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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골책방

거짓의 확률

by 제 4의 창 2026. 4. 20.
제 1 장 : 몰락과 기회

https://youtu.be/2_oHoCAYvF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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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김동민은 그렇게 믿었습니다.
 
김동민은 서울 강남구의 한 낡은 고시원 방에 앉아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화면에는 붉은 숫자들이 빼곡하게 나열되어 있었습니다. 손실 내역이었습니다. 투자금 소진율 98.7퍼센트. 남은 운영 자금 열흘치. 직원 퇴직금 미지급 총액 사억 삼천만 원.
 
그는 서른여덟 살이었습니다.
 
김동민은 연세대학교 통계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뒤, 국내 최대 규모의 금융 데이터 분석 기업에서 팀장 자리까지 올랐던 인물입니다. 이후 그는 인공지능 스타트업을 창업했습니다. 회사명은 프리딕트랩이었습니다. 사업 모델은 단순했습니다. 머신러닝 알고리즘을 이용해 해외 부동산 투자 수익률을 예측하고, 그 예측 데이터를 기업 투자자들에게 판매하는 것이었습니다.
 
초기에는 순조로웠습니다.
 
첫 해에 투자 유치 금액은 총 이십오억 원이었습니다. 언론은 그를 데이터 혁신가라고 불렀습니다. 한 경제 매거진은 그를 표지 모델로 선정했습니다. 그 잡지가 출간된 달은 공교롭게도 회사의 주요 알고리즘이 처음으로 심각한 오류를 낸 달이기도 했습니다.
 
예측 모델이 틀렸습니다.
 
동남아시아의 특정 지역 부동산 시장에서 예측값과 실제값의 오차가 허용 범위를 열 배 이상 초과했습니다. 투자자들이 손실을 입었습니다. 소송이 시작되었습니다. 벤처 캐피털은 투자금 회수에 나섰습니다. 핵심 개발자 세 명이 동시에 사직서를 냈습니다.
 
불과 여섯 달 만의 일이었습니다.
 
고시원 방 창문 너머로 도시의 불빛이 보였습니다. 김동민은 담배 한 개비에 불을 붙였습니다. 그는 원래 비흡연자였습니다. 몰락 이후로 생긴 습관이었습니다. 연기가 천장으로 퍼지는 것을 바라보며 그는 생각했습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알고리즘이었을까. 데이터였을까. 아니면 자신이었을까.
 
며칠째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눈 밑에는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냉장고에는 편의점에서 사온 컵라면 두 개와 캔맥주 하나가 남아 있었습니다. 스마트폰에는 읽지 않은 문자가 마흔 여섯 개 쌓여 있었습니다. 대부분은 채권자들의 연락이었습니다.
 
그날 밤, 그는 오래된 논문 파일 하나를 열었습니다.
 
박사 과정을 포기하기 직전에 쓰다 만 논문이었습니다. 제목은 '확률적 서술 방식이 의사결정에 미치는 심리적 영향'이었습니다. 논문의 핵심 주장은 단순했습니다. 인간은 같은 정보라도 확률의 형태로 제시될 때 더 쉽게 신뢰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이렇게 말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이 프로젝트는 잘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가 이렇게 말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이 프로젝트의 성공 가능성은 통계적으로 87.4퍼센트입니다."
 
두 번째 말을 더 신뢰하게 됩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소수점까지 붙은 구체적인 수치는 치밀한 분석의 결과물처럼 느껴집니다. 그것이 그냥 만들어낸 숫자일지라도 말입니다.
 
김동민은 논문을 읽다가 멈추었습니다.
 
그의 눈빛이 달라졌습니다.
 
그는 다시 노트북을 열었습니다. 이번에는 손실 내역이 아니라 새로운 문서를 만들었습니다. 제목을 입력했습니다.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 초안 1호.'
 
그는 오래 생각했습니다.
 
과거에 그는 실제 데이터로 사람들에게 예측을 팔려고 했습니다. 그 예측이 틀렸을 때 모든 것이 무너졌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머릿속에서 떠오른 것은 다른 방향이었습니다.
 
데이터를 팔 것이 아니라, 확률을 팔면 어떨까.
 
예측이 아니라 가능성을. 결과가 아니라 기회를. 그리고 그 확률이 얼마나 정밀하게 계산되었는지를 사람들에게 믿게 만들면 어떨까.
 
새벽 두 시였습니다. 고시원 방 안의 형광등이 미세하게 깜빡였습니다.
 
