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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골책방

판교에서 벌어진 스타트업과 대기업의 치열한 표준 전쟁

by 제 4의 창 2026. 5. 2.



https://youtu.be/xHb4yijGsYA

제1장. 판교의 두 얼굴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판교. 대한민국 정보기술 산업의 심장이라 불리는 이 도시는 이른 아침부터 뜨겁게 달아오릅니다. 수십 개의 첨단 기업들이 들어선 판교 테크노밸리는 세계 어느 기술 집적지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곳입니다. 서울 도심에서 불과 삼십 분 거리에 있지만, 이곳의 공기는 다릅니다. 새벽 여섯 시가 되기도 전에 주차장은 채워지고, 자정이 넘어서도 불이 꺼지지 않는 사무실이 수두룩합니다. 실리콘밸리를 꿈꾸며 세워진 이 땅에서, 오늘도 수천 명의 엔지니어와 기획자와 경영인들이 미래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달리는 자들 사이에는 언제나 방향이 다른 이들이 있습니다. 같은 길 위에서 서로 다른 목적지를 향해 달리다 보면, 결국 충돌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됩니다. 그 충돌이 단순한 사업 경쟁의 차원을 넘어서면, 그것은 전쟁이 됩니다. 총성 없는 전쟁. 법원과 협상 테이블과 국제 회의장에서 벌어지는, 어떤 의미에서는 총성이 울리는 전쟁보다 더 치열하고 더 냉혹한 싸움.

이것은 그 전쟁의 기록입니다.

김강민이 처음 이 땅에 발을 디딘 것은 지금으로부터 열두 해 전의 일이었습니다. 당시 그는 서울대학교 전기공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교에서 통신공학 박사 학위를 받은 직후였습니다. 박사 논문 주제는 대규모 기기 환경에서의 무선 통신 간섭 최소화 알고리즘이었습니다. 심사 위원회에서 만장일치로 최우수 논문 상을 받은 이 연구는 이후 국제 학술지에 세 차례 인용되었습니다. 세계 최대의 통신 장비 기업인 에릭슨과 퀄컴에서 합쳐 칠 년간 근무하며 국제 통신 표준의 실무를 몸으로 익힌 그는, 서른여섯의 나이에 귀국을 결심했습니다.

에릭슨에서의 사 년은 그에게 표준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는 국제전기통신연합 산하 작업 그룹의 실무자로 여러 차례 제네바를 오가며, 어떻게 한 기업의 기술이 전 세계의 규칙이 되는지를 가까이서 목격했습니다. 기술적 우수성이 중요하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기술을 어떤 언어로, 어떤 순서로, 어떤 관계망 안에서 제안하는가였습니다. 표준은 공학이었지만, 동시에 외교였습니다.

퀄컴에서의 삼 년은 또 다른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표준 특허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특허 라이선스가 어떻게 수익의 원천이 되는지를 배웠습니다. 퀄컴은 칩을 팔아서 버는 것만큼이나, 때로는 그보다 더 많은 돈을 특허 사용료로 벌었습니다. 전 세계 수많은 스마트폰 제조사들이 퀄컴이 설계한 규칙을 따르고 그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규칙을 가진 자가 시장을 가진다는 진실을, 김강민은 그곳에서 배웠습니다.

귀국의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그는 대한민국에서 새로운 무선 통신 표준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글로벌 기업의 부품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규칙을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이 나라의 기업들이 남이 만든 표준에 따라 움직이고, 남이 만든 규칙에 사용료를 내는 구조를 바꾸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거창한 애국심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개인적인 야망에서 비롯된 것인지, 그 자신도 정확히 구분하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그 둘은 그에게 있어서 처음부터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세워진 회사가 넥스트웨이브입니다. 처음에는 직원 일곱 명으로 시작한 작은 스타트업이었습니다. 판교의 한 공유 오피스 한 켠에서, 김강민과 그의 동료들은 밤낮없이 코드를 짜고 회로를 설계했습니다. 자본금은 김강민이 퀄컴에서 모은 개인 자금과 지인들의 소규모 투자금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사무실은 좁았고, 장비는 부족했으며, 밥은 늘 편의점 도시락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공간에는 무엇인가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확신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목표는 명확했습니다. 차세대 사물인터넷 환경에서 수백만 개의 기기가 동시에 통신할 수 있는 새로운 무선 프로토콜, 즉 통신 규약을 개발하는 것이었습니다.

프로토콜이란 컴퓨터나 통신 기기들이 서로 정보를 주고받기 위해 약속한 규칙 체계를 말합니다. 쉽게 비유하자면, 각기 다른 나라 사람들이 모였을 때 공통으로 사용하는 언어와 같습니다. 어떤 언어를 공용어로 정하느냐에 따라 그 언어를 모국어로 쓰는 나라가 압도적으로 유리해지듯, 어떤 프로토콜이 산업 표준이 되느냐에 따라 그 기술을 개발한 기업이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얻게 됩니다. 표준 특허를 보유한 기업은 경쟁자들에게 사용 허가를 내주면서 수익을 거두고, 자신들의 기술이 반영된 시장 구조 안에서 언제나 유리한 위치를 점합니다. 이것이 표준 전쟁의 본질입니다.

