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롤로그】
러시아 문학의 거장 표도르 도스토옙스키는 1860년대 후반, 격동하는 러시아 사회 한복판에서 하나의 질문을 던졌습니다. 진정으로 선한 인간이 이 세계에 존재한다면, 그는 과연 어떤 운명을 맞이하게 될까. 작가는 그 답을 소설 「백치」에 담았습니다. 농노 해방과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러시아 사회는 급격히 변화하고 있었고, 물질과 욕망이 인간의 내면을 잠식하던 시대였습니다. 귀족과 신흥 자본가, 이상주의자와 허무주의자가 뒤엉킨 그 시대는 인간이 인간을 얼마나 쉽게 소모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지금부터 그 시대를 살아간 한 순수한 영혼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제1장】 스위스에서 온 공작
겨울의 문턱에서 러시아로 향하는 기차가 어둠 속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차창 밖으로 눈 덮인 들판이 끝없이 펼쳐졌고, 지평선은 납빛 하늘과 희뿌연 눈 사이 어딘가에서 경계를 잃고 있었습니다. 객차 안은 석탄 냄새와 가죽 냄새, 그리고 낯선 사람들의 체온으로 묘하게 뒤섞여 있었습니다. 철로 위를 달리는 바퀴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고, 그 리듬 위로 승객들의 낮은 숨소리와 간헐적인 기침 소리가 겹쳤습니다. 대부분의 승객들은 저마다의 침묵 속에 웅크려 있었지만, 그 침묵이 모두에게 동일한 무게로 내려앉지는 않았습니다.
한쪽 구석에 젊은 남자가 앉아 있었습니다. 나이는 스물여섯 살 남짓이었고, 몸은 호리호리했습니다. 허름한 외투는 스위스의 추운 산간 지방에서나 어울릴 법한 것이었고, 소매 끝이 닳아 있었으며 단추 하나가 실로 겨우 붙어 있었습니다. 손에는 작은 보따리 하나만이 들려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레프 니콜라예비치 미시킨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공작이라 불렀지만, 그 호칭에 어울리는 재산도, 지위도, 화려함도 그에게는 없었습니다.
미시킨은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눈발이 유리창에 부딪혀 순식간에 녹아내렸고, 그 모습을 그는 아무런 감정 없이 지켜보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의 내면에는 어떤 기대와 두려움이 조용히 뒤섞이고 있었습니다. 러시아는 그에게 낯선 땅이었습니다. 어릴 적 심한 간질 발작으로 인해 치료를 받으러 스위스로 건너간 이후, 오랜 세월을 그곳에서 보냈던 것입니다. 그는 산과 호수와 소박한 농가를 벗 삼아 자랐고, 도시의 소음과 인간의 탐욕에는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스위스의 의사 슈나이더는 그를 성심껏 돌보아 주었지만, 어느 날 조용히 말했습니다. 이제 당신은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사람들 속에서만 비로소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미시킨은 그 말을 마음에 새기고 기차에 올랐습니다. 두려움과 함께, 그러나 물러서지 않기로 결심하면서.
맞은편에는 두 명의 남자가 앉아 있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파르푄 로고진이었습니다. 검은 눈동자에 굵은 눈썹, 거친 손을 가진 그는 한눈에 보아도 강렬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로고진은 방금 전까지 술을 마셨는지 뺨이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라 있었고, 그 눈빛에는 무언가를 집요하게 쫓는 듯한 열기가 담겨 있었습니다. 그는 부유한 상인의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막대한 유산을 받을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세상을 향한 그의 시선은 언제나 무언가를 붙잡으려는 사람의 그것이었습니다. 욕망과 불안이 한데 뒤엉킨, 결코 편안해지지 못하는 눈빛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로고진은 처음에 미시킨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허름한 차림새와 단순해 보이는 표정이 그런 인상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로고진은 묘한 혼란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미시킨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과장하거나 낮추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병을 앓았던 것도, 스위스에서 가난하게 지냈던 것도, 러시아에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도 조금도 부끄럽지 않게 이야기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약점을 드러낼 때 반드시 무언가를 덧붙입니다. 변명이든, 자조든, 혹은 상대방의 반응을 먼저 차단하는 방어든. 그런데 미시킨에게는 그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그냥 말했습니다. 사실을 사실로서.
로고진은 나스타샤 필리포브나라는 여인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름이 나오는 순간, 로고진의 목소리는 달라졌습니다. 무언가에 사로잡힌 듯한, 그 여인에 대한 광기 어린 집착이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스며들었습니다. 나스타샤 필리포브나는 토츠키라는 나이 든 귀족의 후원 아래 자랐다는 것, 아름답고 당당하지만 그 아름다움이 오히려 그녀를 불행으로 끌어당기고 있다는 것을 로고진은 열에 들뜬 목소리로 늘어놓았습니다. 그는 그녀를 처음 보았던 날을 이야기할 때 목이 메는 것 같았습니다. 그 한 번의 만남이 자신의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고, 그 얼굴을 한 번 보고 나서부터 아무것도 예전과 같지 않게 되었다고. 로고진의 눈빛에는 광기가 담겨 있었지만, 그 광기 아래 깊은 곳에는 진심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미시킨을 멈추게 했습니다.
미시킨은 조용히 들었습니다. 그는 로고진을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그 집착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알면서도, 그 감정 속에 담긴 인간의 고통만큼은 진심으로 이해하려 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타인의 감정을 그 형태로 판단합니다. 집착은 나쁜 것이고, 절제는 좋은 것이라고. 그러나 미시킨은 그 감정이 어디서 왔는지, 그 안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를 먼저 보려 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배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그가 타고난 방식이었습니다.
기차는 마침내 상트페테르부르크 역으로 들어섰습니다.
역사의 문이 열리자 차갑고 습한 공기가 물밀듯 밀려왔습니다. 미시킨은 짧게 숨을 들이마셨습니다. 낯선 도시의 냄새, 낯선 군중의 소음, 낯선 언어의 억양이 그를 둘러쌌습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저마다의 방향으로 흩어졌고, 짐꾼들의 외침과 마차 소리가 역사 안에 가득 울렸습니다. 이 모든 것이 그에게는 처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뒷걸음치지 않았습니다. 그저 조용히 보따리를 들고, 처음으로 그가 태어난 나라의 땅 위에 두 발을 디뎠습니다.