김동민은 담배를 재떨이에 눌러 끄고 타이핑을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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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장 : 확률이라는 상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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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불확실성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숫자에 기댑니다.
그 숫자가 만들어진 것인지도 모른 채.
 
김동민이 새로 구상한 사업 모델의 이름은 '글로벌 리셋 플랜'이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해외 이주 컨설팅 서비스였습니다. 동남아시아 특정 국가의 디지털 노마드 비자 취득을 도와주고, 현지 소규모 임대 사업을 연계해주며, 체류 비용과 초기 정착 자금 운용까지 패키지로 묶은 상품이었습니다. 그것이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핵심은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김동민은 그 상품에 하나의 숫자를 붙였습니다. 성공 전환율 92.3퍼센트. 이 숫자야말로 상품의 본질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구매하는 것은 이주 컨설팅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구매하는 것은 바로 그 숫자였습니다.
 
그는 사무실을 구했습니다.
 
서울 마포구의 공유 오피스였습니다. 월 임대료는 비교적 저렴했지만 외관은 깔끔하고 현대적이었습니다. 그는 책상 뒤에 대형 스크린을 설치하고 그래프와 지표들을 항상 띄워두었습니다. 방문하는 고객들이 숫자들로 가득 찬 화면을 보도록 설계된 공간이었습니다.
 
직원은 두 명이었습니다.
 
한 명은 스물다섯 살의 청년으로 대학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했으나 취업에 실패한 뒤 계약직으로 채용되었습니다. 다른 한 명은 서른 초반의 여성으로 예전 스타트업에서 마케팅을 담당했던 경력이 있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사업의 실체를 정확히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각자 맡은 역할만 수행했습니다.
 
김동민은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데이터 기반 이주 컨설팅 회사입니다. 92.3퍼센트라는 수치는 지난 3년간 유사 케이스를 분석한 결과입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92.3이라는 숫자는 그가 새벽에 논문을 읽다가 임의로 정한 수치였습니다. 90퍼센트보다는 높아야 신뢰감을 주고, 100퍼센트는 오히려 의심을 살 수 있었습니다. 소수점 이하까지 있어야 정밀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92.3이었습니다.
 
하지만 자료는 필요했습니다.
 
아무것도 없이 숫자만 내세울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공개된 논문들과 통계청 자료들을 수집했습니다. 동남아시아 거주 한국인 수, 해외 이주 후 경제적 만족도 조사, 디지털 노마드 관련 글로벌 설문 결과들을 선택적으로 편집했습니다. 유리한 수치는 크게 부각하고, 불리한 수치는 각주 깊숙이 묻었습니다.
 
그 과정을 그는 '데이터 큐레이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또한 성공 사례집을 제작했습니다.
 
총 열두 개의 사례가 담긴 소책자였습니다. 각 사례에는 실제 사람처럼 보이는 이름과 직업, 나이가 적혀 있었습니다. 이주 이전과 이후의 소득 변화, 삶의 질 지수, 정착 만족도 점수가 수록되어 있었습니다. 소책자는 전문 디자인 업체에 의뢰해 고급스럽게 제작했습니다.
 
그 열두 개의 사례 중 실존하는 인물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는 또 다른 장치를 마련했습니다.
 
온라인 커뮤니티에 성공 후기처럼 보이는 게시글들을 작성해 올렸습니다. 각기 다른 닉네임, 각기 다른 문체, 각기 다른 이주 국가. 그러나 공통적으로 글로벌 리셋 플랜을 통해 인생이 바뀌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계약서는 정교하게 설계되었습니다.
 
김동민은 이전 스타트업 운영 시절 법률 자문을 맡았던 변호사를 통해 계약서 구조에 대한 조언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스스로 계약서를 작성했습니다. 계약서 안에는 책임 제한 조항, 환불 불가 조건, 서비스 이행 범위를 모호하게 설정한 문구들이 촘촘히 삽입되어 있었습니다.
 
핵심 조항 가운데 하나는 다음이었습니다.
 
'본 서비스는 성공을 보장하지 않으며, 제시된 전환율 수치는 과거 유사 사례를 참조한 참고 지표입니다.'
 
이 문장은 계약서 열 페이지 분량의 중간 부분, 가장 읽기 불편한 위치에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글자 크기도 나머지 본문보다 작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준비되는 데 걸린 시간은 두 달이었습니다.
 
김동민은 처음 고객을 맞이하기 전날 밤, 다시 그 논문을 꺼내 읽었습니다.
 
인간은 확률 앞에 약해집니다.
 