김강민의 넥스트웨이브가 개발한 기술은 웨이브링크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기존의 블루투스나 지그비 같은 단거리 무선 통신 기술보다 훨씬 넓은 범위를 커버하면서도, 롱텀에볼루션이라 불리는 이동통신 기술보다 전력 소모가 극도로 낮았습니다. 스마트 공장, 자율주행 차량, 스마트 시티 인프라에 최적화된 이 기술은 출시 전부터 업계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습니다. 웨이브링크의 핵심 혁신은 채널 간섭을 동적으로 감지하고 회피하는 알고리즘에 있었습니다. 수백만 개의 기기가 같은 주파수 대역을 공유하더라도 충돌 없이 통신할 수 있게 하는 이 기술은, 사물인터넷 시대가 본격화되면서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를 정면으로 공략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관심이, 모든 문제의 시작이었습니다.

대한테크. 대한민국 최대의 전자 기업이자 글로벌 시장에서 손꼽히는 통신 장비 제조사인 이 회사는 판교에서도 가장 높은 타워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임직원 수만 명, 연 매출 수십 조 원, 그리고 사십여 년의 역사. 대한테크는 대한민국 정보통신 산업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대한테크는 넥스트웨이브의 등장을 처음에는 가볍게 여겼습니다. 스타트업 하나가 만든 기술이 자신들의 독자 규격인 코어링크를 위협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대한테크는 이미 십오 년 전부터 코어링크를 개발해 왔고, 국내 수백 개의 파트너사와 협력 관계를 맺어 두고 있었습니다. 국내 스마트 공장 시장에서 코어링크의 점유율은 이미 육십 퍼센트를 넘어서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넥스트웨이브는 잠시 반짝이다 사라질 반딧불이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반딧불이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창업 삼 년째 되던 해, 넥스트웨이브는 국제전기통신연합에 웨이브링크를 공식 표준 후보로 제안했습니다. 국제전기통신연합은 유엔 산하의 기구로, 전 세계 통신 기술의 표준을 심사하고 승인하는 권위 있는 기관입니다. 이 기관에서 한 기술이 표준으로 채택된다는 것은, 그 기술이 전 세계 모든 국가와 기업이 따라야 하는 국제 규범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표준이 된 기술의 특허를 보유한 기업은 수십 년에 걸쳐 로열티 수익을 거둬들이고, 자신에게 유리한 생태계를 구성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코어링크로 독자 생태계를 구축해온 대한테크가 가장 두려워하는 시나리오였습니다.

대한테크는 그제서야 긴장했습니다.

대한테크의 부회장이자 사실상의 전략 책임자인 최동훈은 긴급 임원 회의를 소집했습니다. 대한테크 창업주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미국 하버드 경영대학원을 졸업하고 그룹 내 여러 계열사를 거치며 경영자로 단련된 최동훈은, 냉정하고 계산적인 판단으로 유명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직원들 사이에서 냉각기라는 별명으로 불렸습니다. 어떤 뜨거운 상황에서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러나 그 냉정함의 이면에는 권력에 대한 집착과, 경쟁자를 결코 용납하지 않는 본능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회의실 안에 수십 명의 임원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전략기획팀, 법무팀, 기술연구소, 대외협력팀의 수장들이 일제히 최동훈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냉각기는 그들의 시선을 받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습니다.

"웨이브링크가 국제 표준이 되면, 우리 코어링크는 죽습니다."

임원들은 침묵했습니다. 그 침묵 속에서 대한테크의 반격 계획이 시작되었습니다. 최동훈은 이어서 말했습니다. 표준 심사 과정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외교적 작업, 국내 시장에서의 배타적 협력 관계 강화, 그리고 필요하다면 법적 수단을 통한 넥스트웨이브의 발목 잡기. 세 가지 방향이 동시에 추진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습니다.

대한테크의 첫 번째 움직임은 조용했지만 치명적이었습니다. 그들은 국내의 주요 통신사 세 곳과 비밀 협약을 체결했습니다. 코어링크 방식의 기기만 자사 네트워크에 우선 접속을 허용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공식적으로는 기술 호환성 문제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실질적으로는 웨이브링크 기반의 기기들이 시장에 진입하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협약이 체결되는 과정에서, 대한테크는 통신사들에게 상당한 규모의 장비 구입 우선권과 기술 지원을 제공했습니다. 겉으로는 사업 협력이었지만, 속으로는 시장 봉쇄였습니다.

