. 그 선생은 계약이 종료됐고."
동수는 조용히 받아 적었습니다.
"그 학교 교장들, 교육청 관계자들. 그 학부모랑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야. 다들 알면서 모른 척하는 거야."
"왜요?"
"이유는 각자 다르지. 어떤 건 이해관계, 어떤 건 겁, 어떤 건 그냥 귀찮아서. 그 학부모가 왜 그러는지는 나도 정확히는 몰라. 그냥 통제하고 싶은 거 아닐까. 학교를 자기 영역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거든. 그 안에 자기 아이가 왕처럼 있어야 하는 거야."
동수는 전화를 끊고 오래 앉아 있었습니다.
박민지 사건은 이제 그에게 단순한 민원 대응이 아니었습니다.
민지에게 두 번째 만남을 요청했을 때, 민지는 반나절도 안 되어 연락을 해왔습니다.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습니다. 다음 날 사무소에 나타났을 때, 민지의 얼굴은 더 수척해져 있었습니다. 눈 아래 다크서클이 깊었고, 말할 때 목소리가 약간 떨렸습니다.
동수는 커피를 두 잔 내왔습니다. 테이블에 놓고 맞은편에 앉았습니다.
"서은채 씨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에요."
민지의 눈이 커졌습니다.
"작년에도, 그 전 해에도 다른 학교에서 비슷한 패턴의 민원이 있었어요. 두 건 모두 기간제 교사가 대상이었고, 두 건 모두 교사 교체나 계약 종료로 끝났어요."
민지는 커피잔을 내려놓았습니다. 손이 미세하게 떨렸습니다.
"그럼 저도 그렇게 되는 건가요?"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지금부터 다르게 움직여야 해요."
동수는 서류 한 장을 꺼냈습니다.
"서은채 씨가 녹취를 한다고 했죠. 그 녹취 파일이 실제로 있을 거예요. 우리는 그 녹취 파일이 어디에 있는지, 어떤 내용인지를 먼저 파악해야 해요. 왜냐면 그 파일이 조작되거나 선택적으로 편집되었을 경우, 그게 나중에 법정에서 가장 큰 쟁점이 될 수 있거든요."
민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이 작성하셨던 수업 일지, 상담 기록 모두 디지털로 보관해 두세요. 원본 보존이 중요해요. 그리고 지금부터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을 매일 기록하세요. 시간, 장소, 내용, 증인이 있으면 이름까지. 일기처럼 쓰지 말고 보고서처럼 쓰세요."
민지는 수첩을 꺼내 받아 적기 시작했습니다. 손이 떨렸지만, 받아 적는 속도는 빨랐습니다.
동수가 말을 이었습니다.
"서은채 씨 녹취 파일과 관련해서, 제가 직접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어요. 가까운 사람한테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한 가지 먼저 물어볼 게 있어요."
민지가 고개를 들었습니다.
"학교에 서은채 씨와 가까운 교사가 있나요? 아니면 행정 직원이라든가."
민지는 잠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행정실장님이 서은채 씨랑 친한 것 같았어요. 어머니들이랑 같이 학교 근처 카페에서 만나는 것도 본 것 같고요. 그리고 학년부장 최상훈 선생님도. 그 분이 저한테 서은채 씨를 함부로 건드리지 말라고 했거든요."
동수가 메모를 했습니다.
"행정실장 이름은요?"
"강영순이라고 해요."
동수는 메모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낮게 말했습니다.
"알겠어요. 일주일 안에 연락드릴게요."
민지가 자리를 일어날 때, 동수가 덧붙였습니다.
"선생님, 한 가지만요. 지금 학교에서 혼자 버티는 거 알아요. 그런데 지금 당장 가장 중요한 건 선생님이 무너지지 않는 거예요. 기록은 제가 같이 보고, 법리는 제가 검토해요. 선생님은 일단 건강을 지키세요."
민지는 잠시 멈췄습니다. 그 말에 눈물이 날 것 같았습니다. 참았습니다. 고개를 끄덕이고 나갔습니다.
동수는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서류를 펼쳤습니다.
일주일이 지나기 전에 연락이 왔습니다. 강철호에게서였습니다.
"야, 동수야. 그 녹취 파일 관련해서 얘기가 들어왔어. 교육청 쪽에서 이미 그 파일을 건네받았다는 말이 있어. 그것도 장학사가 직접 받아서 보관하고 있다는 얘기야."
동수는 잠시 멈췄습니다.