미시킨의 첫 목적지는 에판친 장군의 집이었습니다. 에판친 장군의 부인 리자베타 프로코피예브나는 미시킨 가문과 먼 친척 관계에 있었습니다. 혈연의 끈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희미한 연결이었지만, 미시킨에게는 그것이 이 도시에서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연줄이었습니다. 그는 그 희미한 연결이 자신을 거부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도 문을 두드리기로 했습니다. 두드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으니까.
에판친 가의 저택은 크고 위엄 있었습니다. 돌계단 위로 두꺼운 커튼이 드리워진 창들이 늘어서 있었고, 문 앞에는 제복을 입은 하인이 서 있었습니다. 건물의 외벽에는 세월이 남긴 무게가 배어 있었고, 그 무게는 이 집 안에 사는 사람들이 어떤 세계를 살아가는지를 말없이 전했습니다. 미시킨은 주저함 없이 문을 두드렸습니다. 하인은 그의 허름한 차림새를 한 번 훑어보더니 잠시 망설였지만, 미시킨의 표정에는 비굴함도, 당당함도, 계산도 없었습니다. 그저 담담한 솔직함만이 있었고, 하인은 그것에 어쩐지 압도당하듯 그를 안으로 들였습니다.
기다리는 동안 미시킨은 저택 안을 둘러보았습니다. 높은 천장과 묵직한 가구들, 벽에 걸린 초상화들. 그것들은 저마다의 역사와 허세를 담고 조용히 서 있었습니다. 어떤 초상화 속 인물은 근엄한 눈빛으로 방문객을 내려다보았고, 또 어떤 인물은 화가가 잡아낸 한 순간의 표정 속에 삶의 피로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미시킨은 그 화려함에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것들을 그저 사물로 바라보았고, 그 안에 담긴 인간의 욕망이 무엇인지를 어렴풋이 감지하면서도 그것을 굳이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이윽고 에판친 장군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는 풍채 좋은 중년의 남자였고, 오랜 군인 생활과 사교계에서 갈고닦은 세련됨을 온몸에 두르고 있었습니다. 그는 미시킨을 보자 당혹스러운 표정을 잠깐 드러냈다가 곧 공손하고 능숙한 미소로 그것을 덮었습니다. 그것은 오랜 훈련에서 나온 반응이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아 보이는 것. 그러나 미시킨은 그 미소 뒤에 잠깐 스쳐 지나간 당혹감을 보았습니다.
대화는 짧았습니다. 미시킨은 자신의 사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았습니다. 재산이 없고, 아는 사람도 없으며, 지금 당장 머물 곳도 마땅치 않다는 것을. 그러나 그는 구걸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친척이라는 이유로 문을 두드렸고, 어떤 도움이 가능할지 솔직하게 물었습니다. 장군은 그 솔직함에 어딘가 무장 해제된 듯한 표정이 되었습니다. 사교계에서 수십 년을 살아온 그는 모든 말 뒤에 의도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의 말에는 의도가 없었습니다. 그것이 오히려 더 낯설고 신뢰롭게 느껴졌습니다. 그는 미시킨에게 잠시 머물 공간을 내어주겠다고 했습니다. 조심스럽고 형식적인 친절이었지만, 미시킨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그날 저녁, 에판친 부인과 세 딸이 미시킨 앞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부인 리자베타는 강인한 의지와 따뜻한 감정이 공존하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미시킨을 처음 보는 순간부터 그를 주의 깊게 관찰했습니다. 큰 딸 아델라이다는 화가로서의 눈을 가진 여인이었고, 둘째 알렉산드라는 세 자매 중 가장 차분하고 사려 깊었습니다. 그리고 막내 아글라야는 눈부신 미모와 날카로운 눈빛을 가진 소녀였습니다. 그녀는 미시킨을 처음 보는 순간부터 그를 꿰뚫어 보는 것 같은 시선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경계도, 관심도, 또는 그 둘 다이기도 한 시선이었습니다. 그녀는 이미 많은 것을 보아온 사람처럼, 그러나 아직 진심으로 움직인 적이 없는 사람처럼 그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미시킨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아글라야의 눈을 조용히 바라보면서 그는 그녀가 무언가 상처를 품고 있다는 것을, 그 화려한 외모 뒤에 단단히 잠긴 문이 있다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그 첫 만남에서 아무도 그것을 말로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무언가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방식으로, 아주 조용히.
【제2장】 나스타샤 필리포브나의 밤
나스타샤 필리포브나의 이름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사교계에서 특별한 울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이름을 들으면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표정을 지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경탄을 담아 눈을 빛냈고, 어떤 이들은 도덕적 우월감을 내세우며 입꼬리를 내렸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은밀한 욕망을 들키지 않으려 애써 표정을 지웠습니다. 그 이름 하나가 사람들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처럼 작용했습니다. 그녀는 아름다웠습니다. 그 아름다움은 단순히 외모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불꽃처럼 뜨겁고 불안정하며, 가까이 다가서는 자를 태울 수도 있는 종류의 아름다움이었습니다.
나스타샤는 어린 시절 부모를 잃었습니다. 그 상실은 단순한 슬픔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어린아이에게 보호자의 부재는 곧 세상에 홀로 던져지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녀를 거두어 키운 것은 토츠키라는 부유한 귀족이었습니다. 그는 겉으로는 그녀의 후견인을 자처했지만, 그 관계의 실체는 훨씬 어두운 것이었습니다. 나스타샤가 성장하면서 그 어둠은 더욱 짙어졌고, 그녀는 그 안에서 자신을 지키는 방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그녀는 세상보다 먼저 차가워졌습니다. 분노와 자기혐오, 그리고 그것들을 감추기 위한 당당함이 그녀의 내면에 층층이 쌓여갔습니다. 그 당당함은 때로는 자기 파괴적인 방식으로 표출되었고, 그것이 주변 사람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것, 즉 자신의 의지를 지키는 방식이었습니다.