넥스트웨이브는 곧바로 이 움직임을 감지했습니다. 웨이브링크 기반의 시범 제품을 출시하려던 파트너사들이 하나둘씩 협력을 미루기 시작했습니다. 이유를 물으면 한결같은 답이 돌아왔습니다. 통신사 측에서 호환성 검토가 필요하다고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검토가 언제 끝날지는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습니다.

김강민은 분노했지만, 그것을 감정으로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대신 법무팀을 구성했습니다. 그리고 그 팀의 수장으로 한 사람을 찾아 나섰습니다.

박홍희.

그녀의 이름은 법조계에서 일종의 전설처럼 통했습니다. 고려대학교 법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사법시험에서 역대 최고 점수로 합격한 박홍희는,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판사로 칠 년을 일했습니다. 지적재산권과 기업 간 불공정 거래 분야에서 수십 건의 판결을 내렸고, 그 판결들은 하나같이 치밀한 논리와 방대한 자료 분석으로 법조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특히 그녀가 내린 특허 침해 관련 판결 한 건은 이후 대법원 판례집에 수록될 만큼 정교한 법리 구성으로 평가받았습니다.

판사직을 그만두고 변호사로 전향한 것은 사 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 더 큰 자유를 가지고 더 중요한 사건에서 싸우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판사는 사건이 들어오면 판단해야 하지만, 변호사는 사건을 선택하고 그 결과에 직접 책임을 질 수 있었습니다. 박홍희에게 그 차이는 본질적인 것이었습니다. 판결을 내리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 판결을 이끌어내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그녀가 원하는 삶이었습니다.

김강민이 박홍희를 처음 만난 것은 서울 광화문의 한 카페에서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상황을 설명했고, 박홍희는 한마디도 끊지 않고 들었습니다. 설명이 끝났을 때, 박홍희는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습니다.

"대한테크가 통신사들과 맺은 배타적 협약, 그것이 독점규제법 위반인지부터 따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시작에 불과할 겁니다."

김강민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것이 시작에 불과하다는 말의 의미를, 그는 아직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곧 알게 될 것이었습니다.

박홍희가 자리를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며 김강민은 한 가지를 느꼈습니다. 이 사람은 법을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법의 논리 자체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지금 필요한 것이 바로 그런 사람이라는 것도.


제2장. 규칙의 설계자들

어떤 기술이 세상에 나왔을 때, 그것이 얼마나 뛰어나냐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많은 곳에서 쓰이느냐, 즉 얼마나 많은 사람과 기업과 국가가 그 기술을 따르기로 동의하느냐입니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기술 전쟁에서 최후의 승자는 언제나 가장 뛰어난 기술을 만든 자가 아니라, 가장 광범위한 동의를 이끌어낸 자였습니다. 비디오 녹화 방식을 두고 벌어진 경쟁에서, 기술적으로 더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은 방식이 시장에서 패배한 것은 그 오래된 교훈을 상징하는 사례였습니다. 더 많은 기기를 먼저 시장에 깔고, 더 많은 소비자를 묶어놓은 쪽이 이겼습니다. 기술이 아니라 네트워크 효과, 즉 더 많이 쓰일수록 더 가치 있어지는 규모의 힘이 승부를 결정했습니다.

이것이 표준의 힘입니다.

국제전기통신연합의 표준 심사 과정은 기술적인 평가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각국의 대표들이 참여하는 회의를 통해 의견을 조율하고, 민간 기업들의 제안서를 검토하며, 최종적으로 전문가 위원회의 승인을 거쳐야 합니다. 이 과정은 짧게는 이 년, 길게는 오 년 이상 소요됩니다. 그리고 그 긴 과정 동안, 각 기업과 국가는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결론을 이끌기 위해 물밑에서 치열한 공작을 펼칩니다. 기술 발표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각국 대표단과의 개별 면담이고, 공식 회의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그 전날 밤의 만찬 자리입니다.

넥스트웨이브가 웨이브링크를 표준 후보로 제출한 직후, 대한테크는 자신들의 코어링크를 동시에 표준 후보로 제출했습니다. 명분은 간단했습니다. 기술 다양성과 경쟁을 통해 더 나은 표준을 도출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질적인 목적은 심사 과정을 복잡하게 만들고, 넥스트웨이브의 빠른 채택을 방해하는 것이었습니다. 두 기술이 경쟁하는 구도가 되면, 심사 기간이 길어지고 각국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한 외교전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외교전에서는 자본력이 있는 쪽이 유리했습니다.

대한테크는 코어링크를 지지하는 국가들을 확보하기 위해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에 대규모 기술 지원 협약을 체결했습니다. 표준 채택에 공동 지지를 해달라는 조건이 붙었습니다. 이것은 외교적으로도 법적으로도 매우 미묘한 행위였지만, 국제 표준 경쟁에서는 흔히 벌어지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기술 지원의 대가로 정치적 지지를 얻는 이 방식은, 어떤 규범도 명백히 위반하지 않으면서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고전적인 방법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김강민은 박홍희와 함께 긴 밤을 보냈습니다. 둘은 회의실 화이트보드 앞에 서서 상황을 분석했습니다. 박홍희는 법적 관점에서, 김강민은 기술적 관점에서 각자의 분석을 쏟아냈습니다.