특히 자신이 판단을 내려야 하는 상황일수록, 누군가 확신에 찬 숫자를 내밀면 그것에 기대고 싶어 합니다. 더 무서운 것은 그 경향이 교육 수준이 높을수록, 분석적 사고에 익숙할수록 오히려 강하게 나타난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미 숫자에 친숙한 사람은 숫자를 더 쉽게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김동민은 페이지를 덮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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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장 : 신뢰의 설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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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는 쌓이는 것이 아닙니다.
설계되는 것입니다.
 
박성희는 서른다섯 살이었습니다.
 
그녀는 서울 소재 한 보험연구원에서 리스크 분석가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이화여자대학교 통계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계량경제학 석사 학위를 받은 뒤 곧장 현재 직장으로 입사했습니다. 재직 연수는 여덟 해였습니다.
 
그녀의 일은 숫자를 읽는 것이었습니다.
 
의료 보험 청구 데이터에서 이상 징후를 탐지하고, 대규모 자연재해의 피해 규모를 확률 모델로 추정하며, 신규 보험 상품의 손해율을 예측하는 것이 그녀의 주된 업무였습니다. 하루에도 수백 개의 데이터 테이블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수치 안에서 패턴을 읽어내는 것이 그녀의 직업적 본능이었습니다.
 
그러나 박성희는 최근 지쳐 있었습니다.
 
이유는 단순하지 않았습니다. 직장 생활은 안정적이었지만 단조로웠습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출근하고, 같은 자리에 앉아 같은 종류의 데이터를 분석했습니다. 삼십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그녀는 자신의 삶이 어느 방향으로도 나아가지 않는다는 느낌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즈음 그녀의 어머니가 위암 판정을 받았습니다.
 
갑작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조용한 분이셨습니다. 딸에게 짐이 되지 않겠다며 혼자 검사를 받고 혼자 결과를 들은 뒤에야 박성희에게 알렸습니다.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이후의 치료 과정이 길어졌습니다. 박성희는 치료비를 감당하기 위해 적금을 해지했습니다.
 
경제적인 압박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 시기에, 그녀는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글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직장인 커뮤니티였고, 제목은 이러했습니다. '데이터 기반 해외 정착, 92.3퍼센트 성공률의 실체를 직접 경험했습니다.'
 
숫자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박성희는 분석가로서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92.3이라는 수치는 구체적이었습니다. 적당히 높지만 100이 아니기 때문에 과장처럼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녀는 게시글을 클릭했습니다.
 
글의 내용은 정돈되어 있었습니다. 작성자는 과거 마케팅 직종에 종사하다가 글로벌 리셋 플랜을 통해 동남아시아로 이주한 경험을 상세하게 기술했습니다. 초기 정착 과정의 어려움도 솔직하게 서술되어 있었고, 이주 이후의 수입 증가 내용도 구체적인 수치와 함께 제시되어 있었습니다.
 
그녀는 검색을 시작했습니다.
 
다른 커뮤니티에서도 유사한 후기들이 있었습니다. 모두 다른 문체로 쓰여 있었고, 각기 다른 국가로의 이주 경험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같이 글로벌 리셋 플랜에 긍정적이었습니다.
 
박성희는 상담을 신청했습니다.
 
사무실은 깔끔했습니다. 공유 오피스였지만 별도의 미팅룸으로 안내받았고, 벽면에는 커다란 모니터가 달려 있었습니다. 김동민이 들어왔습니다. 그는 잘 정돈된 캐주얼 정장 차림이었고, 악수를 건네는 손이 차분했습니다.
 
첫 미팅에서 그는 박성희에게 오히려 질문을 던졌습니다.
 
"어떤 데이터를 근거로 결정을 내리시는 분인지 먼저 이해하고 싶습니다."
 
그 질문은 탁월한 심리적 선제 공격이었습니다. 박성희는 자신이 분석가라는 사실을 말했습니다. 그러자 김동민은 표정을 바꾸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준비한 데이터를 직접 검토해보시겠습니까."
 
그가 화면에 띄운 자료는 방대했습니다.
 
동남아시아 거주 외국인 소득 변화 추이, 해당 국가 디지털 노마드 비자 발급 통계, 이주 후 5년 이내 국내 복귀율, 그리고 글로벌 리셋 플랜 참가자들의 성과 데이터 요약 보고서. 각 자료에는 출처가 표기되어 있었습니다. 논문 제목, 발행 기관, 연도까지 포함된 각주들.
 
박성희는 화면을 꼼꼼히 살펴보았습니다.
 