토츠키는 이제 그녀로부터 손을 떼고 싶어했습니다. 그는 에판친 장군의 딸과의 결혼을 원했고, 그러기 위해 나스타샤를 정리해야 했습니다. 그것은 인간을 물건처럼 처리하는 방식이었지만, 그 세계에서는 그것이 당연한 절차처럼 통용되었습니다. 계획은 단순했습니다. 나스타샤에게 거액의 지참금을 주고 에판친 장군의 비서인 가냐와 결혼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가냐는 야망 있는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사회적으로 출세하고 싶었고, 그 욕망이 그의 모든 판단 기준이었습니다. 그는 나스타샤의 과거를 알면서도 그 지참금에 눈이 멀어 결혼을 승낙하려 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그녀를 사랑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그 결혼은 투자였습니다.
미시킨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다음 날, 그는 에판친 장군의 저택에서 가냐를 만났습니다. 두 사람은 같은 공간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미시킨은 탁자 위에 놓인 한 장의 사진을 보게 되었습니다. 나스타샤 필리포브나의 초상이었습니다.
미시킨은 그 사진 앞에서 오래 멈추었습니다. 사진 속 여인은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 시선에는 세상을 향한 도전이 담겨 있었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그 도전의 가장 아래, 아주 깊은 곳에, 한없이 지쳐 있는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미시킨은 그것을 보았습니다. 아름다움이었지만, 그보다 더 깊은 곳의 무언가였습니다. 오래된 상처와 채워지지 않은 갈망,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스스로 파괴하려는 듯한 위태로운 빛이 그 눈동자에 담겨 있었습니다.
그는 가냐에게 조용히 말했습니다. 이 여인은 매우 고통받고 있는 사람이라고. 가냐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나스타샤를 계산의 대상으로만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외모는 그에게 자산이었고, 그녀의 내면은 관심 밖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같은 사진을 보면서 전혀 다른 것을 보고 있다는 사실이, 그 순간 이후 벌어질 모든 일들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날 저녁, 나스타샤 필리포브나의 집에서 작은 모임이 열렸습니다.
미시킨도 그 자리에 함께했습니다. 그가 그곳에 가게 된 것은 어떤 의도에서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흐름이 그를 그곳으로 이끌었고, 그는 거스르지 않았습니다. 나스타샤의 저택은 화려했습니다. 넓은 응접실, 촛불과 샹들리에의 빛, 비단 커튼과 향수 냄새. 높은 천장에서 내려오는 불빛이 손님들의 얼굴 위로 따뜻하게 퍼졌지만, 그 온기는 진심이 아닌 연출에 가까웠습니다. 미시킨의 눈에는 그 화려함이 어딘지 쓸쓸하게 보였습니다. 마치 아무도 진정으로 따뜻한 시선을 보내지 않는 공간처럼. 사람들이 모여 있었지만, 그들 사이에 흐르는 것은 온기가 아니라 계산이었습니다.
나스타샤가 방에 들어서는 순간, 공기가 달라졌습니다.
그녀의 존재 자체가 공간의 무게를 바꾸었습니다. 그녀의 눈빛은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녀는 방 안에 모인 사람들을 한 명씩 훑어보았고, 그 시선이 미시킨에게 닿는 순간 잠깐 멈추었습니다. 그것은 극히 짧은 순간이었지만, 미시킨은 그것을 느꼈습니다. 그녀의 시선 속에 있던 것은 호기심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인식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다르다는, 아직 판단하기 어렵지만 다른 종류의 사람이라는 인식.
모임은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토츠키와 에판친 장군이 조율해 놓은 계획, 즉 나스타샤와 가냐의 결혼 문제가 그날 밤 결판이 날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대화를 이어갔습니다. 그것이 그 사교계의 방식이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항상 가장 형식적인 언어로 처리되었습니다. 나스타샤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어떻게 거래되고 있는지를. 그리고 그 자리에서 그녀는 스스로 그 거래의 주인이 되기로 했습니다.
로고진이 나타난 것은 그 밤이었습니다. 그는 오래전부터 나스타샤에게 광적으로 집착해 왔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남긴 유산의 일부로 엄청난 액수의 돈을 들고 왔습니다. 돈다발이 탁자 위에 놓이는 순간 방 안의 시선이 일제히 그것으로 향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돈 앞에서 얼마나 빠르게 반응하는지를 보여주는 순간이었습니다. 로고진은 그 돈을 나스타샤에게 바치겠다고, 자신과 함께 떠나달라고 외쳤습니다.
응접실은 순식간에 긴장감으로 가득 찼습니다. 로고진의 눈은 열병처럼 빛났고, 그 안에는 사랑이라 부르기에는 너무 격렬하고 집착이라 부르기에는 너무 순수한 무언가가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로고진 자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나스타샤는 그 돈 다발을 불꽃 속에 던졌습니다. 벽난로 안에서 지폐가 타오르기 시작했고, 방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숨을 삼켰습니다. 그것은 계획된 도발이었고, 동시에 절망적인 외침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그 돈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어떤 대가로도 자신의 영혼은 팔지 않겠다는 것을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그것은 토츠키를 향한 분노이기도 했고, 가냐를 향한 경멸이기도 했으며, 자신을 그저 아름다운 물건으로 바라보는 모든 시선들을 향한 거부이기도 했습니다.
미시킨은 그 순간 나스타샤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 행동 속에서 그는 분노가 아닌 비명을 들었습니다. 부서진 자존심이 아닌, 끝내 꺾이지 않으려는 인간의 마지막 저항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 행동이 나스타샤를 어떤 곳으로 이끌지도 예감했습니다. 스스로를 파괴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지키려는 사람은, 결국 그 파괴의 끝에서 무엇을 만나게 되는지를.
그날 밤, 나스타샤는 로고진과 함께 사라졌습니다.