"코어링크의 핵심 기술 일부가 우리 특허와 겹칩니다."

김강민의 말에 박홍희가 고개를 들었습니다.

"어느 범위까지입니까?"

"채널 다중화 방식, 간섭 제어 알고리즘, 저전력 슬립 모드 프로토콜. 세 개입니다. 우리가 이미 특허 출원을 마친 영역들입니다."

박홍희는 잠시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녀의 눈이 빠르게 움직이며 무언가를 계산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칠 년간 법원에서 쌓은 경험이 이 순간 가동되고 있었습니다. 판사로서 수없이 많은 특허 분쟁 사건을 다루었고, 어느 것이 진짜 침해이고 어느 것이 우연의 일치인지를 가려내는 눈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지금 그 눈이 김강민의 말 속에서 법리적 가능성을 찾고 있었습니다.

"특허 출원일이 코어링크의 개발 공개 일자보다 앞섭니까?"

"두 달 앞섭니다."

박홍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두 달. 그 간격이 전부였습니다. 특허법에서 출원일의 선후는 단 하루의 차이도 절대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두 달이면 충분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두 가지 전선을 동시에 열어야 합니다. 하나는 국내 공정거래 당국에 대한테크의 배타적 협약을 신고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특허 침해 소송입니다."

"동시에 두 전선을 여는 것이 전략적으로 맞습니까? 상대는 우리보다 몇 배나 큰 법무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시에 열어야 합니다. 한 전선에만 집중하면 상대도 한 곳에 모든 자원을 쏟아붓습니다. 두 전선을 동시에 열면, 상대의 자원을 분산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두 사건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배타적 협약이 위법하다는 사실은, 그들이 왜 특허 소송을 제기했는지에 대한 맥락을 제공합니다. 두 사건이 함께 전개될 때, 전체 그림이 보입니다."

김강민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불안한 빛이 스쳤습니다.

"우리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소송 비용만으로 회사가 흔들릴 수 있어요."

박홍희는 그를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기 있는 겁니다. 방법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순서가 중요합니다."

그로부터 두 주 후, 넥스트웨이브는 서울중앙지방법원에 대한테크를 상대로 특허 침해 금지 가처분 신청을 제출했습니다. 가처분이란 본안 소송을 하기 전에 임시로 상대방의 행위를 금지해달라고 법원에 요청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받아들여지면, 대한테크는 코어링크의 핵심 기능 일부를 잠정적으로 사용하지 못하게 됩니다. 시장에서 이미 운용 중인 수백만 개의 기기에 영향이 미칠 수 있는 조치였습니다. 그것은 기업에게 상당한 압박이 될 수 있었습니다.

법원이 가처분 심리 날짜를 잡는 데 삼 주가 걸렸습니다.

그 삼 주 동안 대한테크는 조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법무팀을 총동원했습니다. 대한테크의 법무 부문을 이끄는 사람은 임수연 전무였습니다. 서울대 법학과와 미국 예일대 로스쿨을 거쳐 김앤장 법률사무소에서 십이 년을 일한 뒤 대한테크에 영입된 임수연은, 국내 기업 법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협상가 중 한 명으로 불렸습니다. 박홍희와는 사법시험 동기이기도 했습니다. 같은 해 합격했지만 성적 순위에서 박홍희가 앞섰다는 사실은, 둘 사이에 언제나 보이지 않는 긴장감을 만들었습니다.

두 여성이 법정에서 만날 날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가처분 심리가 열리기 이틀 전, 대한테크는 예상치 못한 카드를 꺼냈습니다. 그들은 넥스트웨이브의 웨이브링크 특허 세 건에 대해 특허심판원에 무효 심판을 청구했습니다. 특허 무효 심판이란 이미 등록된 특허가 실제로는 특허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고 주장하며 그 특허를 무효로 해달라고 심판 기관에 요청하는 절차입니다. 이것이 받아들여지면, 넥스트웨이브의 특허 침해 주장 자체가 근거를 잃게 됩니다. 소송의 토대를 뽑아버리는 전략이었습니다.

박홍희는 이 소식을 듣자마자 김강민에게 연락했습니다.

"예상했던 수순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무효 심판을 청구했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유리한 신호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그게 유리한 신호입니까?"

"만약 우리 특허가 처음부터 유효하지 않은 것이었다면, 그들은 굳이 무효 심판을 청구할 필요가 없었을 겁니다. 무효 심판을 청구한다는 것은, 그들 스스로도 우리 특허의 효력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논리는 나중에 법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가처분 심리가 열렸습니다. 담당 판사는 서울중앙지방법원 지적재산부의 윤재호 부장판사였습니다. 법학과 공학을 복수 전공한 그는, 기술 특허 분야에서 탁월한 이해도를 가진 것으로 알려진 법관이었습니다. 변호인들이 제출하는 기술 자료를 직접 읽고 이해할 수 있는 판사는 많지 않았는데, 그는 그 드문 예에 속했습니다.