"장학사가 학부모한테 파일을 받았다고요?"
"받은 게 아니라 제공받았다는 거지. 민원 조사 차원에서라는 명목으로. 그런데 문제는, 그 파일 내용이 어떻게 편집됐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거야."
"원본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어요?"
"모르지. 근데 하나 더 있어. 그 파일을 서은채가 법률 조언을 받아가며 편집했다는 말이 있어."
"법률 조언을 받았다고요?"
"어느 변호사한테서 받았는지는 몰라. 근데 민원서 구성 방식이 너무 정교하다는 거 네가 먼저 느꼈잖아. 그 생각이 맞는 거야."
동수는 전화를 끊었습니다. 창밖으로 저녁 빛이 기울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오래 생각했습니다.
민원을 설계하고, 녹취 파일을 편집하고, 교육청 장학사와 연계해서 조사를 진행시키고, 언론에도 접촉한다. 이것은 학부모 개인이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법률 지식이 있어야 했고, 교육 행정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했고, 인맥이 있어야 했습니다.
누군가가 뒤에 있었습니다.
동수는 책상 서랍에서 낡은 수첩을 꺼냈습니다. 형사 시절부터 써온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새로운 이름 하나를 적었습니다. 오정민. 그리고 그 옆에 작은 물음표를 그렸습니다.
그날 밤, 민지에게 문자가 왔습니다.
"변호사님. 학교에서 오늘 교장 선생님이 부르셨어요. 교육청에서 공식 조사를 시작하겠다고 통보가 왔대요. 아동학대 신고가 정식으로 접수되었다고 하는데, 신고자가 서은채 씨인지는 확인이 안 된대요. 저 어떻게 해야 하나요."
동수는 문자를 보고 잠시 눈을 감았습니다. 예상보다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는 답장을 보냈습니다.
"지금 당장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교장한테도, 장학사한테도, 다른 교사들한테도. 혼자 대응하려고 하지 마세요. 내일 아침에 만납시다."
민지의 답장은 세 글자였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동수는 핸드폰을 내려놓았습니다. 차가운 형광등 빛 아래에서 서류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동수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다시 앉았습니다.
밤이 깊어갔습니다. 빗소리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제3장. 조사
조사라는 말은 중립적으로 들립니다.
하지만 조사를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중립이 아닙니다. 조사가 시작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하나의 낙인이 됩니다. 주변 사람들이 달라집니다. 눈빛이 달라지고, 말을 걸어오는 빈도가 줄어들고, 같은 공간에 있는데도 그 사람 주위에만 보이지 않는 경계선이 생깁니다. 박민지는 그 경계선을 학교 복도에서 매일 느꼈습니다.
공식 조사 통보가 온 날부터, 교무실 분위기가 변했습니다. 동료 교사들은 민지와 눈을 잘 마주치지 않았습니다. 말을 걸어와도 짧게 끊고 돌아갔습니다. 밥을 먹을 때 자연스럽게 자리가 만들어지는 것처럼, 민지 옆에는 자연스럽게 빈자리가 생겼습니다. 악의가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모두가 조심했습니다. 관련자가 되기 싫었을 것입니다.
교장 이희준은 민지를 다시 불렀습니다.
"박 선생, 교육청에서 면담 일정 잡겠다고 연락이 왔어요. 조사 기간 동안 수업은 계속 들어가되, 그 학생 관련해서는 각별히 조심해요.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다 기록된다고 생각하고."
민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 말이 걱정인지, 경고인지, 아니면 그냥 형식적인 말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교장이 덧붙였습니다.
"그리고 변호사 선임했다고 했죠? 학교 차원에서도 법률 자문을 받을 수 있으니까, 개인적으로 너무 예민하게 대응하지는 마요. 괜히 방어적으로 나오면 더 의심받아요."
민지는 교장실을 나오면서 생각했습니다. 변호사를 선임했다는 사실을 교장이 어떻게 알았는지. 민지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동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짧게 말했습니다.
"정보가 새고 있어요."
민지가 눈을 동그랗게 떴습니다.
"교장이 선생님 변호사 선임 사실을 안다는 건, 누군가가 서은채 쪽에 흘렸거나, 서은채가 교육청 쪽을 통해서 확인했다는 거예요. 둘 중 하나예요."
민지는 입술을 깨물었습니다.
"그럼 학교 안에 저를 감시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가요?"