미시킨은 그 자리에 남아 있었습니다. 소란이 가라앉은 응접실에서, 꺼져가는 촛불 아래에서, 벽난로 속에서 재가 되어가는 지폐들 곁에서, 그는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하나 둘 자리를 뜨고, 이윽고 그 화려했던 응접실이 텅 비어버렸을 때도 그는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무언가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결코 단순한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그는 그 조용한 자리에서 느끼고 있었습니다.
【제3장】 두 세계 사이에서
나스타샤가 떠난 다음 날부터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돌아갔습니다.
사교계는 여전히 분주했습니다. 저택마다 모임이 열렸고, 소문은 술렁이다가도 이내 다른 화젯거리에 자리를 내주었습니다. 어제의 충격은 오늘의 안주가 되었고, 그것이 내일에는 잊힐 것이었습니다. 그 세계는 그렇게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미시킨의 내면에서는 무언가가 조용히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나스타샤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했습니다. 그녀가 로고진을 따라간 것이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그것이 오히려 자기 파괴에 가깝다는 것을 그는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알면서도 막을 수 없었다는 사실이 그의 마음 한 켠에 무게로 남았습니다.
그는 에판친 장군 집에 머물면서 차츰 그 집안의 사람들과 가까워졌습니다. 에판친 부인 리자베타는 처음에는 미시킨을 기이한 존재로 보았습니다. 그의 솔직함과 예측 불가능한 반응들이 그녀에게는 불편했습니다. 그녀는 수십 년간 사교계에서 살아왔고, 모든 사람의 말 뒤에 숨겨진 의도를 읽는 데 익숙했습니다. 그것이 그 세계에서 살아남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미시킨에게는 그런 숨겨진 의도가 없었습니다. 말 뒤에 말이 없었습니다. 그것이 오히려 그녀를 당혹스럽게 했습니다. 그녀는 이따금 그가 매우 영리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순수한 것인지 구분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 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습니다.
세 딸 중 큰 딸 아델라이다는 화가였습니다. 그녀는 미시킨에게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할지 묻다가, 어느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미시킨은 그림에 대해 아는 척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을 말할 때, 그 말에는 기술이나 학식이 아닌 진심에서 오는 묘한 진실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녀는 그것이 낯설고 신선했습니다. 그녀 주변의 사람들은 늘 그림을 평가했지만, 미시킨은 그림을 느꼈습니다. 둘째 알렉산드라는 조용하고 사려 깊었습니다. 그녀는 미시킨을 관찰했고, 그가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다른지를 차분히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그를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그 인정이 어떤 감정으로 이어지는지는 그녀 자신도 아직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복잡한 감정을 품은 것은 막내 아글라야였습니다.
아글라야는 미시킨을 비웃었습니다. 그의 순진함을 놀리고, 그의 어색한 행동들을 흉내 냈습니다. 그 비웃음은 날카롭고 재기 있어서 듣는 이를 어리둥절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심 어린 경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는 소녀의 방어였습니다. 아글라야는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자신의 미모와 집안에만 관심을 가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녀를 진정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미시킨은 달랐습니다. 그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놀라지 않았고, 그녀의 날카로움에 물러서지도 않았습니다. 그것이 아글라야를 혼란스럽게 했습니다. 미시킨은 그 점을 알아보았고, 그렇기에 그녀의 조롱에 상처받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글라야가 말하는 것보다 아글라야가 숨기는 것에 더 귀를 기울였습니다.
한편 미시킨은 도시 곳곳을 천천히 걸어 다녔습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겨울이었습니다. 네바 강의 얼음이 빛을 받아 은빛으로 빛났고, 돌로 깔린 거리는 서릿발로 하얗게 덮여 있었습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골목도, 귀족들이 산책하는 대로도 구별 없이 걸었습니다. 좁고 어두운 골목에서는 가난의 냄새가 났고, 넓은 대로에서는 향수와 모피 냄새가 났습니다. 미시킨은 그 어느 곳에서도 발걸음을 재촉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지나치는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보았고, 그 얼굴들 안에서 각자의 삶을 읽으려 했습니다. 그 어느 곳에서도 그는 낯설었고, 동시에 낯설지 않았습니다.
그즈음 미시킨은 오래전 편지 한 통을 받았습니다. 먼 친척으로부터 온 유산 통보였습니다. 소액이었지만 그에게는 처음 갖게 된 재산이었습니다. 그것으로 그는 독립적인 삶을 꾸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돈이 생겼다는 사실은 그를 조금도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전히 가난한 이들 앞에서 허리를 굽혔고, 부자들 앞에서 아첨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위선이라고 불렀습니다. 재산이 생겼으면서도 가난한 척 행동한다고. 그러나 미시킨에게는 재산이 생기기 전과 후가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돈이 있어서 겸손한 것이 아니었고, 돈이 없어서 당당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오히려 사람들을 더욱 혼란스럽게 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를 교활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선량한 척하는 것이 가장 정교한 위선이라고. 그러나 미시킨에게 있어 선함은 전략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그 자체였습니다. 그는 선하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스타샤 필리포브나가 다시 나타났습니다.
로고진과 함께 도망쳤던 그녀가 돌아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습은 예전과는 달랐습니다. 예전의 그녀에게는 날카로운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세상을 향해 먼저 선전포고를 하는 듯한 당당함이. 그러나 지금의 그녀에게서는 그 날카로움이 무뎌져 있었습니다. 눈빛에는 이전보다 더 깊은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고, 표정에는 어떤 결심과 체념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로고진과의 시간이 그녀에게 무엇을 주었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보였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원했던 것이 아니었고, 그렇다고 완전히 원하지 않은 것도 아닌, 그 모호한 경계에서 그녀는 더욱 지쳐 있었습니다.
그녀는 미시킨을 찾아왔습니다.
그 만남은 짧았지만 조용히 강렬했습니다. 나스타샤는 미시킨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그녀는 그가 자신을 가엾게 여기는지 물었습니다. 그 물음에는 오랫동안 쌓인 감정이 담겨 있었습니다. 가엾음을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가엾음을 거부하고 싶은 것인지조차 그녀 자신도 알 수 없는 것 같았습니다. 미시킨은 잠시 생각한 후 대답했습니다. 가엾음이 아니라 그녀의 고통이 진짜라는 것을 안다고, 그리고 그 고통이 그녀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고.