박홍희는 채널 다중화 방식에 관한 넥스트웨이브의 특허 명세서와 대한테크 코어링크의 기술 문서를 나란히 제시했습니다. 그녀는 두 문서를 비교하며, 대한테크의 기술이 넥스트웨이브의 특허 청구 범위에 문언적으로 해당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문언적 해당이란 특허 청구항에 기재된 모든 구성 요소가 침해 제품에 그대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인정되면 침해는 명백해집니다.

임수연은 이에 맞서 두 기술의 구현 방식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기술 전문가의 의견서를 제출했습니다. 표면적으로 유사해 보이지만, 내부 알고리즘의 설계 원리가 다르기 때문에 특허 침해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논리였습니다. 의견서를 작성한 전문가는 카이스트의 교수였습니다. 그의 자격과 권위는 충분했습니다.

심리는 오전 내내 이어졌습니다. 윤재호 판사는 질문을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두 변호인의 주장을 들으며 기록하고, 제출된 자료를 꼼꼼히 검토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눈이 특히 오래 머무르는 지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대한테크가 제출한 기술 의견서의 특정 단락이었습니다. 박홍희는 그 시선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결론은 사흘 뒤에 나왔습니다.

법원은 가처분 신청을 기각했습니다. 특허 침해 여부가 아직 충분히 소명되지 않았으며, 가처분이 인용될 경우 대한테크가 입을 사업상 손해가 현저하게 크다는 이유였습니다. 기각 결정문에는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문장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특허 침해 여부에 대한 판단은 본안 소송에서 충분한 심리를 거쳐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법원이 이 사건을 단순히 문전박대한 것이 아니라, 본격적인 심리의 필요성을 인정한 것이었습니다.

넥스트웨이브 사무실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습니다. 직원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았습니다. 김강민은 창밖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어깨에서 무언가 무거운 것이 내려앉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창업 이후 처음으로 맞닥뜨리는 법적 패배였습니다. 그는 판교 너머로 보이는 도심의 빌딩들을 바라보며 자신이 지금 싸우고 있는 것의 크기를 다시 한번 가늠했습니다.

박홍희는 그의 옆에 서서 조용히 말했습니다.

"가처분은 졌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본전을 다 잃은 것이 아닙니다. 진짜 싸움은 이제 시작입니다."

그 말은 위로가 아니었습니다. 전략적 판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박홍희라는 사람을 다른 변호인들과 구분하는 것이었습니다.


제3장. 배신의 윤곽

패배는 때로 더 강한 전략을 낳습니다.

가처분 기각 이후, 박홍희는 사흘을 혼자 사무실에 박혀 전략을 재구성했습니다. 책상 위에는 넥스트웨이브와 대한테크 관련 자료들이 쌓였습니다. 특허 명세서, 기술 문서, 기업 공시 자료, 언론 보도, 그리고 통신 업계의 관행에 관한 논문들. 그녀는 이것들을 하나하나 읽으며 전체 그림을 다시 그렸습니다. 법원에서 빠른 승리를 기대하는 것은 처음부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기술 특허 분쟁은 본질적으로 복잡하고, 법원도 충분한 심리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대신 박홍희가 주목한 것은 공정거래 분야였습니다.

대한테크가 국내 주요 통신사들과 맺은 배타적 협약. 그 내용이 외부에 알려진 것은 넥스트웨이브 내부의 한 제보자 덕분이었습니다. 제보자는 익명을 요청했지만, 그가 건네준 자료는 충분히 구체적이었습니다. 협약서의 초안, 내부 이메일, 회의 보고서 등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박홍희는 이 자료들을 받아 들고 밤새 검토하면서, 이것이 공정거래법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분석했습니다.

박홍희는 이 자료를 공정거래위원회에 제출하면서, 대한테크의 행위가 시장 지배적 지위 남용에 해당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시장 지배적 지위 남용이란, 특정 시장에서 압도적인 영향력을 가진 기업이 그 힘을 이용해 경쟁자의 시장 진입을 부당하게 방해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이것은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이 엄격히 금지하는 행위입니다. 신고서에는 구체적인 협약의 내용과 그로 인한 시장 진입 장벽의 효과가 상세히 기술되어 있었습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조사에 착수했습니다.

이 소식은 대한테크 내부를 흔들었습니다. 공정위 조사는 단순한 행정 절차가 아닙니다. 조사 과정에서 내부 문서가 공개되고, 임직원들이 조사관들의 심문을 받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최종 결론이 제재로 이어질 경우, 기업의 이미지와 주가에 직접적인 타격이 옵니다. 대한테크 주식을 보유한 수십만 명의 개인 투자자들이 있었고, 기관 투자자들은 규제 리스크에 특히 민감하게 반응했습니다.