그녀의 눈은 빠르게 움직였습니다. 숫자들을 훑었고, 그래프의 축 단위를 확인했으며, 표본 크기를 점검했습니다. 그리고 이상한 점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성과 데이터 요약 보고서의 표본 크기가 너무 작았습니다. 불과 열여덟 명이었습니다.
 
그녀가 그 점을 지적하자 김동민은 즉시 답변했습니다.
 
"맞습니다. 현재 참가자 숫자가 많지 않아 표본이 작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정밀하게 관리하고 있습니다. 참가자 전원을 개별적으로 추적하고 있으며, 그것이 92.3퍼센트라는 수치의 신뢰도를 높이는 기반입니다."
 
그 답변은 빈틈이 없어 보였습니다.
 
이후 세 차례의 미팅이 더 이어졌습니다.
 
각 미팅마다 김동민은 새로운 자료를 제시했습니다. 그는 박성희가 질문을 많이 한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것을 단점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활용했습니다. 질문이 나올 때마다 준비된 데이터로 정면 대응했습니다. 그 과정 자체가 신뢰를 쌓는 과정이 되었습니다.
 
박성희는 분석가였습니다.
 
분석가는 질문이 충분히 답변되면 결정을 내립니다. 네 번의 미팅 끝에 그녀의 의문은 거의 해소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녀는 계약서를 받아들었습니다.
 
투자 금액은 사천오백만 원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치료비를 제외하고 남은 적금과 퇴직금 예상액을 계산한 뒤 낼 수 있는 최대 금액이었습니다.
 
계약서는 두꺼웠습니다. 열한 페이지였습니다. 박성희는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습니다. 그러나 중반부의 작은 활자로 인쇄된 책임 제한 조항은 그녀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아니, 들어왔지만 당시의 그녀에게는 크게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서명이 완료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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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 균열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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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가 무너지는 것은 순간이 아닙니다.
그것은 조용히, 아주 느리게 시작됩니다.
 
계약 체결 이후 첫 두 달은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김동민은 정기적으로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이주 준비 단계 진척 보고서, 현지 파트너 기관과의 협의 내용, 비자 신청 일정 계획표. 모든 문서는 전문적으로 편집되어 있었고, 도표와 일정표까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박성희는 보고서를 꼼꼼히 검토했습니다.
 
그리고 이상한 점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세 번째 달이 시작되면서 첫 번째 지연이 발생했습니다.
 
김동민은 이메일로 통보했습니다. 현지 비자 정책에 변경이 생겨 신청 절차가 일부 수정되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새로운 서류가 필요하고, 일정이 약 삼 주 늦어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박성희는 그 내용을 인터넷으로 확인해보았습니다.
 
비자 정책 변경 관련 공지가 실제로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그 변경의 영향 범위는 글로벌 리셋 플랜의 주요 참가자 유형에는 해당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박성희는 이에 대해 질문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김동민의 답변은 신속했습니다.
 
"네, 정확한 지적입니다. 일반적인 경우는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만, 저희가 활용하는 특정 비자 트랙은 해당 변경 조항의 간접적인 영향 범주에 포함됩니다. 관련 공문을 첨부해드리겠습니다."
 
첨부 파일이 왔습니다. 공문처럼 보이는 문서였습니다. 로고가 있었고, 서명이 있었고, 날짜가 있었습니다. 박성희는 그것을 다운로드해서 열었습니다.
 
그러나 그 공문에는 김동민이 언급한 특정 비자 트랙 관련 내용이 명시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박성희는 다시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이번에는 더 구체적인 조항 번호를 묻는 질문이었습니다.
 
답변은 이틀 후에 왔습니다.
 
"현재 현지 파트너와 정확한 조항 해석을 조율 중입니다. 다음 주 중으로 상세 내용을 전달하겠습니다."
 
다음 주 중으로는 연락이 오지 않았습니다.
 
박성희는 직접 사무실을 찾아갔습니다.
 
김동민은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는 당황한 기색 없이 박성희를 맞았습니다. 미팅룸에서 차를 내왔습니다. 그리고 지연 이유를 다시 설명했습니다. 이번에는 이전과 조금 다른 이유가 추가되었습니다.
 
현지 은행 계좌 개설 규정이 바뀌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초기 자금 운용 구조를 재설계하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박성희는 마음속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조여드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스프레드시트를 열었습니다. 김동민으로부터 받은 모든 이메일과 문서, 보고서를 날짜순으로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제시된 일정과 실제 진행 상황을 비교했습니다.
 