나스타샤의 눈이 흔들렸습니다. 그것은 분노도, 슬픔도 아니었습니다. 오랫동안 아무도 해주지 않은 말을 처음 들은 사람의 표정이었습니다. 그녀는 평생 자신을 욕망하거나, 이용하거나, 동정하는 시선들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미시킨의 시선에는 그 어느 것도 없었습니다. 단지 그녀를 보는 시선이 있었습니다. 그 자체로.
그로부터 미시킨과 나스타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끈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사랑이라 불리기에는 너무 복잡하고, 우정이라 부르기에는 너무 깊은 무언가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끈이 이후 모든 비극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씨앗은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땅에 뿌려지느냐에 따라 꽃이 되기도 하고, 가시가 되기도 합니다.
【제4장】 흔들리는 마음
봄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찾아왔습니다.
눈이 녹으면서 거리는 질척하고 어수선해졌지만, 그 안에서 새싹이 돋아나는 것처럼 사람들의 마음도 조금씩 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겨울 동안 두껍게 쌓여 있던 것들이 표면으로 올라오는 계절이었습니다. 미시킨은 이제 이 도시에서 조금씩 자리를 찾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여러 사람들과 교류했고, 그의 이름은 에판친 집안 사람들의 입에서 점점 더 자주 오르내렸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를 별스러운 사람이라 불렀고, 어떤 이들은 그를 신기한 사람이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그의 존재가 이 도시에서 무시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해지고 있었습니다.
아글라야는 미시킨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 편지는 짧고 수수께끼 같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직접 말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만나고 싶다고, 벤치가 있는 정원에서, 아무도 없을 때 이야기하고 싶다고만 썼습니다. 미시킨은 그 편지를 몇 번이나 다시 읽었습니다. 아글라야의 마음이 그 짧은 문장들 사이에서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있다는 것을 그는 느꼈습니다. 그녀가 이 편지를 쓰기까지 얼마나 오래 망설였을지, 몇 번이나 쓰다가 멈추었을지를 생각하며, 그는 그 편지 안에 담긴 용기를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그 만남은 이루어졌습니다. 정원에는 이른 봄의 냉기가 남아 있었고, 벤치 위에는 아직 녹지 않은 눈의 흔적이 있었습니다. 아글라야는 평소의 날카롭고 빠른 말투와는 다르게 조용했습니다. 그 조용함 자체가 그녀에게 낯선 것이었고, 그 낯섦이 그녀를 더욱 솔직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녀는 나스타샤에 대해 물었습니다. 미시킨이 그녀를 사랑하는지를. 미시킨은 솔직하게 대답하려 했습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무엇인지 그는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나스타샤의 고통이 자신에게 닿는다는 것, 그녀가 스스로를 파괴해 가는 것을 그냥 지켜볼 수 없다는 것은 알았습니다. 그것이 사랑인지 연민인지, 혹은 그 둘이 섞인 어떤 것인지는 그도 말할 수 없었습니다.
아글라야는 그 대답을 듣고 오랫동안 침묵했습니다.
그 침묵 안에서 그녀는 무언가를 결심하는 것 같았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이렇게 말로 꺼내는 것이 처음이라는 것, 그것을 말하고 나면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말했습니다. 자신은 미시킨이 자신만을 바라봐 주기를 원한다고. 그것이 욕심이라는 것도 알고, 나스타샤가 더 불행하다는 것도 안다고. 그러나 그래도, 그것을 원한다고.
그것은 아글라야가 처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내보인 순간이었습니다. 그 순간의 아글라야는 사교계의 당당한 미인도, 재기 넘치는 소녀도 아니었습니다. 모든 방어를 내려놓은, 그저 사랑받고 싶은 한 명의 인간이었습니다. 그 솔직함은 그녀에게 몹시 낯선 옷이었고, 그렇기에 더욱 아름다웠습니다.
미시킨의 마음도 흔들렸습니다. 아글라야의 진심이 그에게 닿았습니다. 그는 나스타샤에 대한 연민과 아글라야에 대한 감정 사이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그에게 두 사람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단순한 감정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한 사람의 삶을 선택하고 다른 한 사람의 삶을 포기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아글라야를 선택하면 나스타샤는 더욱 깊은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갈 것이었습니다. 나스타샤 곁에 있으면 아글라야는 상처받을 것이었습니다. 그 어느 쪽도 그가 원하는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에게 선택을 요구했습니다.
그 무렵 로고진과의 관계도 복잡해졌습니다. 로고진은 나스타샤를 놓지 않으려 했고, 나스타샤는 로고진과 함께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미시킨에게로 향했습니다. 세 사람의 감정은 서로를 끌어당기고 밀어내면서 점점 더 위험한 방향으로 엉켜들었습니다. 어쩌면 그들 중 누구도 서로를 놓아주고 싶지 않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붙잡음이 서로를 점점 더 옥죄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미시킨과 로고진은 도시의 한 다리 위에서 마주쳤습니다. 네바 강 위에 이른 봄의 안개가 낮게 깔려 있었고, 다리 난간 너머로 강물이 어둡게 흘렀습니다. 로고진의 눈빛은 예전보다 훨씬 더 어두워져 있었습니다. 그는 지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피로가 그를 멈추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지친 사람이 더 무모하게 집착하는 것처럼, 그의 눈빛에는 이전보다 더 위태로운 무언가가 담겨 있었습니다.
그는 미시킨에게 자신의 십자가를 건네며 형제라 불렀습니다. 그 제스처 안에는 진심이 있었습니다. 서로 다른 세계에서 온 두 사람이 같은 한 여인을 중심으로 묶여 있다는 것에 대한 이상한 동지감이. 그러나 동시에 그 안에는 경고가 있었습니다. 나스타샤를 빼앗기지 않겠다는,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그녀를 잡겠다는 어두운 결의가. 미시킨은 로고진의 십자가를 받으며 자신의 십자가를 내어주었습니다.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습니다. 그것은 기묘한 화해이자, 비극의 예고였습니다.