최동훈은 분노했습니다. 평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그였지만, 이번만큼은 달랐습니다. 자신이 가장 공들인 전략이 내부에서 새어 나갔다는 사실이 그를 격분하게 만들었습니다. 보안을 철저히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협약을 체결한 것은 극소수의 인원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외부로 흘러나갔습니다. 그것은 기술적인 실패가 아니라 인간적인 배신이었습니다.

최동훈은 임수연을 직접 불러 말했습니다.

"넥스트웨이브 내부에서 자료가 새어 나갔습니다. 그 경로를 찾아내십시오."

임수연은 고개를 숙이며 답했습니다.

"이미 확인 중입니다. 그런데 부회장님,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저희가 더 큰 문제를 간과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무슨 뜻입니까?"

임수연은 잠시 망설였습니다. 그녀는 법무팀장으로서 회사를 보호해야 할 의무와, 변호사로서 법적 진실을 외면할 수 없다는 직업적 양심 사이에서 이미 갈등하고 있었습니다. 그 갈등을 최동훈이 눈치채지 못하기를 바라며 그녀는 말을 이었습니다.

"넥스트웨이브의 웨이브링크 기술, 원래 어디서 나온 것인지 다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말은 짧았지만, 이후의 모든 사건을 예고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열흘 뒤, 대한테크는 반격의 카드를 꺼냈습니다. 그들은 기자회견을 열고, 웨이브링크의 핵심 기술이 대한테크의 연구소에서 유출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증거로 제시한 것은 삼 년 전 대한테크를 퇴직하고 넥스트웨이브에 합류한 연구원 두 명의 경력이었습니다. 기자회견은 미리 준비된 자료와 함께 진행되었습니다. 두 연구원의 이름과 사진, 대한테크 재직 시절 참여했던 프로젝트의 이름, 그리고 웨이브링크와의 기술적 유사성을 주장하는 도표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대한테크의 주장은 이러했습니다. 이 두 명의 연구원이 대한테크 재직 시절 개발하던 기술의 핵심 아이디어를 가지고 나와 웨이브링크에 적용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영업 비밀 침해이며, 기술 탈취에 해당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기자회견장에 참석한 기자들이 질문을 쏟아냈고, 대한테크의 홍보팀은 준비된 자료를 배포했습니다. 그날 저녁 주요 뉴스에서 이 기자회견이 다루어졌습니다.

넥스트웨이브는 하루 만에 언론에서 기술 탈취 의혹 기업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김강민은 이 소식을 듣고 굳은 표정으로 박홍희를 찾아갔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분노와 당혹감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기술력으로 싸운다고 생각했는데, 상대는 기술이 아니라 사람의 평판을 공격하고 있었습니다.

"그 두 사람은 저희 회사의 핵심 인재입니다. 이정우 박사와 최선아 책임연구원이에요. 그들이 대한테크를 떠난 건 회사의 연구 방향에 동의하지 못해서였습니다. 기술을 훔쳐 나온 게 아닙니다."

박홍희는 들으면서 메모를 했습니다.

"그들이 대한테크 재직 중에 서명한 서류가 있습니까? 비밀 유지 서약이나 경쟁 금지 약정 같은 것들이요."

"있을 겁니다. 대기업이니까요."

"그 서류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를 면밀히 검토해야 합니다. 그리고 웨이브링크의 기술 개발 타임라인을 완벽하게 정리해야 합니다. 어느 시점에 어떤 기술이 어떤 방식으로 개발되었는지, 내부 커밋 기록, 실험 일지, 발표 자료 모두를 확보해 주십시오."

커밋 기록이란 소프트웨어 개발에서 코드의 변경 사항을 기록하고 저장하는 시스템을 말합니다. 날짜와 시각이 자동으로 기록되기 때문에, 어떤 기술이 언제 개발되었는지를 증명하는 강력한 증거가 될 수 있었습니다.

김강민은 잠깐 망설이다가 말했습니다.

"변호사님,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두 연구원이 대한테크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기술적 영감을 얻었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과 기술 탈취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엔지니어는 어디서 근무하든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일합니다. 그 경험 자체를 훔쳤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박홍희는 펜을 내려놓고 말했습니다.

"당신이 지금 한 말이 법정에서 가장 중요한 논점이 될 겁니다. 지식과 경험은 사람에게 속한 것이고, 비밀 정보는 회사에 속한 것입니다. 그 경계를 명확히 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입니다."

넥스트웨이브 내부는 술렁였습니다. 이정우 박사와 최선아 연구원은 갑작스러운 언론 공세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특히 최선아 연구원은 대한테크에서의 경험이 웨이브링크 개발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스스로도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박홍희를 찾아와 자신이 기억하는 모든 것을 털어놓았습니다. 어느 회의에서 무슨 이야기가 나왔는지, 어떤 연구 방향이 검토되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웨이브링크의 설계와 어떻게 다른지를 조목조목 설명했습니다.