세 가지 패턴이 보였습니다.
 
첫째, 지연이 발생할 때마다 외부 환경 변수가 이유로 제시되었습니다. 비자 정책, 현지 규정, 파트너 기관 사정. 이 중 직접 확인 가능한 변수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둘째, 박성희가 구체적인 증거 자료를 요구할 때마다 답변이 지연되었습니다.
 
셋째, 각 지연의 기간은 처음에는 삼 주였고, 다음에는 한 달이었으며, 이번에는 아직 기한조차 제시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박성희는 그날 밤 오래 앉아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스스로를 설득하려 했습니다. 해외 업무는 변수가 많습니다. 현지 사정은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김동민은 성실하게 소통하고 있습니다. 자료도 충분히 제공했습니다.
 
그러나 설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그 성과 데이터 보고서를 다시 꺼냈습니다. 처음 미팅 때 화면에서 봤던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인쇄물로 받은 자료였습니다.
 
표본 크기 열여덟 명. 성공 전환율 92.3퍼센트.
 
그 숫자를 만족시키려면 열여섯 명 이상이 성공해야 합니다. 나머지는 최대 두 명만 실패할 수 있습니다.
 
박성희는 자신이 몇 번째 참가자인지 생각했습니다. 김동민은 상담 초기에 현재 열다섯 번째 참가자라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글로벌 리셋 플랜이 실제로 완료된 참가자는 몇 명이어야 할까요.
 
이 단순한 계산 하나가 그녀의 머릿속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성공 전환율 92.3퍼센트.
 
박성희는 그 숫자를 처음으로 의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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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장 : 추적과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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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은 숫자 안에 숨어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을 찾는 것도 숫자로 합니다.
 
박성희는 그날 이후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결단이라기보다 본능에 가까웠습니다. 분석가로서 오랫동안 훈련된 직업적 반사였습니다. 이상 징후가 감지되면 추적합니다. 패턴이 발견되면 검증합니다. 가설이 생기면 반증을 시도합니다.
 
그녀는 우선 온라인에서 발견했던 성공 후기들을 다시 찾기 시작했습니다.
 
이번에는 단순히 읽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각 게시글의 작성 시기, 커뮤니티 특성, 닉네임의 활동 이력, 작성된 문장의 구조적 패턴을 분석했습니다. 게시글들을 날짜순으로 나열하자 흥미로운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모든 게시글은 글로벌 리셋 플랜 홈페이지가 오픈된 시점 이후에 작성된 것들이었습니다.
 
홈페이지 오픈 이전에는 어떤 커뮤니티에도 이 서비스를 언급한 글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서비스의 역사가 2년도 채 되지 않는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렇다면 92.3퍼센트라는 수치를 산출한 '3년간의 유사 케이스 분석'은 어디서 나온 것이었을까요.
 
박성희는 출처 추적을 시작했습니다.
 
김동민이 제시한 자료들 중 논문 출처가 표기된 것들을 하나씩 검색했습니다. 논문 대부분은 실제로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그 논문들의 실제 내용은 김동민이 제시한 자료에서 인용된 방식과 상당히 달랐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의 논문은 동남아시아 거주 외국인 소득 변화를 분석한 자료였습니다. 그러나 해당 논문의 조사 대상은 은퇴 후 이주자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고, 경제 활동 목적의 이주자들은 연구 범위에서 명시적으로 제외되어 있었습니다. 김동민은 그 논문을 마치 경제 활동 이주자 전반에 적용 가능한 것처럼 제시했던 것입니다.
 
또 다른 논문은 박성희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인용된 저자명과 발행 연도, 학술지명을 조합해 검색해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데이터베이스를 세 군데 이상 검색했지만 동일 논문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박성희는 그 논문의 제목을 별도 파일에 기록해 두었습니다.
 
다음으로 그녀는 성공 사례집을 분석했습니다.
 
사례집에 등장하는 열두 명 중 온라인에서 추적 가능한 인물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이름을 소셜미디어에서 검색해도, 블로그 주소를 추적해도 어디서도 실존을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나마 한 사례의 인물은 그 직업과 지역, 나이 조합이 너무 일반적이어서 수십 명이 해당 범주에 포함될 수 있는 수준이었습니다.
 
사례집은 허구였습니다.
 
박성희는 이제 핵심으로 들어갔습니다.
 