"감시라기보다는, 정보가 어떤 루트로든 연결되고 있다는 거예요. 주의해야 할 건, 지금부터 학교에서 이 사건과 관련된 어떤 내용도 동료 교사들과 이야기하지 마세요. 아무도 믿지 말라는 게 아니라, 선생님 말 한마디가 다른 형태로 전달될 수 있으니까."
교육청 면담은 나흘 뒤에 잡혔습니다. 장소는 교육청 본관 소회의실이었습니다.
동수는 그 면담에 민지와 함께 들어갔습니다. 처음에 장학사 오정민이 동수의 동행을 완곡하게 거부했습니다.
"면담은 교사와 일 대 일로 진행하는 게 절차예요."
동수가 말했습니다. 조용하고 단호하게.
"법적 대리인 동석은 피조사자의 권리입니다. 거부하시면 면담 자체를 중지해야 해요."
오정민이 잠시 멈췄습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소회의실은 작은 공간이었습니다. 테이블이 하나, 의자가 네 개. 오정민 옆에는 다른 장학사 한 명이 더 있었습니다. 젊은 남성이었고, 이름은 황인택이라고 했습니다. 노트북을 펼치고 받아 적는 역할인 것 같았습니다.
면담은 두 시간 가까이 진행되었습니다.
오정민은 질문을 했습니다. 사 월부터 최근까지 민지가 최준서에게 어떤 교육적 개입을 했는지. 개별 상담 횟수, 내용, 다른 교사와의 협력 여부. 민지는 준비한 자료를 제시하며 하나씩 답했습니다.
동수는 면담 내내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오정민의 질문 방식을 주의 깊게 들었습니다.
면담이 끝나고 교육청 건물을 나오면서, 동수가 처음으로 말했습니다.
"오정민 장학사, 질문 순서가 이상했어요."
민지가 옆을 걸으며 고개를 들었습니다.
"보통 조사 면담이라면 사실 관계부터 확인해요.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런데 오 장학사는 처음부터 피해 아동의 심리 상태를 먼저 물었어요. 그리고 선생님이 그 아이와 단둘이 대화한 횟수를 반복해서 물었고요."
민지가 멈추었습니다.
"그게 왜 이상한가요?"
"단둘이 대화한 횟수를 강조하는 건, 그 상황 자체를 문제적으로 프레이밍하려는 거예요. 교사가 아이와 단둘이 대화하는 건 정상적인 교육 행위예요. 그런데 그것을 자꾸 물으면서 기록에 남기면, 나중에 그 행위가 격리나 강압으로 해석될 여지가 생겨요."
민지의 얼굴이 굳었습니다.
"그 장학사가 처음부터 저를 범인으로 보고 있다는 건가요?"
동수는 잠시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중립적이지는 않아요."
그들이 골목을 걸어 나왔을 때, 멀리서 차 한 대가 느리게 지나갔습니다. 세단이었습니다. 동수는 그 차를 잠깐 바라보았습니다. 번호판을 기억했습니다. 아무 말 하지 않았습니다.
그날 오후, 사무소로 돌아온 동수는 컴퓨터를 켰습니다. 서은채의 이름을 검색했습니다. 지역 교육 관련 기사들을 찾았습니다. 서은채의 이름은 몇 차례 등장했습니다. 학부모회 부회장 자격으로 인터뷰한 기사들이었습니다. 교육 환경 개선을 위한 학부모들의 노력, 학교와 가정의 협력 관계. 인터뷰에서 서은채의 말은 언제나 이치에 맞았습니다. 자녀 교육을 위한 학부모의 관심을 강조했고, 교사들과의 소통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했습니다.
표면은 완벽했습니다.
동수는 기사를 쓴 기자의 이름을 확인했습니다. 이정현. 지역 신문사 교육 담당 기자. 동수는 그 이름도 메모했습니다.
사흘 뒤,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민지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오전 열 시. 수업 중일 시간이었습니다.
목소리가 떨렸습니다.
"변호사님. 준서 어머니가 학교로 찾아오셨어요. 지금 교장실에 있는데, 저한테 직접 사과를 요구하고 있대요. 교장 선생님이 저보고 교장실로 오라고 하는데, 가도 될까요?"
동수는 즉시 말했습니다.
"가지 마세요. 지금 바로."
"네?"
"지금 교장실에 가면 사과를 강요당하거나, 그 자리가 녹취될 수 있어요. 수업 중이라고 하세요. 저한테 먼저 연락한다고 하세요."