박홍희는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내심 안도했습니다. 최선아 연구원이 기억하는 대한테크에서의 연구 방향은 웨이브링크와 목표는 유사했지만, 접근 방식은 본질적으로 달랐습니다. 그것이 이후 법정에서 중요한 증언이 될 것이었습니다.

한편, 이 소동 한가운데서 또 다른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대한테크의 배타적 협약에 대한 현장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조사관들이 대한테크 본사와 협약을 맺은 통신사 세 곳을 방문해 자료를 확보했습니다. 조사는 조용하고 신속하게 이루어졌지만, 그 파장은 결코 작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시점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인물이 등장했습니다.

정우진. 그는 대한테크 전략기획팀의 팀장으로, 최동훈 부회장의 최측근으로 알려진 인물이었습니다. 배타적 협약을 통신사들과 직접 협상하고 체결한 당사자이기도 했습니다. 대한테크에서 십오 년을 일하며 최동훈의 신임을 받고, 그의 전략을 실행하는 도구로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넥스트웨이브에 접촉을 시도했습니다.

전화를 받은 것은 김강민이었습니다. 모르는 번호였지만,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습니다.

"만나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이 전화는 공식적인 것이 아닙니다."

김강민은 그 떨리는 목소리에서 무언가를 느꼈습니다.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리고 두려움을 감수하면서도 전화를 건 이유가 있다는 것도.

김강민은 박홍희와 상의했습니다. 박홍희는 신중하게 말했습니다.

"만나되, 혼자 가지 마십시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어떤 약속도 하지 마십시오.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그 자체가 중요한 정보입니다. 그러나 그가 어떤 목적으로 접근하는지를 먼저 파악해야 합니다. 선의일 수도 있고, 대한테크의 함정일 수도 있습니다."

이틀 뒤, 김강민과 박홍희는 서울 강남의 한 호텔 커피숍에서 정우진을 만났습니다. 정우진은 파리하고 초조한 얼굴이었습니다. 주위를 살피며 자리에 앉은 그는 커피를 시켰지만 마시지 않았습니다. 손이 조금씩 떨리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는 주위를 살피며 조용히 말했습니다.

"배타적 협약을 체결할 때, 최동훈 부회장이 직접 지시했습니다. 그리고 그 협약서에 허위 내용이 들어가 있습니다. 기술 호환성 문제가 있다고 기재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기술적 호환성 검토 자체를 하지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넥스트웨이브를 배제하는 것이 목적이었고, 그 명분을 만들기 위해 서류를 꾸민 겁니다."

박홍희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물었습니다.

"그것을 증명할 자료가 있습니까?"

정우진은 잠시 침묵한 뒤 말했습니다.

"있습니다."

그 한마디가, 이 전쟁의 흐름을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제4장. 증거의 무게

증거는 무겁습니다. 단순히 물리적으로 무거운 것이 아니라, 그것을 손에 쥔 사람의 삶을 무겁게 만든다는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진실을 드러내는 증거는 때로 그것을 품고 있는 사람을 파괴합니다. 정우진이 가져온 자료는 두꺼운 파일 하나였습니다. 내부 이메일, 회의 녹취록, 결재 문서, 그리고 협약서의 초안과 수정본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가방에서 꺼내 테이블 위에 놓을 때, 마치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사람처럼 깊은 숨을 내쉬었습니다.

박홍희는 자료를 받아 들고 하루 밤을 꼬박 새워 검토했습니다. 그녀의 사무실 불빛은 새벽 네 시가 되어도 꺼지지 않았습니다. 자료 하나하나를 읽으며 형광펜으로 표시하고, 날짜와 발신인과 수신인을 정리하고, 전체 흐름을 시간 순서로 재배열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들은 기대를 훨씬 넘는 것들이었습니다.

배타적 협약의 기술 호환성 근거로 제시된 내부 보고서가 있었는데, 그 보고서의 작성일이 협약 체결일 이후로 되어 있었습니다. 즉, 협약을 먼저 맺고, 그것을 정당화하는 서류를 나중에 만든 것이었습니다. 서류의 날짜가 거짓이었습니다. 박홍희는 이 발견에 잠시 숨을 멈추었습니다. 단순한 공정거래법 위반이 아닌, 증거 서류의 위조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민사를 넘어 형사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제였습니다.

더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협약서의 초안에는 기술 호환성 검토 결과를 첨부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최종 서명본에는 그 조건이 삭제되어 있었습니다. 협상 과정에서 통신사 측이 서류를 요구했고, 대한테크가 그 요구를 사후에 해소하기 위해 보고서를 역으로 작성했다는 정황이 이메일 대화 속에서 뚜렷하게 드러났습니다.