92.3퍼센트라는 수치 자체를 분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수치가 실제라면, 어떤 방법으로 산출되었든 일정한 전제 조건이 필요합니다. 첫째, 서비스가 완료된 참가자 집단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 그 집단에 대해 동일한 기준으로 성공 여부를 평가해야 합니다. 셋째, 성공의 정의가 명확해야 합니다.
 
그러나 계약서 어디에도 성공의 정의는 없었습니다.
 
성공이 무엇인지 정의되지 않은 수치는 검증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검증이 불가능한 수치는 반증도 불가능합니다. 반증이 불가능한 수치는 과학적 의미에서 숫자가 아닙니다. 그것은 장식입니다.
 
그제서야 박성희는 이해했습니다.
 
92.3이라는 숫자는 처음부터 증명의 도구가 아니었습니다. 신뢰의 도구였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믿게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숫자였습니다. 숫자처럼 보이는 것이지, 실제 숫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이 사실을 정리한 분석 보고서를 작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총 서른두 페이지의 문서였습니다. 출처가 부정확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논문 목록, 사례집 인물들의 온라인 추적 불가능 사실, 성공 정의의 부재, 계약서 책임 제한 조항의 위치와 가독성 문제, 지연 통보 패턴 분석, 비자 정책 변경 이유의 실제 검증 결과.
 
그녀는 이 보고서를 가지고 국가 기관의 금융 피해 신고 센터를 찾아갔습니다.
 
접수 직원은 보고서를 검토하면서 잠시 멈추었습니다.
 
"이렇게 정리해서 오신 분은 처음이시네요."
 
직원의 말이었습니다.
 
박성희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다음 절차를 물었습니다.
 
신고가 접수되었습니다.
 
그로부터 열이틀 후, 그녀는 담당 수사관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유사한 피해자가 있었습니다. 현재 세 명을 추가로 파악했고, 더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수사관의 말이었습니다.
 
박성희는 전화를 끊은 뒤 잠시 창밖을 바라보았습니다.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다시 컴퓨터를 켰습니다.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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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 장 : 진실의 붕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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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의 구조물은 한 곳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무너집니다.
 
수사는 넉 달에 걸쳐 진행되었습니다.
 
수사 기관은 박성희가 제출한 분석 보고서를 토대로 글로벌 리셋 플랜의 사업 구조를 역추적했습니다. 공유 오피스 임대 계약서, 직원 고용 계약서, 홈페이지 서버 IP 기록, 법인 계좌 거래 내역, 인용된 논문들의 원문 확인 작업이 이루어졌습니다.
 
피해자는 총 아홉 명이었습니다.
 
투자 금액의 합산은 약 삼억 사천만 원에 달했습니다. 피해자들의 직업은 다양했습니다. 중견 기업 과장, 프리랜서 번역가, 전직 교사, 개인 사업자. 그러나 박성희 외에도 여러 명이 분석 또는 회계 관련 직업 종사자였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수사 과정에서 김동민이 작성한 내부 메모가 발견되었습니다. 그 메모는 타깃 고객 유형을 분류한 것이었습니다.
 
'숫자에 익숙한 직업군 우선 타깃. 이들은 데이터를 요구하지만 제공된 데이터를 검증하는 데 과도한 시간을 들이지 않는다. 처음 몇 가지 데이터가 그럴듯하면 나머지는 믿는 경향이 있음. 분석가, 회계사, 교사 등 구체적 지식은 있으나 해당 분야 전문성은 없는 직군에서 신뢰 형성이 빠름.'
 
박성희는 이 메모를 수사 자료로 접한 날 밤, 오래 앉아 있었습니다.
 
자신이 정확히 타깃이었습니다.
 
분석 능력을 가졌지만, 해외 이주 및 비자 관련 실무 경험이 없는 사람. 숫자를 믿되, 그 숫자의 출처를 현장에서 직접 검증할 방법이 없는 사람. 그녀는 그 조건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김동민의 계산에 한 가지 오류가 있었습니다.
 
박성희는 늦게라도 추적했습니다.
 
수사 과정에서 또 다른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성공 사례집의 열두 개 사례 중 몇 개는 실제로 존재하는 해외 거주 한국인들의 블로그에서 내용을 무단으로 발췌하고 인물 정보를 변형해 만든 것이었습니다. 저작권 침해이자, 인물 허위 창작이었습니다.
 
인용된 논문들 가운데 두 개는 아예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저자명과 학술지명을 실제 존재하는 것들로부터 조합해 만들어낸 허위 출처였습니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것이 드러났습니다.
 