그날 이후 미시킨에게 발작이 찾아왔습니다. 오랫동안 잠잠했던 간질이 다시 그를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의식을 잃기 직전, 미시킨은 이상하고 아름다운 감각을 경험했습니다. 극도의 명료함,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 이 세계의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다는 기묘한 평화. 그리고 곧이어 다가오는 어둠. 그것은 그의 병이 그에게 선사하는 잔인한 선물이었습니다. 잠깐 동안의 완전함, 그 다음의 무너짐. 완전히 깨어 있는 순간을 경험하고, 그 직후 모든 것을 잃는 것. 그것이 그의 삶과 닮아 있었습니다.
발작에서 깨어난 미시킨은 자신이 이 도시에서 얼마나 홀로인지를 실감했습니다. 그를 진심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가 선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이용하거나, 두려워하거나, 비웃었습니다. 선함은 이 세계에서 힘이 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상처 입기 쉬운 취약함처럼 보였습니다. 그는 그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선하지 않은 방법으로 이 세계와 관계 맺는 법을 그는 배우지 못했습니다. 아니, 배울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그의 비극이었습니다.
【제5장】 두 여인의 대결
여름이 왔습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여름은 짧고 강렬했습니다. 긴 낮과 짧은 밤이 사람들을 이상하게 들뜨게 했고, 그 들뜸 속에서 억눌렸던 감정들이 표면으로 올라오곤 했습니다. 그리고 그 여름 어느 날, 미시킨의 인생에서 가장 기묘하고 고통스러운 순간 중 하나가 찾아왔습니다. 아글라야와 나스타샤 필리포브나가 한자리에 만나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 만남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나스타샤가 직접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그녀는 아글라야에게 편지를 써서 만남을 요청했고, 아글라야는 그 요청을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그 자리에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겉으로 말해지지 않았지만, 방 안에 들어서는 순간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이 자리는 단순한 만남이 아니라, 어떤 결말을 향해 나아가는 자리라는 것을.
두 여인이 마주 앉는 순간, 방 안의 공기가 달라졌습니다.
아글라야는 단정하고 냉정한 표정이었습니다. 에판친 가의 딸로서, 사교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총명한 여인으로서의 자존심이 그녀의 자세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그녀는 어떤 상황에서도 먼저 흔들리지 않겠다는 결심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반면 나스타샤는 달랐습니다. 그녀의 눈빛은 불안하게 흔들렸습니다. 평소의 당당함이 어딘가 균열을 일으키고 있는 것처럼. 아글라야를 직접 마주하는 것이 그녀에게도 쉽지 않다는 것이 그 흔들림 속에 담겨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미시킨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아글라야는 말했습니다. 나스타샤가 미시킨의 연민을 이용하고 있다고, 그를 자신의 불행에 끌어들여 구원받으려 하고 있다고. 그 말은 날카로웠습니다. 그리고 일부는 사실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때로는 약함을 무기로 사용합니다. 나스타샤가 그것을 의식적으로 하는지 아닌지는 아글라야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만을 놓고 보면 그것이 미시킨을 붙들어두는 방법이 되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습니다.
나스타샤는 잠시 말을 잃었습니다. 그녀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이내 그녀는 천천히 대답했습니다. 아글라야가 미시킨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소유하려 한다고, 그를 자신의 이상적인 장식품으로 만들려 한다고. 그 말도 날카로웠습니다. 그리고 그것도 일부는 사실이었습니다. 아글라야는 미시킨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 원함 안에는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보다 그를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갖고 싶어하는 마음이 섞여 있었습니다. 그 마음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라면, 그것은 사랑이 아닐 수도 있었습니다.
두 여인의 말은 서로를 정확히 꿰뚫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연적 사이의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두 사람은 모두 미시킨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의 방식이 달랐고, 그 사랑이 요구하는 것이 달랐습니다. 나스타샤의 사랑은 파괴적이었습니다. 그녀는 미시킨이 자신을 구원해 줄 것이라 믿으면서도 동시에 그 구원을 거부했습니다. 아글라야의 사랑은 소유적이었습니다. 그녀는 미시킨을 원했지만 그 원함이 그를 옭아매는 것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 두 가지 사랑 사이에서 미시킨은 나침반 없이 서 있었습니다.
미시킨은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는 두 사람 사이에서 말 한마디를 꺼내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비겁함이 아니었습니다. 어느 쪽도 상처 입히고 싶지 않다는, 그러나 어느 쪽도 온전히 지킬 수 없다는 무력함이었습니다. 그는 두 사람을 바라보면서 자신이 이 상황에서 어떤 말을 해도 누군가를 더 깊이 상처 입힐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침묵했습니다. 그러나 그 침묵도 선택이었고, 그 선택도 결과를 만들었습니다.
이윽고 나스타샤가 먼저 말했습니다. 그녀는 미시킨에게 아글라야를 선택하라고 했습니다. 아글라야가 그에게 더 행복한 삶을 줄 수 있다고, 자신과 함께하면 그를 불행하게만 만들 것이라고. 그 말은 체념처럼 들렸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것은 체념의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체념 안에는 또 다른 무언가가 섞여 있었습니다. 자신을 포기함으로써 미시킨의 반응을 시험하려는, 그가 어떤 선택을 하는지를 보고 싶어하는 마음이.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미시킨의 눈빛이 나스타샤에게로 향했습니다. 그것은 의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스타샤가 스스로를 포기하는 말을 하는 순간, 그 고통이 미시킨에게 닿았고, 그의 눈이 자연스럽게 그녀를 향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아글라야가 보았습니다. 말이 아닌 시선 하나가 모든 것을 결정했습니다.
아글라야는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 표정에는 분노도, 슬픔도, 그 어떤 감정도 없었습니다. 아니, 너무 많은 감정이 한꺼번에 지나가서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녀는 오랫동안 처음으로 자신을 열었고, 그 열린 자리에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 상처는 나스타샤가 준 것도, 미시킨이 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저 이 세계가 움직이는 방식에서 온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말없이 방을 나갔습니다.