박홍희는 이 사실을 김강민에게 보고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에는 기대한 것과 다른 표정이 있었습니다. 신중함이었습니다.

"이 자료를 그대로 공정위에 제출하거나 법정에서 사용하려면, 몇 가지를 먼저 확인해야 합니다."

"무엇입니까?"

"정우진 씨가 이 자료를 어떤 방식으로 가지고 나왔는지를 따져야 합니다. 회사 내부의 기밀 자료를 무단으로 반출한 것이라면, 그 자체로 법적 문제가 생깁니다. 또한 이 자료가 법원에서 증거로 채택되려면 취득 방법의 적법성이 검토되어야 합니다."

김강민은 생각하지 못한 지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자료를 쓸 수 없는 겁니까?"

"아직 단정할 수 없습니다. 방법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습니다. 정우진 씨가 공익 신고자로서 공식적으로 신고 절차를 밟는다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공익 신고자 보호법에 따르면, 공익을 위한 내부 고발의 경우 그 자료의 적법성 문제가 상당 부분 해소될 수 있습니다."

"정우진 씨가 그 길을 갈 의향이 있을까요?"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는 지금 공식적인 입장이 아닌 상태에서 우리를 만났습니다. 공익 신고자로 나선다는 것은 자신의 직장과 신분을 건다는 의미입니다.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닙니다."

박홍희는 정우진의 처지를 법적으로만 분석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이해하려 했습니다. 십오 년을 대한테크에 바쳐온 사람이 어떤 감정 상태에 있는지, 어떤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자리에 나온 이유가 무엇인지를.

박홍희가 정우진을 다시 만난 것은 사흘 뒤였습니다. 이번에는 김강민 없이 혼자였습니다. 만남은 같은 호텔이 아니라, 서울 종로의 작은 찻집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한 정우진의 선택이었습니다.

박홍희는 정우진에게 상황을 명확하게 설명했습니다. 공익 신고자 보호법의 내용, 신고 절차, 그리고 그에 따른 법적 보호의 범위를 하나하나 짚어 주었습니다. 신고를 하면 신분이 보호되고, 불이익한 처우를 받을 경우 법적 구제를 받을 수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동시에 위험도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신고를 하더라도 직장을 유지하기는 어려울 것이며, 대한테크가 다른 방식으로 압박을 가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법이 보호한다고 해도, 현실적인 불이익을 완전히 막는 것은 어렵다는 것을.

정우진은 오랜 침묵 끝에 말했습니다.

"저는 이 회사에 십오 년을 바쳤습니다. 그런데 그 십오 년 동안 쌓인 것이 이런 일을 하는 도구로 쓰였습니다. 저도 거기에 일부 가담했다는 것을 압니다. 협약서를 직접 작성하고 통신사들과 협상한 것도 저입니다. 그 당시에는 그게 회사를 위한 일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이 옳은 일이었는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이제는 다르게 살고 싶습니다."

그는 공익 신고를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정우진이 신고서에 서명하기 이틀 전, 대한테크 내부에서 그에 대한 움직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은 정우진이 자료를 반출했다는 사실을 대한테크 보안팀이 감지한 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디지털 자료의 이동 흔적을 추적한 보안팀은 정우진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정우진에게 업무 감사가 시작된다는 통보가 내려왔습니다.

정우진은 박홍희에게 즉각 연락했습니다. 박홍희는 그에게 지금 당장 신고를 접수하라고 말했습니다. 감사가 시작되기 전에 공익 신고자의 지위를 확보해야 했습니다. 공익 신고가 먼저 접수되면, 이후의 업무 감사가 보복성 조치로 볼 수 있는 근거가 생겼습니다.

정우진의 공익 신고는 공정거래위원회에 접수되었습니다. 이 신고와 함께 제출된 자료들은 조사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공정위 조사관들은 대한테크의 협약서 작성 경위와 날짜 조작 여부에 집중했습니다. 조사의 깊이와 범위가 달라졌습니다.

대한테크는 즉각 반박했습니다. 정우진의 신고가 개인적인 불만에서 비롯된 것이며, 자료의 진위를 보장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정우진이 회사의 기밀을 무단으로 반출했다는 이유로 그를 업무상 배임 혐의로 고소했습니다. 예상된 반응이었습니다. 박홍희는 이 고소가 공익 신고자에 대한 보복성 조치에 해당한다는 주장을 즉각 제출했습니다.

싸움은 이제 네 개의 전선에서 동시에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특허 침해 소송, 공정거래 조사, 기술 탈취 혐의, 그리고 공익 신고자 보호. 각각의 전선에서 법리적 공방이 이어지고 있었고, 그 모든 전선이 서로 얽혀 있었습니다. 이것은 박홍희가 처음부터 그린 그림이었습니다. 복수의 전선을 동시에 열어 상대의 법무 자원을 분산시키고, 각 전선에서의 발견이 다른 전선에 영향을 미치도록&nb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