글로벌 리셋 플랜을 통해 실제로 이주 절차가 완료된 참가자는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아홉 명의 피해자 모두, 이주 준비 단계에서 각기 다른 이유로 지연이 반복되다가 어느 순간부터 연락이 뚝 끊겼습니다. 더 늦게 참가한 이들일수록 지연 기간이 더 짧았고, 더 빨리 연락이 두절되었습니다.
 
이주가 애당초 계획된 적이 없었습니다.
 
계약서의 책임 제한 조항은 그것을 위해 존재했습니다. 서비스가 이행되지 않아도 계약 범위 내의 준비 활동을 했다고 주장할 수 있도록 설계된 구조였습니다. 성공 전환율 92.3퍼센트는 이행 여부를 의미하는 수치가 아니라 그저 구매 결정을 이끌어내기 위한 장식이었습니다.
 
김동민은 구속 전 조사에서 일관된 입장을 유지했습니다.
 
"저는 이주 서비스의 가능성을 제시했습니다. 계약서에도 명시된 바와 같이 성공을 보장한 것이 아닙니다. 외부 환경 변화로 인한 지연은 서비스 제공자의 귀책 사유가 아닙니다."
 
그 말이 법정에서도 반복될 것이 명백했습니다.
 
구속 영장이 발부되었습니다.
 
박성희는 그 소식을 전해들은 날 저녁, 처음으로 울었습니다.
 
분노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안도도 아니었습니다. 슬픔에 가까운 감정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치료비 때문에 모아두었던 돈, 조금 더 나은 삶을 향해 내밀었던 손, 믿을 만하다고 판단했던 숫자들.
 
그 모든 것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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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 장 : 법정과 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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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은 진실을 판단하는 곳이 아닙니다.
법정은 무엇이 기망인지를 판단하는 곳입니다.
그것이 같은 것 같지만, 다르기도 합니다.
 
재판은 총 여섯 번의 공판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법원은 서울 서초구에 위치한 형사 법원이었습니다. 피고인석에 앉은 김동민은 정장을 갖추어 입고 있었습니다. 재판 기간 내내 그의 표정은 크게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검사 측은 사기죄와 유사수신행위 규제법 위반을 적용했습니다.
 
핵심 공소 내용은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 성공 전환율 92.3퍼센트는 객관적 근거 없이 작위적으로 생성된 수치이며, 이를 고객에게 제시한 행위는 허위 사실 고지에 해당합니다.
 
둘째, 제시된 데이터 자료들 중 존재하지 않는 논문 두 건을 포함한 다수의 자료가 허위로 작성되거나 왜곡되어 제시되었습니다.
 
셋째, 피해자들로부터 수령한 금원에 대해 계약 목적에 부합하는 서비스를 전혀 이행하지 않았습니다.
 
변호인은 반박했습니다.
 
92.3퍼센트는 미래 예측 수치가 아니라 참고 지표이며, 계약서에 성공 보장이 아님을 명시한 이상 법적 허위 고지로 볼 수 없다. 또한 서비스 지연은 피고인의 귀책 사유가 아닌 외부 환경 변화에 기인한 것이며, 이는 계약서 내 불가항력 조항으로 보호된다.
 
박성희는 증인으로 출석했습니다.
 
그녀는 법정에서 자신이 작성한 분석 보고서를 바탕으로 증언했습니다. 목소리는 차분했습니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습니다.
 
검사가 물었습니다.
 
"92.3퍼센트라는 수치가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쳤습니까."
 
박성희가 답했습니다.
 
"네.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 수치가 없었다면 저는 계약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변호인이 반대 신문을 했습니다.
 
"증인은 전문 분석가입니다. 계약서를 검토할 능력이 충분했음에도 서명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결정에 대한 책임은 증인에게도 있지 않습니까."
 
법정이 잠시 조용해졌습니다.
 
박성희는 잠깐 생각한 뒤 답했습니다.
 
"저는 제공된 데이터를 검토했습니다. 그 데이터의 출처가 허위라는 사실을 저는 알 수 없었습니다. 분석은 진실한 데이터를 전제로 합니다."
 
최후 변론에서 김동민은 법정에 서서 말했습니다.
 
"저는 사람들에게 가능성을 제시했습니다. 그 가능성이 실현되지 못한 것은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저는 처음부터 끝까지 가능성을 이야기했을 뿐, 확실한 결과를 약속한 적이 없습니다."
 
그 말이 끝나고 법정이 다시 조용해졌습니다.
 
판사가 발언했습니다.
 
판결문 요지는 이러했습니다.
 