그것이 아글라야와 미시킨의 마지막 만남이었습니다.
나스타샤는 그 자리에 혼자 남았습니다. 미시킨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오랜 침묵이 흘렀습니다. 창밖으로 여름 저녁의 빛이 길게 들어왔고, 그 빛 속에서 먼지 입자들이 천천히 떠다녔습니다. 그 고요함 안에서 나스타샤는 조용히 울기 시작했습니다. 소리 없이, 눈물만이 뺨 위로 흘렀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그녀가 오래 간직해 온 눈물이었을 것입니다. 승리의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또 다시 무언가를 파괴했다는 것을, 그리고 그 파괴를 멈출 수 없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의 눈물이었습니다.
미시킨은 그 곁에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면서, 단지 그 곁에.
【제6장】 결혼식 전날 밤
나스타샤는 미시킨과 결혼하기로 했습니다.
그 결정은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에판친 집안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고, 사교계는 다시 술렁였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그 결혼의 의미를 분석하고, 이유를 추측하고, 결말을 예측했습니다. 그러나 그 분석들 중 어느 것도 정확하지 않았습니다. 나스타샤의 결정은 계산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깊은 곳에서 올라온, 마지막으로 한 번 자신에게 다른 가능성을 주려는 시도였습니다.
미시킨은 그 결정을 막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결혼이라는 형태를 통해 스스로에게 새로운 시작을 주려 한다는 것을, 자신을 용서하려 한다는 것을 그는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옳은 것인지, 그녀에게 실제로 좋은 것인지는 미시킨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는 결혼이 나스타샤를 구원할 것이라고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결혼을 거부하는 것이 그녀를 더 깊은 절망으로 이끌 것도 알았습니다. 그는 다만 그 결정 앞에서 함께 있기로 했습니다.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고, 어쩌면 그것이 그가 그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진실한 것이었습니다.
결혼식은 준비되었습니다. 날짜가 정해지고, 장소가 마련되고, 하객들이 초대되었습니다. 도시 곳곳에서 이 결혼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습니다. 어떤 이들은 미시킨을 불쌍하게 여겼고, 어떤 이들은 그를 어리석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이야기도 미시킨에게 닿지 않았습니다. 그는 나스타샤가 어떤 상태인지에만 집중했습니다.
나스타샤는 결혼식 전날 밤 예복을 입었습니다. 흰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아름다웠습니다. 거울 앞에 선 그녀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아름다운 신부였습니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 안에는 무언가 이미 결심된 것이 있었습니다. 마치 마지막 밤을 보내는 사람처럼. 그녀는 거울 속의 자신을 오래 바라보았습니다. 그 눈동자 안에 무엇이 지나가고 있었는지는 그녀만이 알 수 있었습니다.
로고진은 그 밤 나스타샤의 주변을 맴돌았습니다.
그는 결혼식이 열리는 거리 어딘가에 있었습니다. 마차 안에서, 혹은 어두운 골목 어귀에서, 그는 나스타샤가 교회로 향하는 길목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의 눈빛은 이미 정상이 아니었습니다. 오랜 집착과 절망, 그리고 자신이 영원히 그녀를 가질 수 없을 것이라는 예감이 그를 어둠의 끝으로 밀어붙이고 있었습니다. 사랑이 집착이 되고, 집착이 광기가 되는 것은 서서히 일어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시점을 넘어서면 그 방향은 돌이킬 수 없게 됩니다. 로고진은 이미 그 시점을 오래전에 지났습니다. 그는 나스타샤를 보면서 자신이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녀를 파괴하려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스스로도 멈출 수 없는 광기였습니다.
결혼식 당일 아침이 밝았습니다.
하객들이 모였습니다. 교회 앞에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서 있었고, 웅성거리는 소리와 마차 바퀴 소리가 뒤섞였습니다. 봄 공기 속에 교회의 종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미시킨도 교회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는 나스타샤를 기다렸습니다. 시간이 흘렀습니다. 약속된 시각이 지났습니다. 그래도 그는 기다렸습니다. 나스타샤는 오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표정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웅성거림이 커졌습니다.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모두가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전갈이 왔습니다. 나스타샤 필리포브나가 사라졌다는 것을. 그녀는 결혼식장으로 향하는 길에서 로고진의 마차에 올라탔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의지로. 그것이 전갈의 내용이었습니다.
미시킨은 그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수군거렸습니다. 어떤 이들은 동정의 시선을 보냈고, 어떤 이들은 기회를 노리듯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미시킨의 표정은 굳어 있지 않았습니다. 상처받은 자의 표정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무언가를 예감한 자의 고요함이었습니다. 나스타샤가 왜 그 마차에 올랐는지를 그는 알았습니다. 그것은 충동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나스타샤가 자신에 대해 내린 판결이었습니다. 자신은 행복해질 자격이 없다는, 자신이 행복해지면 곁에 있는 사람을 불행하게 만든다는, 그 오래된 믿음이 그녀를 다시 어둠 속으로 끌어당긴 것이었습니다.
그는 교회 앞 계단 위에서 오랫동안 서 있었습니다.
하늘은 흐렸고, 바람이 불었습니다. 결혼식에 쓰일 꽃들이 흩어졌습니다. 흰 꽃잎들이 돌바닥 위를 굴렀고, 바람이 그것들을 먼 곳으로 날려 보냈습니다. 미시킨은 그 꽃잎들이 바람에 날리는 것을 바라보면서 나스타샤가 어디에 있는지, 지금 무엇을 느끼는지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알면서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그에게 가장 무거운 것이었습니다.
그날 밤 미시킨은 로고진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그가 왜 그곳으로 갔는지는 명확하게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이성의 판단이 아니라 무언가 더 깊은 곳에서 오는 이끌림이 그를 그 방향으로 밀었습니다.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을 외면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7장】 어둠이 내린 곳
로고진의 집은 오래된 석조 건물이었습니다.