민지가 잠시 침묵했습니다.
"그러면 교장 선생님이 화내실 텐데요."
"그 화를 감당하는 게 지금 나을 수 있어요. 교장실에서 뭔가 잘못 말하는 것보다."
전화를 끊고 동수는 곧바로 차를 탔습니다. 학교까지는 한 시간 거리였습니다. 그가 도착했을 때는 오전 열한 시가 넘어 있었고, 서은채는 이미 학교를 떠난 뒤였습니다.
교장 이희준은 동수를 보자 표정이 복잡해졌습니다.
"변호사님이 직접 오셨네요."
"네. 제 의뢰인 관련 사안이니까요."
교장이 헛기침을 했습니다.
"사실 학부모 쪽에서 합의를 제안했어요. 박 선생이 유감 표명을 하고, 학부모 쪽에서 민원을 취하하는 형태로요."
동수는 교장을 바라보았습니다.
"합의 내용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세요."
"자세한 건 서은채 씨 측에서 요구 사항을 문서로 보내겠다고 했어요."
"박 선생님은 아무것도 인정하거나 서명하지 않을 겁니다. 지금 단계에서 합의는 오히려 선생님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어요. 교육청 조사 중에 합의를 하면, 그게 사실상 혐의 인정으로 기록될 수 있습니다."
교장의 눈이 흔들렸습니다.
동수는 그 흔들림을 봤습니다. 교장이 모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알면서도 학교를 보호하기 위해, 아니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민지를 내밀고 싶었을 것입니다.
동수가 조용히 말했습니다.
"교장 선생님, 이 사건 제대로 들여다보면 학교도 편치 않을 겁니다. 박 선생님이 제출한 경위서를 교육청에 보고하지 않은 부분이 있어요. 사 월에 학생 폭력 사안이 있었을 때요."
교장의 표정이 굳었습니다.
"그건..."
"확인해 보겠습니다."
동수는 교장실을 나왔습니다. 복도에서 민지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수업을 다른 선생님에게 맡긴 것 같았습니다. 얼굴이 창백했습니다.
"괜찮아요?"
민지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러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습니다.
동수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복도를 함께 걸었습니다. 빈 교실에서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습니다. 급식 냄새가 복도를 채웠습니다. 창문 너머로 운동장에서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민지가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말했습니다.
"저 저 아이들이 좋아서 교사가 됐어요. 다른 이유가 없었어요. 그냥 아이들이랑 있으면 좋았거든요."
동수는 창밖을 함께 바라보았습니다.
"알아요."
"그게 이렇게 힘든 일이 될 줄은 몰랐어요."
빗소리가 다시 시작됐습니다. 창문에 빗방울이 하나씩 부딪혔습니다.
동수는 그 자리에서 한 가지를 결심했습니다.
이 사건은 끝까지 가야 했습니다.
제4장. 파일
서류에는 온도가 있습니다.
김동수는 오랜 세월 서류를 다루면서 그것을 알게 됐습니다. 어떤 서류는 차갑습니다. 숫자들이 늘어서고, 날짜가 기입되고, 도장이 찍혀 있지만 그 어디에도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고 어떤 서류는 뜨겁습니다. 손이 떨리며 쓴 글씨체, 지워진 흔적, 여백에 눌린 볼펜 자국들. 그 안에는 누군가의 두려움이 남아 있습니다.
강철호가 입수해 준 문건이 도착한 것은 목요일 오후였습니다.
등기 우편으로 왔습니다. 발신인 이름은 없었습니다. 봉투를 열자 A4 용지 열두 장이 들어 있었습니다. 교육청 내부 공문 사본이었습니다. 날짜는 두 달 전이었고, 수신처에는 장학사 오정민의 이름이 들어 있었습니다.
동수는 그 문건을 펼쳤습니다.
문건은 학교 내 교권 침해 사안에 대한 내부 처리 지침이었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이 있었습니다. 이 문건이 발송된 날짜는 서은채가 공식 민원을 넣기 삼 주 전이었습니다. 그리고 문건 내용 중에는 민원 접수 요건에 관한 세부 항목이 있었는데, 그것이 나중에 서은채의 민원서에 사용된 법률 언어와 매우 유사했습니다.
단순한 우연이라고 보기 어려웠습니다.
동수는 문건의 수신인과 발신인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발신인은 교육청 교원 지원과. 수신인 목록에 오정민 외에 두 이름이 더 있었습니다. 교육청 감사팀장 박성도, 그리고 외부 법률 자문 김상원.