"피고인이 제시한 성공 전환율 수치는 근거 없이 생성된 것으로, 이를 통계적 분석의 결과물인 것처럼 제시한 행위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그 수치가 과학적 방법에 의해 산출된 것이라고 오인하게 만들 소지가 있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단순한 과장 광고의 범주를 넘어, 상대방의 판단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허위 정보의 제공으로 보아야 합니다."
 
판사는 계속했습니다.
 
"피고인은 가능성을 제시했을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법정은 이 사건에서의 핵심 문제가 바로 그 지점에 있다고 봅니다. 피고인이 제시한 수치와 자료들은, 단순한 가능성의 언급이 아니라, 수신자로 하여금 가능성이 거의 확실성에 가깝다는 인식을 형성하도록 설계된 것입니다. 가능성과 확신 사이의 경계를 의도적으로 흐리게 한 것, 그것이 이 사건의 기망입니다."
 
선고는 징역 삼 년이었습니다.
 
집행 유예 없이 실형이었습니다.
 
법정 안에서 누군가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박성희는 법정 밖으로 나왔습니다.
 
서초구의 건물들이 오후 햇살 속에 서 있었습니다. 그녀는 계단에 잠시 서 있었습니다. 어머니에게 전화를 해야 했습니다. 담당 수사관에게 결과를 알려야 했습니다. 해야 할 일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잠시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서 있었습니다.
 
재판이 끝났다는 것,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천천히 느끼고 있었습니다.
 
돈을 돌려받을 수 있다는 보장은 없었습니다.
 
김동민이 수령한 금원의 상당 부분이 이미 사용된 상태였고, 법인 계좌에 남아 있는 금액은 피해자 아홉 명이 나누기에도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민사 소송을 별도로 제기해야 했습니다. 그 과정은 또 길고 지칠 것이었습니다.
 
박성희는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이것으로 끝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적어도 한 가지는.
 
 
그로부터 한 달 뒤.
 
박성희는 자신의 회사 회의실에서 발표를 했습니다.
 
팀 내부 세미나였습니다. 주제는 '데이터 기반 의사결정의 취약점'이었습니다. 그녀는 이 사건에서 얻은 교훈을 중심으로 발표 자료를 만들었습니다. 물론 개인 신상 정보는 모두 제거한 익명 사례로 처리했습니다.
 
발표 자료의 첫 슬라이드에는 한 문장이 적혀 있었습니다.
 
'숫자는 진실을 담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숫자의 형태가 진실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동료들이 귀를 기울였습니다.
 
박성희는 화면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프들이 있었습니다. 표들이 있었습니다. 수치들이 있었습니다. 데이터가 있었습니다. 그녀의 일상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녀가 숫자를 보는 방식은 달라져 있었습니다.
 
그녀는 이제 숫자를 읽기 전에 먼저 하나의 질문을 합니다.
 
이 숫자는 어디서 왔는가.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것을 바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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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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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숫자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데이터는 어디에나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수면의 질 점수를 확인합니다. 걸어가면서 걸음 수를 봅니다. 주식 시장의 지수를 확인하고, 뉴스 기사에 달린 신뢰도 지표를 읽습니다. 구매하려는 제품에는 별점과 리뷰 개수가 붙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숫자들을 믿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그 믿음은 옳습니다. 그러나 항상 옳지는 않습니다. 숫자가 있다는 사실이 그 숫자가 진실이라는 증거는 아닙니다.
 
김동민이 발견한 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은 오래전부터 숫자로 속여왔습니다. 다만 방식이 정교해졌을 뿐입니다. 과거에는 말로 속였습니다. 이제는 데이터로 속입니다. 과거에는 도장을 위조했습니다. 이제는 출처를 위조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박성희가 발견한 것은 단 하나였습니다.
 
숫자를 거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숫자를 더 깊이 보는 것입니다. 수치 뒤에 있는 과정을 묻는 것입니다.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누가 만들었는가. 무엇을 목적으로 제시되었는가.
 
그 질문이 귀찮을 때가 있습니다.
 
모든 숫자에 그 질문을 던지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큰 결정을 앞두고 있을 때만큼은, 그 숫자가 어디서 왔는지를 물어볼 수 있어야 합니다.
 
92.3퍼센트.
 
그 숫자는 지금도 어딘가에서 다른 이름으로 살아 있을 것입니다. 다른 숫자로, 다른 상품으로, 다른 형태로. 그러나 본질은 같습니다.
 
믿게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숫자.
 
그것이 거짓의 확률입니다.