두꺼운 벽과 낮은 천장, 좁은 복도. 그 집은 외부의 빛을 차단하는 방식으로 지어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낮에도 어두웠고, 밤이면 더욱 깊은 어둠에 잠겼습니다. 복도의 바닥은 낡은 나무판이었고, 발소리가 날 때마다 삐걱거렸습니다. 그 소리가 이 집이 살아 있다는 유일한 신호처럼 느껴졌습니다. 빛이 들어오기 어려운 그 집은 마치 로고진의 내면을 형상화한 것처럼 어둡고 무거웠습니다. 미시킨이 문을 두드리자 로고진이 나왔습니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고, 눈빛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열에 달아올랐던 눈빛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이 타고 난 뒤 남은 재처럼 차고 공허한 눈빛이었습니다.
로고진은 미시킨을 안으로 들였습니다.
두 사람은 말이 없었습니다. 복도를 걸으면서 미시킨은 이 침묵이 보통의 침묵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무언가가 이미 끝난 후의 침묵이었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난 후에만 찾아오는 그런 종류의 고요함이었습니다. 복도를 지나 안쪽 방으로 들어서는 순간, 미시킨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습니다. 공기가 달랐습니다. 무겁고 차갑고, 그리고 무언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이미 일어났음을 알리는 정적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방 안에 나스타샤 필리포브나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누워 있었습니다. 흰 드레스를 입은 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아침에 입었던 바로 그 드레스였습니다. 결혼식장으로 향하려 했던 그 옷이었습니다. 미시킨은 그 자리에 멈추었습니다. 그의 몸이 굳었습니다. 숨이 멎을 것 같았습니다. 모든 것이 한순간에 이해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해가 몸의 모든 감각을 마비시켰습니다.
로고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나스타샤 곁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의 손은 떨리고 있었고,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것은 후회의 눈물인지, 슬픔의 눈물인지, 아니면 그 어느 것도 아닌 눈물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사랑했기 때문에 파괴했습니다. 그것이 로고진의 비극이었습니다. 집착이 사랑을 잠식하고, 사랑이 광기가 되고, 광기가 돌이킬 수 없는 결말로 이어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 앎이 그를 이 자리에 붙들어 두고 있었습니다.
미시킨은 나스타샤 곁에 앉았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밤이 깊어갔습니다. 창밖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여름 밤이 느리게 흘렀습니다. 방 안에는 세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명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한 명은 무너져 있었으며, 한 명은 그 사이에서 조용히 존재했습니다. 미시킨은 나스타샤의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얼굴에는 더 이상 고통이 없었습니다. 그녀를 그렇게 오래 괴롭혔던 것들, 그 모든 상처와 분노와 자기혐오가, 지금 이 순간 그 얼굴에는 없었습니다. 그것이 그를 더욱 깊은 슬픔으로 이끌었습니다. 살아 있을 때 그녀에게 그 평온을 줄 수 없었다는 것이.
그 밤 미시킨에게 발작이 찾아왔습니다.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발작이 시작되기 전 그에게 찾아오던 그 잠깐의 명료함도, 그 이상하고 아름다운 빛도 이번에는 없었습니다. 그저 어둠만이 왔습니다. 그리고 발작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이전의 그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그의 마음이 버틸 수 있는 한계였습니다. 너무 많은 것을 보고, 너무 많은 것을 느끼고, 그 무게를 오로지 자신의 영혼으로만 감당해 온 인간이 마침내 무너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선함은 그것이 아무리 진실한 것이라 해도, 무한정 지탱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것을 감당하는 몸과 마음이 부서지면, 선함 자체도 함께 침묵하게 됩니다.
며칠이 지났습니다.
에판친 집안 사람들이 미시킨을 찾아왔습니다. 에판친 부인은 그를 보자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미시킨의 눈빛은 변해 있었습니다.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전의 그 조용한 따뜻함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던 그 눈빛이 사라져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 무엇이 남아 있는지는 말하기 어려웠습니다. 공허함이라 하기엔 너무 애처롭고, 슬픔이라 하기엔 너무 고요한 무언가가 그의 눈에 담겨 있었습니다. 리자베타 부인은 그를 바라보며 처음으로 자신이 이 세계에서 무언가 잘못된 것을 오랫동안 당연하게 여겨왔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미시킨은 다시 스위스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를 데려다준 것은 에판친 부인이었습니다. 기차가 출발하는 역에서 그녀는 미시킨의 손을 오래 잡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선함이 이렇게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이 세계가 순수한 인간을 이렇게 다룬다는 것을 그녀는 그 순간에야 비로소 온몸으로 실감했습니다. 그것은 지식이 아니라 감각이었습니다. 머리가 아닌 심장이 받아들이는 종류의 앎이었습니다.
기차는 떠났습니다.
차창 밖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거리가 멀어졌습니다. 도시는 여전히 분주했습니다. 사람들은 오가고, 거래는 이루어지고, 소문은 다시 새로운 소문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아무것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세계는 한 인간의 파국을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이 세계의 방식이었습니다.
미시킨은 그 모든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창 밖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저 앉아 있었습니다. 그의 눈은 열려 있었지만,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스위스의 산과 호수와 소박한 농가들이 그를 다시 받아들일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으로 돌아가는 이 사람은, 처음 그곳을 떠났던 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순수함이 세상과 충돌할 때, 무너지는 것은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에필로그】
도스토옙스키는 「백치」를 통해 묻습니다. 진정으로 선한 인간은 이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가. 미시킨의 비극은 그가 악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너무 선했기 때문입니다. 욕망과 계산으로 움직이는 사회 속에서 순수한 영혼은 구원자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가장 먼저 상처받는 존재가 됩니다. 나스타샤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는 믿음 속에서 스스로를 파괴했고, 로고진은 사랑을 소유로 착각한 끝에 파국에 이르렀으며, 아글라야는 진심을 내보인 대가로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미시킨은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느끼면서, 그 무게를 홀로 감당하다 무너졌습니다. 이 작품은 단순한 러브스토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과 사회의 구조, 그리고 선함의 불가능성에 대한 깊은 질문입니다. 그 질문은 오늘날에도 유효합니다. 이상으로 도스토옙스키의 「백치」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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