외부 법률 자문.
동수는 그 이름에 손가락을 멈췄습니다. 교육청이 외부 법률 자문을 두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 자문 변호사가 같은 시기에 학부모 측에도 조언을 제공했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동수는 법조계 인맥을 통해 김상원이라는 변호사를 조회했습니다.
결과는 이틀 뒤에 나왔습니다.
김상원. 서울 소재 법무법인 공익 파트너 변호사. 전직 교육부 법제관. 교육 관련 행정 소송 전문. 그리고 한 가지 더. 서은채의 남편 최재혁이 법무법인 고문을 맡고 있는 회사와 같은 건물에 사무실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동수는 몇 가지 시나리오로 정리했습니다.
첫째, 서은채는 남편 회사와 같은 건물에 있는 변호사로부터 법률 자문을 받았고, 그 변호사가 교육청 자문도 맡고 있었다.
둘째, 교육청 내부 처리 지침이 같은 루트를 통해 서은채에게 전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셋째, 그렇다면 이것은 민원이 아니라 기획입니다.
동수는 민지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선생님, 지금 학교예요?"
"네. 수업 끝나고 교무실에 있어요."
"준서 아버지 이름이 뭐예요?"
민지가 잠깐 생각했습니다.
"최재혁이요. 어딘가 사업을 하신다고 했어요. 자세히는 모르고요."
동수는 수화기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습니다.
"알겠어요. 한 가지 더. 행정실장 강영순 씨가 서은채 씨 행사에 참석한 적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게 언제였는지 기억해요?"
"정확한 날짜는 모르겠고, 사 월 말에서 오 월 초 사이였던 것 같아요. 어머니들이랑 같이 밥 먹는 자리였던 것 같은데요."
동수는 메모를 했습니다. 그리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날 저녁, 동수는 학교 인근 지역 신문사로 찾아갔습니다. 기자 이정현을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전 연락 없이 방문했습니다. 기자는 처음에 당황했습니다. 하지만 동수가 명함을 내밀고 박민지 사건 관련해서 이야기할 게 있다고 하자, 잠시 후 만남에 응했습니다.
회의실에서 마주 앉았습니다.
이정현은 서른여섯 살이었습니다. 지역 신문사에서 칠 년째 교육 담당을 하고 있었습니다. 눈빛이 빠르게 움직이는 편이었고, 말을 할 때 손으로 제스처를 자주 썼습니다.
동수가 먼저 물었습니다.
"서은채 씨한테서 연락받은 게 언제예요?"
이정현이 눈썹을 들었습니다.
"어디서 그런 얘기를 들으셨어요?"
"민원 접수 이틀 전에 서은채 씨가 기자에게 연락했다는 정보가 있어요. 직접 확인하고 싶었어요."
이정현이 잠시 침묵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연락은 왔어요. 근데 저는 안 했어요. 기사를."
"왜요?"
"내용이 일방적이었거든요. 교사 측 주장도 들어봐야 하는데, 서은채 씨는 그 교사한테 접근하지 말라고 했어요. 자기가 원하는 각도로만 써달라고 했어요. 그게 기사는 아니잖아요."
동수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럼 그 연락 내용이 남아 있어요? 문자든, 이메일이든."
이정현이 잠시 생각했습니다.
"남아 있어요."
"그 자료를 확보할 수 있을까요? 재판이 진행될 경우 증거로 필요할 수 있어요."
이정현이 동수를 바라보았습니다.
"이거 생각보다 큰 건가요?"
동수가 말했습니다.
"커질 수 있어요."
이정현은 잠시 입술을 다물었다가 말했습니다.
"제가 직접 취재를 하고 싶어요. 그냥 자료만 주는 건 제 입장에서도 어정쩡하거든요."
동수는 생각했습니다. 기자가 이 사건을 다루면 양면이 있었습니다. 이른 공개는 서은채 측이 여론 역공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정현이 제대로 된 기자라면, 진실을 추적하는 축이 하나 더 생기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취재하세요. 대신 기사가 나가는 시점은 제가 연락드릴게요. 지금 나가면 조사에 영향을 줄 수 있어서요."
이정현이 수첩을 꺼내며 말했습니다.
"좋아요. 그 대신 저는 처음부터 양측을 취재할 거예요. 서은채 씨 측도 포함해서요."
동수가 말했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그게 맞아요."
회의실을 나오면서 동수는 비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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